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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29. 2019

니스에선 샤갈에게 물어봐

지붕 위의 바이올린과 결혼

프랑스를 미술의 나라라고 부르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은 어떠한가? 프랑스에게 음악은 어떤 것이었는지, 20세기에 이곳에 온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눈으로 살펴본다. 니스의 러시아 정교회와 샤갈 박물관으로 안내한다.


2017년 12월 27일 아침 일찍 파리 호텔을 나섰다. 서울 김포에 해당하는 파리 오를리 공항에서 니스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코트다쥐르 공항은 프랑스 리비에라의 관문이다. ‘코트다쥐르’라는 것이 불어로 푸른 해안이라는 뜻이고, ‘리비에라’는 이탈리아 말로 해안이다. 그게 그거인 이 지중해 연안을 이르는 말이 많은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특히 영국 사람들에게 그랬다.


프랑스 리비에라는 툴룽에서 시작해 영화제로 유명한 칸, 주도인 니스, 독립국가인 모나코까지 이어진다. 사이사이로 소설과 영화 《향수》의 배경이 된 그라스, 샤갈이 묻힌 생폴 드 방스, 로맨틱 영화의 고전 <잊지 못할 사랑>에 나오는 빌프랑슈 쉬르 메르까지 하나하나가 보석 같은 도시들이다.

푸라 델스 바우스가 출연한 군중 장면과 베키오 다리를 모델로 한 향수 공방. 벤 위쇼의 사이코패스 연기

천혜의 자연과 교통의 요지였던 이 지역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지배했고 중세 이후에는 사보이 공국과 모나코 공국, 제노바 공국에 속했다. 토리노를 수도로 하는 사보이아 공국(Ducato di Savoia)은 뒤에 이름이 사르데냐 왕국으로 바뀌었고, ‘이탈리아의 프로이센’이라 불리며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의 주체가 되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주고받던 니스의 운명은 1860년 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맺은 토리노 조약으로 프랑스령임이 확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더불어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었던 가리발디 장군이 바로 니스 태생인 것만 봐도 이 도시가 가진 독립적인 정서를 읽을 수 있다.


런던의 사보이라는 명칭도 아마 이곳으로부터 가져간 것이리라. 템스강변 스트랜드 거리에 있는 사보이 호텔과 사보이 극장은 사보이 궁전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것이라 그 이름을 쓴다. 니스를 자주 찾았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런던에는 길버트와 설리번이라는 콤비가 만든 코믹 오페라가 대유행이었다. 사보이 극장장 리처드 도일리 카트는 오페라에서 얻은 수익으로 관객과 출연진을 위한 호텔을 지었다. 사보이 호텔은 곧 명사들의 메카가 되었다. 사보이라는 이름은 럭셔리 호텔의 대명사가 되어 서울 명동의 한 호텔도 가져올 정도였다.

길버트와 설리반의 대표작 <미카도>. 이것은 또 다른 세계

사보이는 내가 성인이 되어 혼자 힘으로 찾아간 첫 번째 장소 가운데 하나로 기억한다. 물론 런던이 아니라 서울의 사보이 호텔이다. 서울에서 독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면 알아야 할 두 곳이 남산에 있는 주한 독일문화원과 명동 사보이 호텔 옆에 있는 소피아 서점이었다. 말 그대로 싸 보이는 호텔 옆 건물, 낡은 계단을 올라가 마주한 작은 서점의 정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독문학도가 아니면 모를, 아니 독문학도라도 잘 알지 못할 《헤르만과 도로테아》라는 괴테의 작은 소설집이 내가 처음 소피아 서점에서 산 책이다. 슈만이 이 이야기를 위한 서곡을 썼다.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괴테의 단편에 붙인 슈만의 서곡 <헤르만과 도로테아>. '라 마르세예즈' 선율이 인용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벌써 스트라빈스키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세계의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앞서 살펴본 오페라 <마브라>가 바로 댜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 일행이 사보이 호텔에 묵을 때 구상된 것이고, 현재 이 호텔은 스트라빈스키가 쳤던 피아노를 번쩍번쩍 광을 내어 전시 중이다.

1889년에 문을 연 런던 사보이 호텔. 거슈윈이 <랩소디 인 블루>의 런던 초연을 갖기도 했다

니스에서 정말 날씨다운 날씨를 처음 맞았다. 바닷바람은 강했지만, 겨울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햇살이 지중해를 만끽하게 했다. 짐을 풀자마자 역시 가장 처음 찾은 것은 러시아 정교회당이었다.


프랑스식 명칭은 니스 생 니콜라 정교회 대성당이다. 러시아밖에 있는 정교회 성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둥근 양파 지붕을 얹은 동화 속 건물과 같은 교회 앞에 한 떨기 장미가 철을 잊은 채 눈부시게 피었다. 테오필 고티에와 베를리오즈, 니진스키의 정령이 깃든 바로 그 품종이다. 내 마음대로!

여름의 마지막 장미인가, 겨울의 첫 장미인가?

