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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15. 2019

베키오 다리에선 첼리니를 생각하라

잔니 스키키와 피렌체 비극

푸치니, 쳄린스키와 더불어 피렌체를 떠나며...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났던 아르노 강가에서 푸치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잔니 스키키> 가운데 나오는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이다. 누구나 아는 곡이지만, 대강 어떤 부분에서 나오는지 알면 더 좋겠다. 주인공 잔니 스키키는 유언장을 위조한 죄로 단테와 지옥에서 만나는 인물이다.

우디 앨런이 연출한 <잔니 스키키> 가운데

오페라에서 잔니 스키키는 고인이 수도원에 기부한 유산이 유족에게 돌아가도록 유언장을 위조한다. 고인의 조카 리누치오와 스키키의 딸 라우레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 당연히 젊은 연인에게도 몫이 돌아가지만, 상당 부분은 뒷날을 위해 신탁된다. 스키키가 고인의 집과 방앗간, 당나귀를 자신에게 남긴 것으로 했기 때문이다. 위조 모의가 탄로 나면 손목이 잘려 추방당할 것이라는 으름장 탓에 모두가 입을 잠근다.


<잔니 스키키>는 단테가 신곡에서 짧게 언급한 내용을 푸치니가 늘이고 늘렸지만 1시간이 채 못 되는 단막 오페라이다. <외투>, <수녀 안젤리카>라는 작품과 짝을 이룬 삼부작이지만 셋 가운데 인기는 월등하다. 앞서 본 ‘피렌체는 꽃피는 나무처럼’도 좋지만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푸치니를 대표하는 곡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 사랑하는 아버지
그이를 좋아해요, 멋지고 잘생긴 사람이에요
포르타 로사로 갈 거예요
반지를 사러요
네, 네 거기 갈 거예요
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베키오 다리로 가겠어요
그리고 아르노 강으로 뛰어내릴래요
아프고 괴로워요
아 하느님, 죽고 싶어요
아버지, 가여워해 주세요
아버지, 가여워해 주세요

라우레타가 반지를 사러 가겠다는 ‘빨간 대문Porta Rossa’ 보석상점은 지금은 호텔 체인점으로 바뀌었지만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아르노 강물과 베키오 다리는 한결같다. 오페라의 마지막에 사랑을 얻은 두 연인은 아름다운 피에솔레 언덕을 바라보며 피렌체를 ‘천국Paradiso’이라 칭한다. 잔니 스키키가 웃음 지으며 관객들에게 말한다. 이 속임수 덕분에 자신이 ‘지옥Inferno’에 갔지만 위대한 아버지 단테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으니 양해바란다고.


짧은 <잔니 스키키>와 잘 어울리는 짝이 있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 1871-1942)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희곡에 붙인 단막 오페라 <피렌체 비극Eine florentinische Tragödie>이다. 쳄린스키의 곡도 똑같이 와일드가 원작인 <난쟁이Der Zwerg>와 한쌍이지만, 그보다는 완전히 다른 색깔이면서 같은 배경인 <잔니 스키키>가 서로 잘 어울린다.

<피렌체 비극>과 <잔니 스키키>를 한 무대에 올린 네덜란드 국립 오페라

와일드와 쳄린스키의 배경은 16세기 피렌체이다.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 첼리니, 바사리의 시대인 것이다. 피렌체 밖으로 넓히면 다 빈치, 라파엘로, 팔레스트리나와 그들의 교향이 전부 이 시대 사람들이다. <피렌체 비극>의 주인공은 그런 예술가나 위정자가 아니다. 상인 시모네와 그의 아내 비앙카 그리고 귀도 공작이 전부이다.

타지에 다녀온 시모네는 자기 집에서 귀도 바르디 공이 아내 비앙카와 함께 있는 것을 본다. 시모네는 공작에게 예복을 비롯해 집안의 귀한 물건들을 팔려고 내놓는다. 공작은 비앙카의 값을 묻는다. 시모네는 농담 말라며 자기 아내는 귀한 분께 합당치 않다고 말한다. 그는 아내에게 한 바퀴 돌아보라고 하지만, 그녀는 싫다고 한다. 시모네가 나간 사이 그녀는 남편을 증오하며 그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을 엿들은 시모네는 외도와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공작과 비앙카를 두고 나가자, 두 연인은 사랑을 속삭인다. 공작이 돌아가려고 할 때 시모네가 결투를 청한다. 비앙카는 “죽여요, 죽여요”라고 외친다. 처음에는 검으로, 그다음에는 단도로 싸우다가 마침내 시모네가 공작의 목을 졸라 죽인다.


비앙카가 달려와 남편에게 말한다. “왜 그렇게 힘이 세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어요?” 시모네가 답한다. “이렇게 아름다운지 왜 얘기하지 않았지?” 둘은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왜 그렇게 힘이 세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어요?” - “이렇게 아름다운지 왜 얘기하지 않았지?”

너무나 오스카 와일드다운 반전과 냉소가 아닌가! 쳄린스키의 도시 세기말 빈에서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같은 작가가 보여주었을 법한 모습이기도 하다. 와일드가 존 러스킨의 수업에서 피렌체의 예술에 대해 쌓은 식견도 읽을 수 있다. 시모네가 귀도에게 값진 물건들을 내놓을 때 하는 말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첼리니도 위대한 메디치를 위해 이런 브로치를 만들지는 못했지요.”
피렌체에 있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본점
첼리니와 경쟁하는 고급 사치품들
고급 시계상이 마치 샌드위치 가계 같다 

첼리니도 못 만든 것을 만들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시모네가 귀도에게 결투를 청하는 말 또한 비유로 가득 차 있다.

“오, 멋진 검이군요. 페라라 기질과 뱀 같은 유연함,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치명적이겠죠. 이런 쇠라면 두려울 것이 없겠습니다. 이런 예리한 날은 처음 만져봅니다. 저도 검이 하나 있죠. 지금은 좀 녹이 슬었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얌전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오래전 파도바에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던 생각이 나네요. 저에게 짐말을 빼앗으려 했죠. 저는 목을 베어버리고 떠났죠. 불명예나 모욕, 부끄러움, 조롱, 경멸은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것을 훔치려는 사람은, 그것이 보잘것없는 음식이 담긴 그릇일지라도, 자신의 몸과 영혼에 위협을 느낄 것입니다.”
"오, 멋진 검이군요... 이런 예리한 날은 처음 만져봅니다": 그럼 누가 만들었는데...

푸치니의 <잔니 스키키>나 쳄린스키의 <피렌체 비극>는 수백 년 전 피렌체의 이야기임에도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룬다. 그것이 <아이다>나 <투란도트>, <나비부인> 같은 ‘오리엔탈리즘’, 곧 서양의 정신적인 동양 침탈 혐의를 받는 작품들과 다른 점이다. 이런 작품들은 무대만 동양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사뭇 현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베키오 궁전, 바르젤로 궁전, 두오모 박물관에 대해서도 들을 음악이 많지만 베네치아가 기다리기에 이번 피렌체 이야기는 이쯤으로 마친다. 로마가 기다린다고 세 시간 만에 피렌체를 떠난 괴테를 떠올리면, 내게는 베네치아가 로마만 못한 것인가, 아니면 피렌체에 대한 애정이 괴테보다 컸던 것인가? 뭔 소리인지 모를 분께, 토스카나의 태양을 선물하며 베네치아행 기차에 오른다.

뛰어난 존재감을 보이지만 타이틀롤이 없는 다이앤 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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