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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17. 2019

베네치아의 정문은 어디인가

토마스 만과 안토니오 비발디

많은 예술가들이 동경한 베네치아, 앞문과 뒷문을 고민해본 사람이 또 있을까?


토마스 만의 중편 소설 <베네치아에서 죽음>은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동명 영화와 말러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 덕분에 어지간한 음악팬이라면 익숙한 것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원작을 읽는 사람이 늘지는 않는다. 두 장르는 결국 시간을 놓고 다투는 라이벌이기 때문이다. 만일 영화 때문에 원작을 읽은 사람이 많다면 영화에 소설과 달리 표현된 부분에 대한 지적이 이토록 없진 않을 것이다.

말러 신드롬의 진앙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에는 토마스 만이 쓰지 않은 부분이 종종 나온다. 자신의 작품을 놓고 주인공과 친구가 언쟁을 하는 장면, 또는 주인공이 사창가를 찾아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는 장면 따위이다. 사실 시작부터 감독은 주인공이 베네치아에 타고 온 배가 ‘에스메랄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곧 자신이 토대로 삼은 작품이 <베네치아에서 죽음> 뿐만 아니라 토마스 만의 또 다른 소설 <파우스트 박사>이기도 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에스메랄다는 나비 이름이자 위고 소설의 주인공이다

친구와 언쟁이나 사창가 장면 모두 <파우스트 박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토마스 만의 주인공이 베네치아에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베네치아가 물의 도시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그러나 본토와 베네치아를 잇는 철도는 19세기인 1846년에 개통되었다. 그렇다면 토마스 만(1875-1955)의 아셴바흐는 왜 배로 베네치아에 간 것인가?


존경받는 작가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는 뮌헨 프린츠레겐텐 거리의 자택을 출발해 트리에스테, 풀라를 거쳐 베네치아 리도에 들어온다. 트리에스테는 베네치아 오른쪽에 있는 항구도시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오스트리아가 지배했던, 곧 독일어권 도시이다. 프로이트도 이곳에서 잠시 공부했고, 제임스 조이스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풀라는 트리에스테에서 곧장 아래에 있는, 현재 크로아티아의 도시이다.

최선을 다했다

지도에서 보듯 아셴바흐는 알프스를 넘어 육로로 오는 일반적인 루트 대신 트리에스테에서 다시 풀라로 이동한 뒤에 (왜냐하면 트리에스테에서는 베네치아까지 육로로 가는 것이 낫기 때문에) 굳이 배를 타고 베네치아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육지로, 곧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에 도착하는 건 이를테면 궁전에 들어갈 때 뒷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지금처럼 배로 물결 높은 바다를 건너와야만 바로 전혀 기대하지 못한 이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복궁은 뒷문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오는 동선이 훨씬 좋다, 이 양반아

과연 ‘최고의 허세 작가’ 다운 찬란한 발상이다. 요즘 유행하는 크로아티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달마치아 해변 끝의 풀라에서 배를 타고 베네치아에 가보는 것도 좋겠다.

크로아티아의 풀라(또는 폴라)의 계곡과 로마 시대 유적. 베네치아까지 배로 반나절이다

궁전의 앞문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만, 피렌체에서 떠난 나는 남들처럼 ‘베네치아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나에게는 또 다른 교과서가 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여정Summertime, 1955>이다. 각기 다른 버전의 <작은 아씨들> 영화에 출연했던 캐서린 햅번(1933년작 조세핀 마치)과 로사노 브라치(1949년작 베어 교수)가 연인으로 등장한다. 토마스 만이 묵었던 베네치아 리도의 드 뱅 호텔이나 괴테가 지냈던 다니엘리 같은 럭셔리 호텔보다는 캐서린 햅번이 택한 아카데미아 근처의 숙소가 실용적이다. 영화에 나오는 ‘판지오네 피오리니’는 요즘으로 치면 게스트하우스나 에어비앤비 같은 곳이나 지금은 어딘지 알 수 없다.

촌스러운 오하이오 아가씨가 후문인 줄도 모르고 흥분했다

베네치아 뒷문의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하면 누구나 수상버스 바포레토나 수상택시 모토스카피를 타고 이동한다. 카 도로, 리알토 다리와 같은 랜드마크를 지나 카날 그란데를 관통하면 거의 끄트머리에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나온다. 여장을 풀고 바로 산마르코 광장으로 달려간다. 비둘기 가득한 이곳이 찬란한 베네치아 문화의 심장이다.


광장에 앉아 아페롤 스프리츠 한잔에 악사들의 연주를 곁들이니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베네치아에서 죽은 타지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리하르트 바그너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일 것이다. 재즈 음악가 유리 케인은 베네치아의 명소에서 그곳의 음향을 그대로 살려 바그너의 선율을 연주했다. 사람들의 오가는 소리에 베네치아의 짠내와 유구한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녹아 흐른다.

