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라보콘

보릿고개, 그 너머에서

by 시애틀 추장

얼굴에 마른버짐이 가득한 소년은,

봄이면 배가 더 고팠다.


꽃 피는 봄이 오면,

꽃보다, 낮이 길어지는 봄이 오면,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꽃은 아름다우나,

소년의 배를 채워주지는 못하였다.



***


아비는 어부였다.

일찍 소년의 곁을 떠났다.

소년은 배가 고픈 날이 더 많아졌다.


벚꽃이 피었다.

소년의 얼굴에는 벚꽃보다 하얀, 마른버짐이 피었다.

영양 부족 때문이었다.


여자애들은 소년을 버짐쟁이라고 놀렸다.

소년은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배고픔에 쫓겨 다녔다.


배고픈 강아지처럼,

허기를 달래기 위해 산과 바다와 들판을 쏘다녔다.



***


중학교를 가야할 나이가 되었지만, 가난이 소년을 막았다.

1년을 기다린 뒤에야 소년은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소풍 가는 날,

친구들은 맛동산과 새우깡을 사 먹었다.

콜라와 환타도 마셨다.


소년은 조용히 어머니가 싸 준 보리밥을 먹었다.

친구가 주는 환타도 한 모금 마셨다.

놀라운 맛이었다.


소년은 들풀처럼 비바람을 견뎌냈다.

메마른 땅에도, 시멘트길 틈에도, 어느 곳에나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까까머리 중학생이면

사춘기를 겪을 나이지만,

그건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


소년에게는 사춘기 대신,

춘궁기가 있을 뿐이었다.


집도 땅도 없는 가난한 어미는

바다에서 조개를 캐고,

농사철에는 남의 논밭에서 품삯 일을 하였다.


어미의 땀과 눈물 덕분에

소년은 난생 처음 수학여행을 갈 수 있었다.


첫 여행지인 관촉사 은진미륵을 보면서,

소년은,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염원하였다.


봄날 부소산에 오르면서,

내 얼굴의 버짐 대신, 벚꽃처럼 환한 생을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


친구들이 매점에서 기념품과 아이스크림을 샀다.

소년도 아껴둔 돈을 꺼냈다.


드디어 부라보콘을 샀다.

어머니에게 드릴 브로치를 샀다.

동생에게 줄 우편엽서와 기념품을 샀다.


설레는 마음으로 소년은 부라보콘을 뜯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행복이었다.


열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매일 라디오에서 듣던 광고다.

친구 집에서 텔레비전에서만 봤던 부라보콘이다.


처음 먹어보는 부라보콘.

빛깔마저 어찌 이리 고울까.


배꽃보다,

백설보다 하얀 부라보콘.



부소산 입구에서 낙화암까지, 소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부라보콘을 먹었다.


행여 녹을까, 없어질까, 애태우면서

아주 천천히, 조금씩, 먹었다.


달보드레하면서도 보드라운 그 맛.

천상의 맛이었다.


삶은 고구마나 옥수수 따위에 비할 게 아니었다.

소년은 감탄하였다.


소년은,

환상의 부라보콘과

금세 사랑에 빠졌다.


소년은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바라보면서 맹세했다.

삼천 궁녀에게는 참으로 미안했지만,

궁녀들의 죽음은 소년에게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소년은 거듭 맹세했다.

고란사에서 반월각을 거쳐 관광버스에 오를 때까지,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나중에 내가 크면 꼭 부자가 되겠다고.

그래서 매일 매일 부라보콘을 사먹겠다고.



***


소년은 자라서 부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매일 부라보콘을 사먹을 정도는 되었다.


벚꽃처럼 피어나던 버짐도 없어졌다.

하지만 소년은 부라보콘을 먹지 않았다.

아니, 먹지 못했다.


어느 날 의사가 말했다.

“혈당과 고지혈증을 관리해야 합니다. 단 거 먹지 마세요.”


이제는 소년이 아닌 그가 말했다.

“아이스크림도 안 되겠죠?”


의사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일별하더니 말했다.


“당연히 안 되죠.”


의사의 말투와 표정은 단호했다.

오래된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부라보콘을 먹지 않는다.

사실은, 먹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라보콘을 사랑한다.


벚꽃이 눈처럼 휘날리는 날이면

그는 부소산 언덕을 오르며 아껴 먹었던

부라보콘을 생각한다.


배꽃처럼 하얀 버짐이 가득했던 소년이

배꽃보다 하얀 부라보콘을 먹으며 부소산을 오르고 있다.




***


이제는 가까이 할 수 없지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던


내 입 안의 유토피아

부라보콘.


열두 시가 되면,

꼭 만나야할 것만 같은,

부라보콘.


사랑하는, 사랑했던

부라보콘.


열두 시가 아니어도

언제라도 꼭 만나고 싶은,


나의 부라보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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