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베르나르에서 지지까지
오후 2시에 막심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혼자서 정찬을 먹을 작정은 아니다. 레스토랑이 운영하는 박물관이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한국에서 미리 신청을 했다. 조금 일찍 콩코르드 광장 앞에 도착한지라 정면에 보이는 마들렌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성당 앞면의 3분의 1을 가리고 리모델링 중이라 좀 볼품이 없다. 가까이 가보니 보수를 후원하는 기업이 자사 광고를 겸한 휘장을 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패딩 의류 몽클레르의 광고이다. 류볼린이라는 중국 행위 예술가가 보디페인팅을 하고 설원 앞에 서 있다. 환경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는 데 기업이 일조하고 있다는 홍보인 듯하다. 광고라면 무조건 염증이 느껴질 법도 하지만 예술의 나라다운 콘셉트에 감탄사도 나온다.
아테네 판테온을 본떠 만든 이 성당도 나폴레옹 군대를 찬양하기 위해 짓기 시작했고, 이름에서 보듯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헌정되었다. 무엇보다 카미유 생상스와 가브리엘 포레가 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다. 마침 성당 안은 아리스티드 카바예 콜이 만든 ‘악기의 왕’ 파이프 오르간이 내는 소리가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늦기 전에 서둘러 막심 레스토랑으로 돌아왔다. 샹젤리제 극장이나 가르니에 오페라가 작품의 무대였다면 막심은 그 작품이 치열하게 구상되었던 창작의 산실 가운데 하나였다. 레스토랑은 신관과 구관이 붙어 있는데, 손님이 많지 않은 낮시간에는 유서 깊은 구관을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친절한 신사가 문을 열어 맞는다. 미국 여성 두 사람이 더 예약을 했다는데, 5분이 지나도 ‘노 쇼’이다. 맙소사, 나 혼자 관람이라니, 웬 횡재인가! 박물관의 학예사 피에르 앙드레 엘렌 씨는 관람객이 동양에서 온 남자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좀 실망한 듯하다. 언뜻 미안한 마음에 내가 여기에 온 목적에 대해 얘기했다.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서라고. 그러면서 무엇보다 막심을 배경으로 한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라 <즐거운 미망인> 얘기를 꺼냈다. ‘나는 막심으로 가네Da geh’ ich zu Maxim’라는 노래를 흥얼거리자 엘렌 씨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다.
20세기 초 전 유럽에 유행했던 이 노래는 벨러 버르토크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에서 다시 풍자했고 다시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7번에 재인용을 만큼 시대를 상징한다.
이쯤 되면 얘기가 통하는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와 함께 레스토랑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한 시간이 나에게는 벨 에포크로 가는 시간여행이었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얘기하지 않았겠는가. 영화의 주인공은 밤마다 시간 여행을 떠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만났던다. 엘렌 씨가 신이 나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영화를 찍기 전에 우디 앨런 감독이 무려 60명의 스텝을 데리고 레스토랑을 통째로 예약했어요. 그는 식사 내내 거의 아무 말도 없었는데, 그가 떠날 때 모습이 가관이었죠. 60명의 일행이 마치 홍해처럼 갈라지며 그에게 길을 열어줬어요.”
“루이 왕이네요?”
“문을 나서며 앨런 감독은 한 마디만 남겼어요. ‘곧 봅시다Au Revoir.’ 그러고는 얼마 뒤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앨렌 씨는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무개차를 타고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얘기하며, 사실 자기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오래된 롤스로이스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으로 레스토랑을 나서면 영화에서처럼 벨 에포크로 떠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와 함께 홀 안을 보노라니 정말 막심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1893년 막심 가야르라는 웨이터가 비스트로를 열었다. 간단한 음식을 내는 술집이었던 막심은 1900년 지배인인 외젠 코르뉘셰가 가계를 인수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코르뉘셰는 그해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선보인 ‘아르누보’ 양식으로 막심의 인테리어를 바꾸었다.
