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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l 11. 2019

베네치아에서 죽음

정문에서 본 베네치아

결국 리도의 해변은 어디에나 있다


서양에서 리도(Lido)는 해수욕, 해변 리조트의 대명사이다. 바로 베네치아의 앞바다에 길게 드리운 사주(砂洲)의 이름이 그대로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1107-1205)는 도항비를 내지 못하는 십자군 함대를 리도에 정박시켰다. 천혜의 백사장에 진을 친 십자군은 뒷날 이곳에 모두가 동경하는 리조트가 들어설 줄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네모 안의 네모가 네모이다

무솔리니 시대인 1937년, 제5회를 맞는 베네치아 영화제가 리도로 장소를 옮겨 개최된 이래, 해마다 8월 말이면 이곳은 영화인의 축제장이 된다. 프랑스 리비에라의 칸 영화제가 이를 모델로 출범한 것이 1946년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리도의 휴양 문화를 동경해 파리에 개장한 카바레 또한 리도(Le Lido)라 이름 지었고, 이곳의 버라이어티쇼는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이식되었다.

앞서 보듯 토마스 만 소설 <베네치아에서 죽음Der Tod in Venedig>의 주인공 아셴바흐는 육지에서 본섬으로 가는 것을 마다하고, 먼 바다에서 리도를 ‘베네치아의 현관’이라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허세의 대가는 컸다. 리도에는 큰 배가 정박할 수 없기 때문에 산마르코 광장에서 내린 그는 다시 곤돌라에 옮겨 타야 했다. 곤돌라 사공은 리도로 가는 길에 내내 등 뒤에서 알 수 없는 혼잣말로 승객을 불안하게 했다. 적잖은 거리에 바다 한가운데에서 홀로 남에게 목숨을 내맡긴 셈이니 차라리 베네치아의 뒷문이 더 낫지 않았을까? 리도에 도착한 뒤 무면허였던 사공이 단속을 피해 달아나는 바람에 뱃삯을 아꼈더라도 말이다.

영화 속 리도에서 본 베네치아 본섬. 위 표지와 같은 전경이다

1911년 토마스 만이 묵었던, 그래서 소설과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은 그랜드 호텔 드 뱅(Grand Hotel des Bains)이다. 이곳은 복합 리조트로 재단장하기 위해 2010년부터 현재까지 문을 닫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들어갈 수 없는 호텔 밖에서 한 관광객이 서성인다. 바로 나이다. 한산한 호텔 앞 도로를 건너 십자군 원정 이래 천막이 들어찬 백사장 너머로 아드리아 해를 바라본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나오는 카이로 셰퍼드 호텔도 여기서 촬영했다

<베네치아에서 죽음>은 언뜻 보기에 단순한 내용이다. 인생의 황혼을 맞은 작가가 베네치아로 여행을 왔다가 폴란드 일가족의 한 소년에게 알 수 없이 그리고 속절없이 끌린다. 베네치아에 콜레라가 창궐해 아는 사람은 급히 탈출하지만, 작가만은 소년 곁에 머무르기 위해 남는다. 결국 그는 황금빛 해변에서 소년이 노니는 모습을 보며 숨을 거둔다.


1971년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만든 감각적인 영상은 ‘예술을 위한 예술’의 아이콘이 되었다. 영화 개봉 직후 같은 소설을 가지고 오페라를 쓰던 영국의 벤저민 브리튼은 의도적으로 비스콘티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 폴란드 가족이 노래하지 않고 춤만 추는 무용수들인 것이 영화와 오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브리튼의 장면들은 토마스 만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마치 동시대 영국 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1874-1965)의 냉소적인 현대세계와 같은 느낌을 준다. 

디오니소스가 바라보는 가운데 우글거리는 니진스키들

브리튼의 오페라는 제아무리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상연되어도, 그것이 리도나 산마르코 광장이라기보다는 영국 서퍽(Suffolk) 지방의 어촌 올드버러(Aldeburgh)를 배경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바로 브리튼의 첫 작품 <피터 그라임스Peter Grimes>의 무대이자 오늘날 그의 음악제가 열리는 곳이다.