카날레토가 그린 산 마르코 광장
산 마르코 광장에서 연주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미몽에서 깨어나자.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런 독일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곳은 비발디의 도시이자 베르디의 도시이다. 광장에서 해변을 따라 두칼레 궁전을 지나면 괴테를 비롯한 숱한 명사가 묵었던 다니엘리 호텔이 나오고, 그 옆에 성모 마리아 방문 교회가 반긴다. 비발디가 소녀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자신의 악기 삼았던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Ospedale della Pietà)가 있던 곳이다.

성모 마리아 방문 교회

베네치아에는 16세기부터 오스페달레라고 부르는 구호기관이 있었다. 병자나 빈민, 고아를 돌보는 이들 기관에는 여성으로 구성된 합창과 악단이 운영되었다. 종교 음악을 연주할 목적으로 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던 사람 가운데 붉은 머리의 사제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가 있었다.

영상 가운데 교회 내부가 보인다

비발디가 베네치아의 소녀들을 위해 작곡한 협주곡은 로마에서 활동한 아르칸젤로 코렐리(1653-1713)의 협주곡과 더불어 바로크 기악의 전형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악장의 수이다. 비발디 모델은 빠르고-느리고-빠른 세 악장 구성이고, 코렐리 양식은 그보다 많은 넷에서 여섯 악장으로 이뤄졌다.


비발디의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 1711>, <화려함La stravaganza, 1713>, <화성의 창의의 대결Il cimento dell'armonia e dell'inventione, 1725>와 같은 협주곡집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모델이 되었다. 비발디의 악보는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었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국제도시 베네치아에 주재한 각국 대사는 물론이고, 베네치아나 인근을 찾았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작센 선제후의 왕자가 그의 재주를 높이 사 자기 밑에서 일하기를 권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음악

심지어 바흐는 비발디의 협주곡을 다른 솔로 악기를 위해 편곡하기도 했다. 넉 대의 건반을 위한 협주곡이 대표적이다.

지휘를 겸하기 위해 굳이 보면대를 치운 듯하다

반면 코렐리의 <합주 협주곡Concerti grossi, Op. 6, 1714>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이어받았다.

도대체 이 스페인 시골 악단은 돈이 어디서 난 거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과 경쟁하는 헨델의 합주 협주곡. 독일과 영국으로 넘어간 비발디와 코렐리의 대리전이다
한 악장 더 들어야만 쓰겠다
성모 마리아 방문 교회의 내부.
천장은 베네치아 화가 티에폴로가 그린 <권력과 평화>와 <진실의 승리>

그러나 비발디가 실제로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어쩌면 로마에서 이탈리아 음악의 모든 것을 배워온 젊은 헨델이 1709년 베네치아에서 초연한 <아그리피나>가 비발디를 자극했을 것이다.

폴란드 카운터테너 야쿠프 요제프 오를린스키의 녹음

비발디는 <빌라의 오토네>를 시작으로 만년까지 무려 50편 가까운 오페라를 작곡했고, 그 가운데 스무 편 가량이 20세기 이후 발굴되어 전한다. 대표적인 것은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대본에 붙인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furioso>, 카를로 골도니 원작의 <그리셀다Griselda> 등이다.

한 분이 이 많은 무협 소설을 번역하셨다

아리오스토(1474-1533)는 <해방된 예루살렘>을 쓴 토르콰토 타소(1544-1595)와 더불어 르네상스 후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중세 궁정의 기사 문학을 이어받아 십자군 원정이라는 시대적 소명과 결합한 결과가 이들의 업적이다. 바로크 오페라의 대표작인 헨델의 <리날도>가 타소에, 역시 그의 <오를란도>, <아리오단테>, <알치나>가 아리오스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얽히고설킨 사랑과 마법사의 질투에 의한 복수 또는 화해가 얼버무려진 전근대적인 내용이지만 비발디의 영혼을 홀리는 음악은 주인공들을 근대로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니 듣는 사람을 그의 작품이 초연되었던 베네치아의 테아트로 산탄젤로로 안내한다.

이런 곡이 50개가 있으니 낭비인가, 횡재인가? 다 듣지도 못할 것을! 심지어 헨델까지...

<광란의 오를란도>가 중세 기사 롤랑의 이야기 가운데 가져온 오페라 세리아(Serious Opera)라면, 후기의 <그리셀다La Griselda, 1735>는 골도니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가운데 유명한 에피소드를 옮긴 희가극(Opera Buffa)이었다. 그리셀다는 너무나 유명해서 이미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나 보논치니 형제가 오페라로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태생의 골도니는 희극으로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재능을 보였다. 그의 <여관 여주인La locandiera>은 골도니의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 셰익스피어의 대표적인 희극)이라 불리며, <달세계Il mondo della luna>와 <약제사Lo speziale>는 하이든이, <가짜 바보 아가씨La finta semplice>는 모차르트가 오페라로 만들 정도로 인기였다.


비발디와 골도니가 선택한 <그리셀다>의 소재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의 마지막 열흘 째 열 번째 이야기에서 가져왔다. ‘인내심 많은 그리셀다’는 북이탈리아 살루초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인데, 오페라의 배경은 그리스로 옮겨진다.

