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
우리는 스마트폰 촬영이 좀 더 익숙한 사람들이다. 국내 보급률이 95%를 넘어간 스마트폰은 모든 이들의 사진 촬영을 해결하고 있다. 기술이 방법을 바꾸고 방법은 결과를 바꾸니, 스마트폰 세대의 사진 미학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더 선명하고 정확하게 기록되며 촬영은 더 간편하고 빠르게 발전했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 앞에서 사진은 어떤 피사체든 담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우린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셔터를 누를 결정적 순간이다.
필자는 지난해 필름 카메라에 입문했다. 아버지가 20년 전 사용하던 똑딱이 카메라를 창고 서랍에서 발견한 것이 계기였다. 고장 난 카메라를 고쳐 쓰니 처음엔 필름의 질감이 마냥 신기했다. 디지털카메라와 다른 따뜻함과 유화처럼 그려지는 입자의 질감은 필름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했다.
하지만 점차 질감이 아닌 촬영 방식의 차이가 느껴졌다. 유한한 필름은 스마트폰처럼 사진을 찍어낼 수 없었고, 한 번뿐인 셔터는 최고의 각도를 실험할 수 없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숨을 참고 최고의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뷰파인더에서 확신할 수 없다면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결국 필름 카메라에서 중요했던 건 피사체도 장소도 아닌 존재를 담아낼 결정적 순간이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 결정적 순간>은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과 그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을 담아낸 전시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대표작 ‘결정적 순간'은 사진작가의 바이블로 여겨진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약 20년 동안 세계 곳곳을 누비며 영국 조지 6세의 대관식, 간디의 장례식, 중국 국민당의 패배와 공산당의 집권 등 근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을 기록했다.
그의 사진은 저널리즘적 가치와 동시에 미학적인 풍부함을 지녔다. 그는 역사를 관통하는 순간에도 인간을 관찰하며 본질을 담아내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사진보다 삶에 더 관심이 많다”고 말하며 인위적인 연출 대신 대상이 형태적으로 완벽히 정돈되면서도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에만 셔터를 눌렀다.
Coroation of King Greoge VI, Trafalgar Square, London, England, May 12, 1937
본질을 관찰함은 렌즈가 향하는 방향의 문제였다. 위 사진은 1937년 5월 12일에 촬영된 조지 6세의 대관식 사진이다. 보통 성대한 행사에서 카메라의 렌즈는 주인공에게 향하고, 주인공이 아닌 인파는 사진의 배경이 되거나 렌즈 밖으로 지워진다.
하지만 카르티에 브레송의 렌즈는 다른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가려진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같은 곳을 응시하는 사람들과 미처 깨지 못한 한 사람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유머를 불어넣었다. 사진에는 이들의 이름조차도 남겨지지 않았지만, 보편적인 누군가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볼 평범한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Boston, United-States, 1947
“어떻게 주제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있다. 세상만사에는 다 주제가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가 느끼는 것에 솔직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주제는 사실들을 모아 놓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흥미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진짜 사실들을 그 깊이와 함께 포착하는 것 말이다.”
- ‘결정적 순간' 서문에서 발췌, 1952
중요하거나 관심사가 되는 일을 포착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목적이다. 유명인을 기록하고 역사에서 결정적일 순간을 사진으로 남긴다. 하지만 조지 6세의 대관식 사진처럼,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품에는 종종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일상이 기록됐다. 포토 저널리스트였던 그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 자체였다.
그래서였을까,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품에는 현실적인 매력이 담겨있다. 마치 인물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보스턴 커먼 공원의 폭염을 담은 사진에는 무더위에 녹초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다 같이 약속이나 한 듯 잔디에 누워 활력이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아마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람들이 더위에 잔뜩 지친 순간을 결정적 순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직관과 본능이 포착한 장면은 정적인 흑백 이미지에 디지털 영상에서도 느끼기 힘든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 결정적 순간>에는 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텍스트와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결정적 순간'을 완성하기 위해 주고받던 비즈니스 메일과 더불어 사진집에서 발췌한 카르티에 브레송의 미학론을 벽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글은 그의 사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의 사진에서 느낄 수 있는 구도와 형태보다도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의 본질 또한 전시의 큰 깨달음이었다.
전시를 마치고 의문이 남았다. 결정적 순간은 무엇으로 구성되는 것일까. 완벽한 그림을 찾고 연출해야 할까? 아니면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을 기록만 하면 되는가?
필자가 필름 카메라를 일 년 동안 찍으며 깨달은 건 셔터를 누를 때까지의 확신이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는 무차별적인 순간 포착은 필름 카메라와 어울리지 않았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사진을 시간과 돈을 들여 필름에 기록할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셔터에 손가락을 올린 순간만큼은 숨을 참고 확신을 기다렸다. 좋은 풍경을 앞에 두고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면 망설임 없이 다음 장소로 떠났다. 셔터를 누를 때까지 제법 신중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진에는 당시 시간을 관통하던 감정이나 태도가 묻어나왔다.
전시에서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 순간과 직접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렀던 순간을 생각했다. 필자의 결정적 순간은 내면을 뷰파인더에 완전히 담을 수 있었던 때였다. 단순히 구도와 조형의 아름다움을 떠나서, 사진을 찍었던 기분을 오롯이 담아내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걸 전시를 통해 깨달았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디지털 문명에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 결정적 순간>은 우리가 누를 액정 위의 셔터를 조금 더 신중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전시를 보고 사진에 좀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해 고민할 수 있다면, 카르티에 브레송이 전하고자 하는 결정적 순간은 금세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