올드버러의 브리튼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브리튼의 고향 서퍽은 북해에 면한 외딴 해변이다. 올드버러는 올드 강(River Alde) 하구에 있다. 지도를 보면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곳이 베네치아와 비슷한 지리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도시 베네치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외딴곳이지만 말이다. 올드버러에서 강 안쪽의 스네이프(Snape)를 거쳐 다시 오퍼드 네스 국립 자연보호구역(Orford Ness National Nature Reserve)에 이르는 지역이 바로 브리튼이 창설한 올드버러 음악제의 무대이다.

지도를 보면 습지인 오퍼드 네스 국립 자연보호구역이 베네치아의 리도에 해당하는 일종의 사주(砂洲)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보다 좀 안쪽 스네이프의 몰팅스(Snape Maltings)는 버려진 맥주 양조장이던 것을 공연장으로 개조했다. 브리튼이 올드버러의 주빌리 홀을 대신할 새 공연장을 찾던 중 발견한 곳이다.

갈대밭 뒤의 창고 같은 건물이 스네이프 몰팅스이다.

브리튼의 오페라 <베니스에서 죽음Death in Venice> 가운데 드 뱅 호텔 마당에서 공연하는 촌뜨기 광대들은, 역시 셰익스피어를 각색한 그의 오페라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과 닿아 있다. 테세우스 왕과 히폴리타 왕비의 결혼식을 위해 촌부들이 마련한 연극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퓌라무스와 티스베’이다. <한여름 밤의 꿈> 또한 올드버러를 위한 작품이었다.

미캐닉들의 칠푼이 같은 공연

1981년 토니 파머가 브리튼의 오페라를 영상에 담았다. 해변은 베네치아가 아닌 서퍽을 떠올리게 한다. 오퍼드 네스 습지에서 찍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사운드트랙 녹음

존 노이마이어와 함부르크 발레단의 2014년 시도는 훨씬 참신했다. 노이마이어는 비스콘티가 소설가에서 작곡가로 바꾼 주인공을 이번에는 안무가로 설정한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비스콘티가 눈 시린 영상을 통해 구스타프 말러라는 미지의 작곡가를 부활시켰다면, 노이마이어는 바흐와 바그너라는 불멸의 이름을 춤의 전면에 배치한다.

노이마이어의 시도 가운데 드물게 맘에 든다

무용극 <베네치아의 죽음>에서 아셴바흐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내린 주제를 춤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제공하는 관능의 선율에 미혹되고, 바흐의 <음악의 헌정>으로 다시금 각성하기를 반복한다. 토마스 만이 소설에서 대비시킨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구도를 예리하게 파고든 것이다.

호텔에서 해변으로 가는 통로, 경포대나 해운대에도 있지만...
망중한을 즐기는 큐피드, 뒤를 따르는 이가 비너스는 아니다

독일 작가와 폴란드 소년의 만남 이야기에 이탈리아 영화감독이 세기말 빈의 음악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영국 작곡가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제시했고, 함부르크의 미국 안무가가 그 못지않게 독창적인 자기 목소리를 냈다. 국경을 허무는 작업이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이방인이다. 모두가 ‘돌파구’를 찾아온 사람들이다. 존재를 업그레이드하는 마당에 언어의 장벽 따위는 무의미하다.


