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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06. 2019

공화국과 제국의 해묵은 대결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

베네치아는 늘 거대 제국에 맞선 용감한 공화국이었다


베네치아의 첫 날을 비발디부터 마지막을 장식한 스트라빈스키까지 되짚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베네치아 음악의 전성기는 비발디보다 한 세기 전에 찾아왔다.

12세기에 완성된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은 17세기에 마침내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의 중심인물인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를 악장으로 맞는다. 몬테베르디가 오기 전에 베네치아의 음악 환경은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과 같았다.


1527년 플랑드르(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으로 당대에 가장 앞선 음악을 작곡했다) 출신인 아드리안 빌라르트(1480?-1562)는 베네치아에 다성음악을 가져왔다. 

조슈아 리프킨이 지휘하는 보스턴 카메라타의 빌레르트 모테트 집

다음 세기까지 차례로 이 성당에서 오르간을 담당한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와 그의 조카 조반니는 교회에 기악을 안착시키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기악은 ‘악마의 소리’라는 오명을 벗긴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멀티채널 서라운드 음향을 공간에 구현했다. 합창과 악단은 교회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여러 방향에서 그 건물의 아름다움에 상응하는 찬양을 뿜어냈다.

조반니 가브리엘리의 열네 성부를 위한 마니피카트

베네치아 인근 만토바에서 태어난 몬테베르디는 마흔여섯 살 되던 1613년에 베네치아에 왔다. 전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자식을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기 위해서였다. 한 세기 뒤 중부 독일 쾨텐의 궁정 악장이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라이프치히로 옮긴 것과 똑같은 이유이다

몬테베르디는 베네치아와 로마의 악장 자리에 지원하기 위해 1610년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라는 음악을 각각 포트폴리오로 제출했다. 로마는 몬테베르디를 거부했지만, 베네치아가 그를 맞음으로써 향후 이탈리아의 음악을 주도한다. 합창석에서 회랑(回廊)을 거쳐 제단(祭壇)과 궁륭(穹窿)까지 다층 다면에서 울려 퍼지는 교회음악은 단순히 건축뿐만 아니라 교리에 화답하는 신앙의 이상과도 같았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몬테베르디에게 최적화된 공간이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존 엘리엇 가드너와 그의 악단이 산 마르코 광장에서 재현한 <성모 마리아의 저녁 기도>, 장관이랄밖에!

시편과 모테트를 번갈아 가며 노래하는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는 말미에 찬가 ‘바다의 별이신 성모Ave maris stella’와 ‘마니피카트Magnificat’로 대단원을 이룬다.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시작해 르네상스 시대를 지난 이탈리아 음악이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 순간이라 할 만하다.

성당 2층으로 올라 외부 난간으로 나가면 산마르코 광장의 현관인 두 기둥이 보인다. 오른쪽 비잔틴의 성 테오도르 기사는 9세기 마르코 성인이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 되기 이전 모시던 인물이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발견된 마르코 성인의 유해를 베네치아로 빼돌렸다. 이때 회교도가 혐오하는 돼지고기를 실은 수레에 유해를 감춰 무사히 옮겼다. 그 뒤로 마르코 성인을 상징하는, 왼편의 날개 달린 사자가 베네치아를 지키게 된다.

날개 달린 사자상과 성 테오도르 기사상

뒤를 돌아보면 성당 정면을 네 마리 말이 장식한다.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비잔틴에서 약탈해온 것이다. ‘콰드리가Quadriga’라 부르는 이 조각은 기원전 4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주조했다.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이 차례로 소유하다가,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을 때,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뒷날 나폴레옹이 이것을 파리로 옮겼다가 뒷날 베네치아로 돌아온다.

뒤편으로 시계 종탑이 보인다.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콰드리가의 진품

도시국가 연합인 고대 그리스는 민주주의의 발상지였다. 그 뒤를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이 계승했지만, 베네치아는 원로원에서 ‘도제Doge’를 선출하는 공화국이었다. 인류사는 이렇게 ‘공화국Republic’과 ‘제국Empire’의 끝없는 대결구도로 전개되었다. 고대 그리스는 페르시아 제국과 맞섰고, 헤로도토스는 이를 증언하기 위해 <역사>를 썼다.


로마는 스스로 공화정과 제국의 시대를 오고 간다. 전성기를 통치했던 다섯 사람의 현명한 황제는 아들이 아닌 양자에게 제위를 물려줬다. 요순시대나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그린 철인 통치에 가까운 치세였다.


