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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23. 2019

누가 파리 오페라의 지붕을 떼어갔나

가르니에 궁전과 바스티유 극장

프랑스를 미술의 나라라고 부르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은 어떠한가? 프랑스에게 음악은 어떤 것이었는지, 20세기에 이곳에 온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눈으로 살펴본다. 오페라의 유령에 홀리고 말았다.

가까이서 보면 돔이 안 보인다

가르니에 궁전(Palais Garnier)은 파리의 진짜 심장이다. 서울로 치면 광화문이다. 이 랜드마크를 그냥 ‘오페라’라고 부른다. 오페라 앞은 인종 전시장이다. 그제부터 몇 차례 지나쳤지만 오늘은 유독 붐빈다. 크리스마스 이튿날인 월요일, 많은 박물관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페라 바로 뒤의 라파예트 백화점을 비롯해 주변 상점 대부분이 영업 중이다. 예전의 파리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있다. 가르니에 궁전을 찍은 사진을 보면 대개가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을 호화롭게 꾸민 것처럼 보인다. 녹색 돔이 얹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현장에서 보면 돔이 안 보인다. 돔은 충분히 떨어져야 다시 나타난다.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미키마우스가 보는 것과 같은 아래 사진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줌인을 해야 이런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사진에 나온 사람들 자리에서는 돔이 안 찍힌다.

서울에서 대행 서비스를 이용해 미리 구매한 관람권이 있었지만, 그래도 꽤 긴 줄을 서야 했다. 무슨 공연이었을까? 오페라 가르니에는 공연이 없는 낮시간에도 일반 관람객을 받는다. 그만큼 내부 자체가 구경거리이다. 앞서 보았듯이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의 이름을 따서 부른다. 고트프리트 젬퍼가 설계한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하우스와 빈 국립 오페라 그리고 알베르토 카보스가 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과 더불어 19세기 극장 예술의 백미이다.


1875년에 개관한 팔레 가르니에는 100년 넘게 프랑스 국립 오페라단의 안방으로 사용되다가 1989년 바스티유 광장에 새 오페라 극장이 들어서면서 오페라 공연은 그쪽으로 넘기고 지금은 발레 무대로만 주로 사용된다. 극장 내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964년에 마르크 샤갈의 천정화이다. 샤갈은 라모에서 스트라빈스키에 이르는 열네 작곡가의 오페라에서 가져온 장면을 천장에 뿌려놓았다.

낮에는 박스석 한 곳만 개방하기 때문에 천장을 찍은 사진이 거의 동일하다

샹젤리제 극장, 살 플레옐과 더불어 가르니에 오페라 또한 스트라빈스키의 프랑스 시절 안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곳에서 초연한 작품은 앞서 살펴본 오페라 <나이팅게일>, <마브라>, 그리고 발레 <풀치넬라>와 <카프리치오>, 또 8중주와 같은 기악곡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밤 바스티유 광장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을 볼 것이다.

대개 이러면 나라가 망한다. 덕분에 백 년쯤 뒤에는 후광을 누리지만...

샤갈의 환상적인 화폭 속에서 오페라의 장면을 하나씩 떠올려보려는데 그만 핸드폰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가슴이 덜컥했다. 아직 여행 초반인데 분실이라도 했다면 이런 낭패가 없다. 겨울이라 겹겹이 입은 옷과 손가방에 달린 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졌는데 나오질 않는다. 아래층에 잠시 앉았던 벤치로 달려갔지만 그곳에도 없다. 정신을 가다듬고 찬찬히 다시 온몸을 셀프 검색했다. 그제야 겉옷 가슴께 주머니에서 애물단지가 나왔다. 아까는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나는 마치 극장의 유령에 홀린 기분이었다.

루트비히 2세의 비너스 동굴 아닌가!

그렇다. 가르니에 극장이 낮 동안에도 그리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이유는 바로 ‘오페라의 유령’ 때문이다. 1910년 가스통 르루가 쓰고 1986년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뮤지컬이 바로 이 극장의 이야기인 것이다.


극장에 출몰하는 유령이 신인 여가수를 흠모하며 벌어지는 기괴한 이야기는 20세기의 고전이 되었다. 얼굴을 가린 가수의 이야기는 바리톤 조세 반담이 주연한 영화 <가면 속의 아리아>를 비롯해서 오늘날 TV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복면 가왕>, <팬텀 싱어>와 같은 프로그램의 모델인 셈이다. 그러나 한 꺼풀 더 들어가 보면 도시의 랜드마크와 거기에 상주하는 기괴한 인물의 사랑 이야기는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이 원조이며 그 이전에 《미녀와 야수》라는 뿌리 깊은 설화에 바탕을 두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 팬은 아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보다는 극 중에서 공연되는 <한니발>이나 <돈 주앙>과 같은 가상의 오페라에 더 관심이 간다. 어쨌거나 잠시 핸드폰 때문에 놀란 가슴에 극장에 더 머무를 기운이 없어졌다. 저녁에 볼 공연을 위해 다시 호텔로 돌아간다.

