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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북스 Oct 22. 2019

00. 경찰관이 몰카에 찍히면 생기는 일

<혼자를 지키는 삶>

당장 지우세요, 알았어요?


초겨울의 이른 아침, 천안신창행 지하철 3번 칸에서 나는 혼자였다. 아침 출근, 다음날은 저녁 출근, 그리고 반나절과 온전한 하루를 쉬는 근무 패턴이 익숙해질 즈음이었다. 익숙해진다고 해봤자 빠듯하게 출근 준비를 할 수 있을 시간에 눈을 뜨기가 조금 쉬워졌을 뿐, 출근과 퇴근 사이의 졸음 그리고 퇴근과 출근 사이의 아쉬움은 여전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서툰 탓도 있었겠지만, 
매일같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하루하루 전쟁처럼 느껴졌다. 전선에 나서는 장수가 칼날을 벼리듯 나는 출근할 때마다 검은색 아이라이너로 눈두덩을 시꺼멓게 칠하고 뾰족하게 깎은 눈썹연필로 날 선 눈썹을 그리고서 집을 나섰다. 바야흐로 눈썹 문신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고 나도 지금보다 한참은 더 부지런하던 때였다.

평소 아침에는 대방-신길-영등포역을 지나며 그날의 자장가 리스트를 선곡하고, 신도림부터 관악역까지 여섯 개 역을 지나는 동안 반쯤은 깨고 반쯤은 잠든 상태로 리드미컬한 지하철의 진동을 느끼다가, 안양-명학-금정역 구간에서 뜨는 해를 마주보며 ‘오늘도 무사히!’를 다짐하는 것이 혼자만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 천안신창행 지하철 3번 칸에서 나는 요즘말로 ‘멘탈 붕괴’ 상태였다. 소란스런 휴대전화 알람이 한바탕 지나간 뒤 잠에서 깨고 보니 세수하고 이를 겨우 닦을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뛰거나 걷지 말라는 방송을 귓전으로 흘리며 달려가 마침 문이 닫히기 직전이던 지하철에 간신히 올라탔다.

벌거벗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장 눈썹을 그리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천만다행으로 가방 속을 뒤적이던 다급한 손끝에 눈썹연필이 집혔다. 오른손에는 눈썹연필, 왼손에는 거울을 들자 열차가 역에 멈춰 섰다.

남자 역시 혼자였다. 그는 영등포역에서 3번 칸에 탄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남자는 안으로 들어서서 나와 마주보는 자리로 가 앉았다. 맞은편 왼쪽으로 고작 세 자리 떨어진 곳이었다.

뜻밖의 불청객이었다. 그렇더라도 입을 반쯤 벌리고 인중을 길게 늘여 파운데이션 퍼프를 두드리거나 립스틱을 바르는 게 아니라면 눈썹 그리는 것 정도야 크게 흉하지 않을 테지. 눈썹 그리던 손을 늦추고 거울 너머로 남자를 보자,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그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왼쪽 눈썹을 다 그리고 눈썹연필을 오른쪽 눈썹에 갖다 댄 순간,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휴대전화의 사진 촬영음. 나의 분주하지만 평온한 출근길에서 남자가 ‘금세 잊힐 행인 1’의 배역을 거부하고 악당이 되기를 자처하고 나서는 순간이었다.

그는 어느새 휴대전화를 기울여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상황은 명백했다. 남자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 생각하고 그의 휴대전화 메모리 일부에 나를 저장한 것이다. 나는 양손에 든 것을 무릎에 내리고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는 나를 힐끗 한 번 쳐다보더니 휴대전화 각도를 바로잡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화면을 톡톡 쳤다. 졸음이 싹 달아나고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나는 곁눈질로 남자를 보며 오른쪽 눈썹을 마저 그렸다.

신도림역에 멈춰 선 열차 안으로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남자가 시야에서 가려졌다. 열차 안은 조용했으나 머릿속은 소란스러웠다. 오늘은 출근도 하기 전부터 시작이구나. 내가 이대로 그냥 넘어갈까 보냐. 먼저 싸움을 걸어왔으니 호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지하철이 그토록 굼뜨게 느껴지던 적은 단연코 그날이 처음이었다. 명학역에서 출입문이 닫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앞에 섰다. 그리고 내 눈을 피해 고개를 떨구던 그의 얼굴 앞에 공무원증을 내밀었다.




“아저씨. 아까 제 사진 찍었죠? 그거 어느 부위를 찍었는지에따라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죄’로 처벌될 수 있는 거 알아요? 휴대전화 제 쪽으로 향하고 있는 거 봤고, 사진 촬영음도 들었으니 아니라고 해 봤자예요. 제가 경찰이거든요? 저도 출근길이 바쁘고 아저씨도 창피할 테니까 여기서 확인하자고는 안 할게요. 당장 지우세요.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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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에세이 《혼자를 지키는 삶》 자세히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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