9. 나와 나 사이의 거리

by 설안
이 글은 걷는 사람의 기록, 아홉 번째 이야기다. 하루를 건너온 뒤, 나와 나 사이의 거리를 다시 가늠해 보는 시간에 대하여.


어느덧 밤이 되어 침대에 올라와 헤드 조명을 켜고 누웠는데, 문득 올려져 있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PM 11:12.

분명해야 할 일들을 해냈고 무난한 하루였는데, 하루 끝에 남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잘 살았다는 감각과, 잘 살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동시에 남는 밤이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쉬는 일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나의 낯섦을 탓하곤 했다.


나는 매일 주어지는 하루에 써야만 하는 에너지와 느껴야 하는 감정의 총량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빛이 내려앉은 풍경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햇볕에 몸을 맡기면 훈훈한 온기가 가슴 가득 스며 이내 행복해지니까. 그렇게 더 걷고 싶지 않을 때까지 걷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집이란 사전적인 의미의 공간이기보다, 내가 다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밖으로 나가 세상을 만나고 나서야 나에게 조금 더 가까워졌다. 집에 머무르는 것이 나를 쉬게 하는 날도 있지만, 어떤 날에는 세상 속으로 한 번 나갔다 돌아와야 비로소 나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온전히 쉴 수 있는 마음은 안과 밖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긴밀히 닿아 있는 상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오롯이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만지는 시간,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벅찬 마음으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 나에게 쉼이 되어 주었다.


마음의 거리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고 싶은지, 무엇을 느끼며 나를 발견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집이 나와 가장 가까운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곳이 온전히 쉴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는 것도, 나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좁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느 곳에 있든, 지금 내가 어느 공간에 있는지보다 나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나와 가까이 닿아 있기 위한 나만의 규칙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환기를 하고, 빛이 들어오는 자리로 몸을 옮겨 가만히 그곳에 앉아 있거나,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따뜻한 물로 씻은 뒤, 천천히 아침 산책을 나서는 일.


매일 빛이 들어오는 길을 걸으며 몸으로 하루를 밝히는 일과 같은 이런 작은 규칙들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다짐이라기보다, 나에게 조금 더 가까워지기 위한 생활의 방식에 가까웠다.


그렇게 나선 산책길 위에서 나는 알게 된다.

모든 날이 같은 거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떤 날은 3,000걸음만 걸어도 집으로 돌아갈 힘이 생기고, 어떤 날은 19,000보를 걸어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날이 있다.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찾아 아주 먼 거리를 건너게 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동네 골목을 몇 번 오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지는 날이 있는 것이다.


삶이 늘 같은 속도로 나를 끌어당기거나 밀어내지 않는 것처럼, 어제보다 덜 걸은 오늘도, 어제보다 더 멀리 간 내일도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살게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점점 ‘충분하지 않은 하루’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나를 몰아붙이는지 깨닫는다. 사실 오늘 하루도 이미 나의 많은 마음을 따라가느라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날에도 숨 쉬고, 버티고, 하루를 끝까지 통과해 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날은 나에게 충분한 거리였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알지 못하는 거리를 함부로 가능하다고 믿기보다, 묵묵히 나를 만지며 걸어 나갈 것.


오래도록 걷기도 했고, 때로는 지친 마음에 얼마 걷지 못하고 되돌아선 날들까지 모두 끌어안으며, 나는 길 위에서 하루의 거리, 나와 나 사이의 거리, 삶을 마주하고 내다보는 거리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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