작지만 큰 공화국 베네치아는 차례로 비잔틴과 오스만 튀르크, 그리고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대했다. 부침은 있었지만 절대권력에 대항해 민주주의의 보루 역할을 해왔다. 

인형극으로 세계사를 조망한 본인

그러나 공화정이거나 제국이거나 정의로움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오늘날 자칭 공화국인 북한은 나홀로 제국이고, 공화국의 맏형 미국 또한 제국 행세를 하지 않나. 베네치아도 그랬다. 베네치아의 눈먼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제4차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애초에 십자군이라는 명분이 변질된 동방 정벌도 모자라, 같은 기독교 국가를 친 격이니 정의로움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베네치아가 자랑하는 날개 달린 사자도, 제국과 공화국 양쪽의 전리품으로 오고 간 네 마리 말도 그들에게 바른 뜻을 일깨우진 못했나 보다. 산 마르코 대성당에 울리는 몬테베르디의 압도적인 음악도 그런 면으로는 공허하게 들린다.

호화 캐스팅의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 아름다운 공허함!

몬테베르디가 십자군 원정을 소재로 쓴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Il combattimento di Tancredi e Clorinda>은 20분가량 되는 단막 오페라이다.

클로린다는 미모와 무용을 겸비한 회교도로 내심 십자군의 용장인 탄크레디를 사랑한다. 두 사람은 세 번 싸워 모두 클로린다가 졌지만 그녀는 매번 재치 있게 도망친다. 마지막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클로린다는 죽기 전에 세례를 받기를 청하고 탄크레디는 투구를 벗은 그녀가 사랑하는 애인임을 알고 가슴 아파한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탄크레디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다.

서양사가 공화국과 제국의 대결이었다면, 서양 음악사는 오페라와 교향악의 대결이라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클래식이라면 그게 그것일지 모르지만, 오페라와 교향곡은 엄연히 탄생 배경이 다르다. 오페라는 이탈리아 것이다. 다른 나라 오페라를 모두 합쳐도 이탈리아산(産)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교향곡도 본디 오페라 서곡으로 시작했지만, 독립 장르로 발전한 곳은 독일이다. 교향곡은 관념론이다. 눈앞에서 오페라로 보여줄 여건이 되지 못하는 후발주자 독일이 머릿속으로나마 가장 높이 올라가고자 한 것이다. 베토벤이 완성했고, 슈만, 브람스와 같은 후배가 확고한 전형을 세웠다. 때문에 독일이 아닌 프랑스나 러시아 교향곡이라고 하면 일본이나 중국 김치와 비슷한 것이다.

<교향곡의 탄생, 헨델에서 하이든까지>: 음반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탈리아에는 사실상 교향곡이 전무하다. 오페라를 두고 굳이 교향악이라는 뜬구름 잡을 필요가 없었다. 베토벤의 이후로 음악사의 패권은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오페라에서 교향곡으로 균형추가 이동했다. 이제 오페라 팬이냐 교향악 팬이냐로 양분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근세에 정치적으로 가장 앞선 베네치아가 음악의 겉모습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면,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후진적이었던 독일이 역설적으로 교향악을 통해 그 내용을 완성한 것이다. 궁해야 통한다. 교향곡이야말로 인간의 발가벗은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일깨움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에네아스에게 디도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라고 했던 목소리가 똑같이 베토벤에게 정신의 ‘유토피아’를 주문했다.

피에르 그리말과 불협화음Les Dissonances의 교향악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그리말이 창단한 ‘레 디소낭스Les Dissonances’는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이다. 실내악단이 편성이 작은 곡을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레 디소난스의 레퍼토리를 보면 입이 벌어진다. 베토벤, 심지어 브루크너의 교향곡, 드뷔시의 <바다>와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버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까지, 지휘자가 있어도 쉽지 않은 곡이다.

어쩌면 버르토크가 원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이런 것이었으리라, 지휘자가 낄 자리가 없는!

단원 개개인이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가졌는지, 또 얼마나 많은 리허설을 했는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상대방의 소리를 듣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상상해 보라. 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공화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제국의 국민도 상대방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세는 필수이다. 그것을  ‘톨레랑스’라고 한다. ‘불협화음’이라는 뜻의 오케스트라 이름은 조크이다. 지휘의 ‘황제’ 따위는 필요 없는 완전 ‘공화제’ 오케스트라인 것이다. 만일 이 실험이 성공이라면 많은 황제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황제가 너무 많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나온 산 마르코 바실리카를 뒤돌아본다. 들어갈 때보다 줄이 훨씬 길어졌다. 여러분은 아는가, 공화국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악의 참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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