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마음이 비워질 때, 다시 길 위에 서는 이유

by 설안
이 글은 걷는 사람의 기록, 여덟 번째 이야기다. 아무 일 없어 보이는 날에도, 마음이 길을 찾는 순간에 대하여.


혼자 걷는 시간 속에서 삶을 대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날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마음이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와 크게 부딪힌 것도 아니고, 스스로에게 실망할 만큼의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하루를 보내고 난 뒤 왠지 알 수 없는 적적함이 맴도는 날.


해야 할 일들을 모두 해냈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는데,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무엇일까.


분명히 하루를 살아냈는데, 정작 나 자신은 그 하루의 어디에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 수면 아래에 잠겨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에 비친 풍경처럼 불투명하게 세상을 엿보고 있는 느낌. 보이지만 내가 만질 수 없는 세상 속에 속해 있는 것 같은 이질감을 느낄 때면 '오늘은 비가 내리는 날이구나' 하고 마음의 날씨를 알아차리곤 했다.


퍼붓는 비에 눈을 뜨기도 어려운데, 그 비를 맞으며 계속 걸어가고 있으니 삶이 내게 '잠시 처마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운 겨울에 괜히 마음까지 움츠러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듯, 꽃이 만개하고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는 봄날에도 나까지 피어있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마음이 일러주었다.


물론, 마음의 날씨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매일 출근하고, 퇴근해서도 이어지는 일들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비를 맞는 대신 나만의 처마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일, 작은 우산을 펴고 다시 발을 내딛는 일은 중요하다. 아주 잠깐이라도 혼자 옥상에 올라가서 숨을 돌리거나 잠시 근처를 걸으며 마음을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이 비는 언젠가 지나갈 거라는 믿음으로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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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우거진 길을 걸으며 비를 피할 때 앞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얻듯이, 나는 그 마음과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을 마주친다. 마치 또 다른 나, 빛을 두르고 있는 나의 그림자와 나란히 걷는 듯한 그 감각 속에서 나는 도망치지 않고, 억지로 밀어내지도 않은 채 비가 내리는 길 위의 나와 따뜻한 햇살 아래를 걷는 나를 함께 보듬는다.


괜찮다고 애써 외면했던 마음을 인정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순간,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붙들 필요도, 내 삶을 증명해 낼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여기 서 있고, 숨 쉬고 있고,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해진다.


나는 점점 알게 된다.

이유 없이 길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란, 삶이 나에게 “계속 흘러가기보다, 지금의 날씨를, 몸에 닿는 촉감을, 마음을 바라보며 흘러가라”라고 건네는 신호에 가깝다는 것을.


채워지지 않은 마음을 억지로 달래려 애쓰기보다, 빗물에 쓸려간 마음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주는 일은 삶이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을 내가 먼저 허락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


삶에는 이렇듯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안은 채로도 하루를 통과해야 하는 날들이 있고,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완벽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도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마음이 화창하지 않아도, 푹 젖은 몸을 털어내지 못한 채로라도 삶의 장면 속에 나를 다시 놓아보는 일.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선다.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여전히 이 삶 안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인하기 위해서.


길 위에서 나는 젖어 있는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완성되지 않은 채로도 오늘을 건너갈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서툰 채로도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조용히 몸으로 익혀 간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빼곡한 것은 이내 터져버리고 말지만 우리를 에워싼 공기가 여백을 만들며 서로를 지탱해 100%를 이루듯이, 삶도 빛과 바람과 비와 공기가 적절히 순환하며 삶을 이룬다. 그러니, 나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삶을 채우고, 나머지는 흘러가게 두어도 괜찮다.


비가 내려 모든 것이 쓸려내려 간 듯 적적한 날에도, 강한 빛이 모든 것을 태워버린 듯이 느껴지는 날에도 그저 그 마음을 바라봐 줄 것. 겉돌지 않은 채로 온전히 나의 하루들을 마주하며 길 위에 설 수 있는 마음은 나의 힘으로만 채우려 하지 않는 마음, 받아들이기 위해 비워둔 자리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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