나는 테렌스 멜릭(Terrence Malick)의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The Tree of Life, 2011>의 마지막 해변 장면이 토마스 만에서 존 노이마이어에 이르는 <베네치아에서 죽음> 연작의 완결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시공의 압축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공존하며 화해한다. 그는 해변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맞는 것이 아니라 초월의 생명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이때 흐르는 음악은 말러나 브리튼이 아니라 베를리오즈의 <레퀴엠, 죽은 이를 위한 미사> 가운데 ‘신의 어린양 Agnus Dei’이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감독은 중년 주인공이 해변에서 자기보다 어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죽은 동생, 나아가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한다. 초현실의 백사장에서 주인공이 정신을 차렸을 때 다시금 마천루 한가운데에 있다. ‘시간이 곧 공간’인 곳에서 그는 돌파구를 찾는 것이 곧 돌파구임을 확인한다. 파우스트는 돈키호테일 수밖에 없다. 리도, 안녕!

여기가 어디인가?


베네치아에서 죽으면 어디로 갈까? 바그너가 베네치아에서 죽었지만, 유해는 독일로 보내졌다. 베네치아가 낳은 비발디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본섬 북쪽 선착장에서 유리 공예로 유명한 무라노로 가는 배를 타면 그 사이에 네모로 생긴 섬(아 네모네)을 지난다. 산미켈레(Isola di San Michele)는 땅이 부족한 베네치아가 조성한 인공 묘역이다.

저 건너 보이는 것이 산 미켈레이다

담장을 두른 섬을 빽빽하게 채운 나무는 다시금 아르놀트 뵈클린의 연작 <죽은 자들의 섬>을 떠오르게 한다. 실제로 뵈클린이 모델로 한 곳은 피렌체의 영국인 묘역이지만 그보다는 배로 들어가야 하는 이곳이 더 비슷하다.

이 그림으로 이 음악을 소개한 유튜브가 차고 넘치지만 곡은 유명해지지 않는다
스트라빈스키는 Strawinsky 또는 Stravinsky 아니면 Стравинский이다

입구에는 이곳에 묻힌 가장 유명한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영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 발레 마스터 세르게이 댜길레프, 그리고 그의 작곡가였던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이다. 덧댄 표식에는 노벨 문학상을 탄 소련 시인 조세프 브로드스키(1940–1996)의 이름도 보인다. 브로드스키는 동유럽에 아주 흔한 유대인 성이다. 음악가로는 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브로드스키(1851-1929)가 자신의 이름을 딴 현악 사중주단을 이끌어 유명했고, 20세기에도 야샤 브로드스키라는 교수가 힐러리 한, 레일라 조세포비츠, 줄리엣 강, 장중진과 같은 제자를 길러냈다.

묘비에 수북하게 토슈즈가 쌓여 있다

그러나 내 관심사는 역시 댜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이다. 졸저의 마지막 단락을 옮긴다.

1971년 4월 6일 화요일 이른 아침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묻힌 곳은 뉴욕이나 다른 미국 어느 도시도, 또는 첫 아내가 묻힌 프랑스의 성 주느비에브 데 부아도, 아버지와 동생 구리가 잠든 레닌그라드의 알렉산데르 넵스키 묘지도 아니었다. 미망인 베라와 제자 크래프트는 그를 로스앤젤레스에 묻고 싶지 않았다. 뉴욕은 그들에게 호텔에 불과했다. 결국 이들이 택한 곳은 댜길레프의 묘가 있는 베네치아였다. 스트라빈스키는 평생 이 도시를 매우 좋아했고, 여기서 그의 작품이 다섯 곡이나 초연되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자녀들은 뉴욕에서 따로 장례식을 가졌다.

베네치아의 장례식은 4월 15일에 열렸다. 3천 명의 추모객과 취재 인파가 몰려들었다.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레퀴엠>에 이어 베네치아 시장의 추도사가 있었고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의 오르간 작품이 연주되었다. 크래프트는 고인의 <레퀴엠 칸티클스>를 지휘했다. 곤돌라에 실린 관은 반 마일을 흘러가 산 미켈레 섬에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댜길레프의 곁으로 돌아갔다.
1982년 아내 베라도 곁에 묻었다. 2015년 로버트 크래프트도 이곳으로 왔다

스트라빈스키와 베네치아에 대한 이야기는 본섬으로 돌아가 마자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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