그때부터 막심은 파리 사교계의 중심이 된다. 만능 예술가인 장 콕토는 막심의 홍보대사였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막심에 왔고, 막심에서 그의 친구가 아닌 사람은 없었다. 빈의 오페레타 작곡가 프란츠 레하르가 <즐거운 미망인Die lustige Witwe>의 배경으로 삼으면서 막심의 명성은 국외에도 자자했다.
카라얀의 <즐거운 미망인> 앨범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 파리의 살롱을 그린 삽화에 ‘Maxim’s’라고 적혀 있고, 도이치그라모폰의 노란 로고에 적은 글씨도 아르누보의 오스트리아식 형제 ‘유겐트슈틸Jugendstil’ 서체이다.
막심 레스토랑은 스위스 제네바와 벨기에 브뤼셀에 이어 오늘날에는 아시아의 도쿄와 베이징, 도하에도 지점을 열었다. 내가 파리 여행에서 막심을 찾은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 시절, 제네바의 막심 지점에서 <봄의 제전>을 잇는 발레 <결혼>을 구상했다.
내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가운데 가장 관심을 가진 순서를 따지자면 <페트루시카>, <풀치넬라>, <봄의 제전>, <카프리치오>, <바이올린 협주곡>, <결혼>쯤 될 것이다. <페트루시카>의 러시아 정경이 좋았고, <풀치넬라>의 시간을 거스른 음악에 빠져들었다. 결국은 <봄의 제전>의 야성적인 매력을 거부할 수 없음을 자인했고, <카프리치오>와 <바이올린 협주곡>의 세련된 양식감으로 스트라빈스키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혼> 음반을 가장 먼저 샀고 곡도 바로 친숙해졌지만 그것이 <봄의 제전>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켰음을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막상 순서를 뽑고 보니까 <시편 교향곡>과 <오이디푸스왕>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막심의 터줏대감 장 콕토는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활동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지였고, 앞서 <병사 이야기>의 해설자로도 잠시 언급했지만, <시편 교향곡>과 <오이디푸스>의 영감을 주고받은 사람으로 빼놓을 수 없다. <결혼>에 대해서는 니스와 스위스에 가서, 장 콕토와 <오이디푸스왕>에 대해서는 역시 남프랑스의 망통에 가서 더 얘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막심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장 콕토에 앞서 막심의 중심인물이었던 이로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빠트릴 수 없다. 아르누보에서 1920년대 황금기에 이르기까지 사라 베르나르는 파리의 꽃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유명한 코르티잔이었다. 상류층을 상대하는 매춘부를 코르티잔이라고 불렀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동백 아가씨La Dame aux camélias》 가운데 마르게리트 고티에가 대표적인 코르티잔이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서는 같은 인물이 비올레타 발레리가 된다. 푸치니의 <라 보엠>에 나오는 미미도 코르티잔의 삶을 살았던 여자이다.
사라 베르나르는 어머니의 정부였던 모르니 공작의 선처로 수녀원 학교에 입학한다. 그녀는 수녀가 되고 싶었지만 관습에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애완용 도마뱀이 죽자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그것으로 신성모독을 추궁받는 식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마리아 수녀와 통했을 법하다. 마리아에게 노래가 힘이 되었다면 사라 베르나르는 연기를 통해 성장했다. 그녀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토비아와 천사’ 이야기를 공연할 때 라파엘 천사 역을 맡아 사람들 눈에 띄었다.
모르니 공작은 수녀원을 나온 사라를 코메디 프랑세스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주선했다. 고전극을 통해 연기의 기초를 다진 그녀는 뒤마의 눈에 띄였고 뒤마는 그녀를 ‘나의 작은 별’이라고 불렀다.
앞날이 창창하던 베르나르에게 또 한 번 시련이 닥친다. 그녀는 나폴레옹 3세 황제가 후원하는 짐나제 극장에서 빅토르 위고의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데뷔를 했다. 그녀가 낭송을 시작하자 황제와 외제니 황후가 일어서 나갔고, 곧 만백관이 뒤를 따랐다. 위고가 황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가였던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뒤이어 맡은 러시아 공주 역할도 베르나르에게 맞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다시 뒤마의 도움으로 벨기에로 건너갔다.