테살리아의 왕 괄티에로는 가난한 양치기 그리셀다와 결혼했다. 주변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결혼인 탓에 왕은 딸 코스탄차가 태어나자 사산한 것으로 속이고 친구인 아테네의 코라도 공에게 딸을 의탁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아들을 낳게 되었을 때는 신하들의 강렬한 반발을 산다. 왕비를 폐하고 새장가를 들라는 것이다. 그들이 추천한 왕비는 아테네의 코스탄차였다. 코스탄차가 괄티에로와 그리셀다의 딸이라는 사실은 그리셀다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코스탄차는 사실 코라도의 동생 로베르토와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이웃나라 왕과 정략결혼해야 하는 현실을 한탄한다. 이때 부르는 노래 ‘두 개의 바람이 부추기니Agitata da due venti’가 이 오페라를 대표한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묘기라고 할 밖에

두 개의 바람이 부추기니

바다가 동요하고 파도가 일렁이네

당황한 조타수는

침몰을 예견한다


도리이냐 사랑이냐

마음이 괴롭다

거부할 수 없고 포기하려니

절망의 시작이구나

계속해서 궁을 떠나 시골집으로 돌아간 그리셀다를 오토네가 따라왔다. 사실 괄티에로의 신하인 오토네는 그리셀다에게 반한 나머지 그녀가 내쳐지도록 뒤에서 선동한 인물이다. 그리셀다는 오토네를 멀리한다. 사냥을 하던 괄티에로 일행은 그리셀다의 집을 지나치다가 오토네가 그녀를 납치하려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다시 궁전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녀는 코스탄차의 시녀가 되어야 한다.

오토네가 여전히 그리셀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왕은 코스탄차와 결혼하면 그리셀다를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셀다는 그리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반항한다. 그러자 괄티에로가 그녀를 끌어안고 반대자들 앞에서 그녀의 덕을 칭송하며 왕비로 되돌려 놓는다. 괄티에로와 코라도는 코스탄차가 그리셀다의 딸임을 밝히고 로베르토와 맺어준다.

오늘날 비발디의 오페라는 마치 막 작곡된 것처럼 새롭게 연주되고 있다. 그러나 비발디는 늘 제작비에 쪼들렸다.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거의 가내수공업과 같이 온 식구가 매달렸고, 후원자와 극장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베네치아 주교는 사제인 그의 과도한 음악 활동에 불만이었고, 심지어 그와 여학생 사이에 불미스러운 스캔들을 거짓 유포하기도 했다.


실제로 비발디와 그의 프리마돈나였던 안나 지로(Anna Girò)는 음악적인 동료 이상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비발디는 그녀가 부르기 쉽게 <그리셀다>의 대본을 고치도록 골도니에게 끊임없이 주문했다.

베네치아의 골도니 극장 앞에 있는 그의 동상

만년까지 재정난에 허덕이던 비발디는 결국 그를 높이 샀던 황제 카를 6세의 궁정 음악가가 되기 위해 베네치아를 떠난다. 그라츠에서 활동하던 애제자 안나 지로와 동행한 그는 빈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온 직후에 황제가 세상을 떠나면서 비발디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그는 1741년 빈에서 사망한다.

빈 황실 도서관에 있는 카를 6세의 석상.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버지이다.

성 슈테판 성당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아홉 살의 하이든이 빈 소년 합창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타지에서 온 가난한 음악가를 위해 음악을 연주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 뒤 그가 살던 집 바로 앞에 빈 국립 오페라가 들어섰다. 그의 하숙집 자리는 현재 빈에서 가장 비싼 럭셔리 호텔이자 모두가 달디 단 초콜릿 케이크를 먹기 위해 줄을 서는 자허 호텔이 들어섰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자허 토르테 줄은 없다
빈 공대가 자허 호텔에 기부한 비발디 현판
비발디가 묻힌 카를스 교회(현 빈 공대 구역) 옆에 그를 기리는 벽화가 있다. 붉은 장미를 든 젊은이...

비발디가 떠난 베네치아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 흥미롭다. 역시 베네치아 태생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1720-1806)는 대선배 골도니를 비판하며 전통극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기법과 동화를 결합한 새로운 연극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세 개의 오렌지 사랑L'amore delle tre melarance, 1761>과 <투란도트Turandot, 1762>이다.


1761년 베네치아 산 사무엘레 극장에서 초연된 연극 <세 개의 오렌지 사랑>은 1921년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가 오페라로 만들면서 더욱 유명해진다. 사랑을 찾아 떠난 왕자의 좌충우돌을 그린 행진곡은 작곡자 자신이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한 이래, 첼로와 바이올린까지 많은 음악가들의 단골 앙코르로 거듭났다.

놀라운 상상력

비록 베네치아의 ‘뒷문’으로 들어왔으나, 리알토 다리 위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떠올렸으니 첫날의 수확으로 나쁘지 않다.

풍경은 여수 밤바다나 다를 바 없지만 여기는 베네치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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