바스티유 감옥. 아니 극장

파리 오페라가 2017-18 시즌 연말에 마련한 작품은 푸치니의 <라 보엠>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를 맡아 화제였다. 주인공 미미 역에 최정상의 소프라노 소냐 욘체바 그리고 무제타는 무서운 신예 아이다 가리풀리나가 캐스팅되었다. 그러나 내가 볼 무대에서 두다멜과 욘체바를 비롯한 1진은 이미 철수했다. 그들이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는 동안 더블 캐스팅의 2진이 오늘 밤 스타 탄생을 꿈꾼다. 두다멜의 베네수엘라 후배인 마누엘 로페스 고메스가 지휘하고 니콜 카라는 신예가 미미를 부른다.


다행히 요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가리풀리나는 이날 출연하기로 되어 있어 그녀를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수확이 작지 않다. 선배 안나 네트렙코가 그랬듯이 가리풀리나도 뭇남성의 마음을 훔치는 미모의 무제타를 연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태이다.

2014년 빈 국립 오페라. 아직 익숙칠 않았나? 어딜 가나 이 노래만 시켜서 이젠 잘한다

“내가 문밖을 나서면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지”라며 연인의 애간장을 태우는 역할을 가는 곳마다 요청받는다. 그런 가리풀리나도 우주선 안에서 ‘무제타의 왈츠’를 부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번 <라 보엠>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연출이다. 독일 연출가 클라우스 구트는 파리 다락방 가난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조난된 우주선 속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른바 ‘레지테아터Regietheater’라는 현대 오페라의 ‘뜨거운 감자’와 마주한 것이다. 오페라의 배경에 연출가가 개입하는 이런 방식은 찬반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연극무대에서는 대사를 넣고 빼거나 장면을 뒤섞고 시공간을 옮기는 작업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애초에 가사와 음악이 하나인 오페라에서는 자칫 연출가의 개입이 원작에 누가 될 소지가 없지 않다. 

미미가 동면에서 깨어난다. 당황스럽다

보수적인 음악가들은 초기 레지테아터를 ‘그라피티’나 ‘반달리즘’에 비교하기도 했다. 도시 경관을 해치는 낙서나 문명 파괴 행위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고답적인 연출로 고전의 빛이 바래가는 데 대한 우려 속에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감각적인 연출의 필요성은 꾸준히 대두되었다. 특히 바그너와 같이 나치즘이나 반유대주의의 도구로 악용되어 온 작곡가의 경우 자극적인 ‘레지테아터’의 개입은 빈번했다.


나 또한 흥미롭게 각색한 오페라 연출에 찬사를 보낸 적이 많다. 그러나 이번 파리의 <라 보엠>은 너무 멀리 갔다. 공상과학 영화의 고전인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래 근래에도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 <마션>과 같은 우주 영화들이 미지의 공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왔지만, 파리 다락방의 가난한 보헤미안들이 왜 우주에서 저러고 있는가에 대해 이 무대는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최근 들어 나는 이런 ‘연출 장난’에 무척 회의적이다. 바그너 후손들이 바그너의 작품만을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축제나 여름 음악제의 원형 격인 잘츠부르크 축제가 레지테아터의 메카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원죄를 지닌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그들의 찬란한 예술이 정치적으로 오염되었던 것에 결벽증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그너로 대표되는 독일 민족주의 음악이 가진 한계는 그 또한 시대와 인물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소냐 욘체바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오늘의 예술가는 오늘의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 예술 불모의 시대의 예술가가 과거 걸작을 가지고 현재의 메스를 대는 것은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연출가의 개입이 원작을 듣는 데에 해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스스로 창작할 수 없는 사람이 정 뭔가 하려거든 오페라가 아닌 발레가 더 적합하다. 언어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이미 시대를 초월한 무대의 본보기이다. 작고한 모리스 베자르와 피나 바우슈, 우베 숄츠는 무용수들에게 새로운 혼을 불어넣고 갔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앙줄랭 프렐조카주의 처녀는 더욱 잔혹하게 희생된다. 유튜브가 연소자 관람 불가로 삭제했을 정도이다.


올리버 헤르만은 풍요제의 제물이 될 처녀를 현대사회의 소외된 계층 안으로 가져다 놓았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베를린 우범지대를 찍은 헤르만의 영상과 더불어 이 시대의 제전을 만들었다.

난 베자르가 제일 좋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옷을 입을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이 줄을 섰다. 어릿광대의 치정극인 <페트루시카>는 그야말로 우주로도 옮겨갈 수 있는 이야기이고, 결혼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한 <결혼>도 레지테아터의 도전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예 캔버스가 백지상태인 <카프리치오>나 바이올린 협주곡과 같은 기악곡도 있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파리 시내를 샅샅이 훑고 돌아다닌 탓에 녹초가 되었지만 그만큼 보람 있는 하루였다. 


여명의 노트르담 성당이 주는 따뜻한 기운과 오르세 미술관에서 만난 파리의 사람 풍경이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 앵발리드의 전쟁 박물관과 대조적으로 전쟁과는 딴 세상인 막심 레스토랑의 아르누보 유물들, 가르니에 궁전의 휘황한 위용이 교차했다. 다만 <라 보엠>은 푸치니가 그리고자 했던 ‘벨 에포크’에 남겨 두었어야 했다는 생각에 아쉬운, 파리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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