벨기에에 온 베르나르는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리녜 대공과 사랑에 빠진다. 이때 파리에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돌아갔지만 그녀가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상태는 정상이었다. 도리어 베르나르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기 집에 사생아를 들일 수 없다는 어머니 때문에 집을 나가 홀로 출산했다.
베르나르의 외아들 모리스에 대해서는 몇몇 설이 있다. 리녜 대공이 파리로 베르나르를 찾아와 그녀가 아이를 낳은 것을 알고는 함께 벨기에로 돌아가 결혼하자고 했지만, 가문의 허락을 받지 못해 헤어졌다. 아이를 홀로 키우기로 한 베르나르는 아버지가 누구냐는 질문에 “감베타(당대 유력 정치인)인지, 위고인지, 불랑제 장군인지 정확히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뒷날 베르나르가 유명해진 다음에 대공이 모리스를 찾아와 아들로 인정한다고 했지만, 도리어 모리스는 “사라 베르나르의 아들로 충분하다”며 거부했다.
정말 모리스가 진짜 아버지를 알 필요 없을 정도로 베르나르의 인기는 대단했다. 셰익스피어와 라신의 비극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파리를 압도했다. 특히 《햄릿》에서는 직접 타이틀롤을 맡을 정도였다. 급기야 영국과 미국, 남미 순회공연을 통해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그녀를 위해 빅토리앙 사르두가 두 편의 희곡을 쓴다. 《토스카》와 《지스몬다》이다. 전자는 뒤에 푸치니가 오페라로 작곡해 유명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스몬다》이다. 체코에서 온 화가 알폰스 무하가 베르나르를 모델로 한 《지스몬다》의 포스터를 그렸고, 그것이 곧 ‘아르누보’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르누보 양식의 결정체인 막심 레스토랑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막심 박물관의 관장인 엘렌 씨는 이런 파리 벨 에포크 문화의 전문가이다. 책도 여럿 냈고, 박물관에서는 매년 특정 주제를 가지고 전시를 기획한다. 2011-12년의 주제가 바로 ‘나, 사라 베르나르’였고, 그밖에 툴루즈 로트렉, 마르셀 프루스트, 마를렌 디트리히 같은 막심의 주인공들을 조명했다.
베르나르에 대해 한 가지 더 얘기할 것이 남았다. 만년의 그녀에게 불운이 닥쳤다. 무대에서 다리를 다친 그녀는 곧 상처가 괴사해 한쪽 다리 전체를 절단해야 했다. 휠체어에 앉아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위문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 독일 잠수함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지막 미국 투어를 마치고 무사히 보르도로 돌아왔다. 그녀가 도착한 11월 11일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이다.
스트라빈스키는 <페트루시카>에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인용했다. ‘그녀는 나무 다리를 가졌네Une Jambe de bois’라는 곡이다. 10년 전엔 몰랐지만, 지금은 유튜브에서 유성기 소리로 이 유행가를 들을 수 있다. 나는 이 노래가 다리를 잃은 사라 베르나르를 빗댄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찾아보니 스트라빈스키가 <페트루시카>를 쓴 것은 1911년이고 그녀가 다리를 잃은 것은 1915년이었다.
나는 엘렌 씨에게 다음에 막심에 올 때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초대하고 싶다고 인사를 했고 그는 기꺼이 응하겠다고 답했다. 이제 갈 길이 바쁜 나그네는 가르니에 궁전으로 향한다. 참 떠나기 전에 빠트린 것이 있다. 막심 레스토랑은 1981년부터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카르댕의 소유이다. 첫날 샹젤리제 극장에서 본 <비바 모믹스>의 제작자 모제스 펜들턴을 브로드웨이에 진출시킨 카르댕의 안목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막심에 가면 알아둘 것. 프랑스 정찬에서는 포크와 스푼을 뒤집어 놓는다. 발톱은 감추는 것이 예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