교회는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가 비용을 대어서 1912년에 축성되었다. 그 내력을 알기 위해서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 차르는 알렉산데르 1세였다. 모스크바를 불태워 항전한 바로 그 시대이다. 후사가 없던 그의 뒤를 동생 니콜라이 1세가 이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격변은 크림전쟁(1853-1856)이었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종군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과 터키 연합군에게 패전한 러시아는 흑해 일대 영향력을 크게 상실했다.


니콜라이 1세의 아들 알렉산데르 2세는 다행히 성군이었다. 그는 러시아 근대화의 마지막 퍼즐인 농노해방(1861)을 단행했다. 일련의 정치적인 격변 가운데 문화도 꽃피었다. 1860년 개관한 황실 오페라 발레 극장은 황후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의 이름을 따서 ‘마린스키 극장’이라 불렀다. 개관 작품은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인 미하일 글린카의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이었다. 마지막에 ‘영광Slava’의 합창으로 끝나는 러시아 음악의 자존심이다.

아이작 스턴과 로스트로포비치의 절친한 친구 그레고리 펙이 시상한 케네디 센터 공로상. 마지막 합창이 '슬라바'. 첼리스트의 애칭이다.

알렉산데르 2세와 황후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의 장남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촉망받는 황태자였지만,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다가 1865년 4월 이곳 니스에서 뇌수막염으로 객사한다. 황후는 장남의 죽음과 남편의 공공연한 외도로 슬픔 속에 여생을 보내다가 1880년 세상을 떠났다. 개혁에 대한 반발도 작지 않았고, 그 부작용으로 급진 세력의 폭탄 테러에 차르 또한 이듬해 암살되었다.


보위를 이은 것은 차남 알렉산데르 3세였다. 아버지의 폭사를 목격한 차르는 반동 정치로 회귀했고, 그 주입을 받은 아들 니콜라이 2세는 결국 볼셰비키 혁명을 불러오는 마지막 차르가 된다. 니스의 대성당은 그런 니콜라이 2세가 이국에서 뇌수막염으로 타계한 큰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설립을 후원한 것이다. 1903년에 첫 삽을 떠 1912년에 완공했으니, 스트라빈스키가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한창 <봄의 제전>을 초연할 꿈에 부풀었을 때까지이다.

니스 정교회당의 내부

스트라빈스키는 1910년 10월에 니스에 왔다. 이곳에서 <페트로슈카>를 완성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에 머물다가, 1924년에 다시 코트다쥐르로 돌아왔다. 스트라빈스키가 니스에서 작곡한 곡들은 데뷔 시절 파리에서 거둔 일련의 성과, 곧 <불새>, <페트루시카>, <봄의 제전>에 못지않았다. 40대 왕성한 창작기의 그는 지중해의 온화한 대기 속에서 <오이디푸스 왕>, <시편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일련의 정교회 음악을 쓴다.


성당을 나와 발길을 옮긴 곳은 마르크 샤갈 박물관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바다를 보기 위해 니스에 왔을 터이지만 나는 거꾸로 자꾸 내륙으로 들어간다. 박물관은 니스 안쪽에 있다. 걷기엔 겨울 외투가 무겁고 더운 날씨이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니 고급 주택가 한가운데에 이국적이고 말쑥한 정원과 현대적인 건물이 나온다.

니스 샤갈 박물관의 이국적인 정원

마르크 샤갈은 스트라빈스키보다 5년 뒤인 1887년에 태어났고 그보다 14년을 더 살아 1985년에 세상을 떠났다. 샤갈은 피카소, 마티스와 더불어 20세기에 활동한 화가 중 가장 사랑받는 인물일 것이다. 화려한 색채와 동심을 녹인 듯한 화풍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엄청난 다작이다.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스트라빈스키와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오히려 샤갈은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러시아 태생이다. 좀 더 정확히는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으로 벨로루시의 비쳅스크가 고향이다.


러시아 시절 샤갈의 스승은 발레 뤼스의 무대 담당이었던 레옹 박스트였다. <불새>의 의상과 <목신의 오후 전주곡>의 무대 그리고 유명한 댜길레프의 초상화가 박스트가 그린 것이다. 

박스트가 디자인한 불새와 목신

역시 벨로루시 태생의 유대인이었던 박스트는 샤갈의 성공 모델이었다. 그러나 박스트는 샤갈에게 파리로 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유대인이자 외국인인 그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샤갈은 스승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파리에 가서 입체파 미술을 접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살아 있는 교실이었다. 렘브란트부터 인상파에 이르는 회화는 샤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혼을 위해 러시아로 돌아갔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겪은 뒤인 1923년에 다시 프랑스로 나왔다. 이때부터 그는 코트다쥐르를 두루 여행했다. 푸른 지중해와 녹색 초목, 강렬한 태양은 샤갈의 환상적인 색채가 빚어지는 팔레트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갔던 샤갈은 전후 다시 돌아와 니스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남긴 구약성서 연작이 니스 샤갈 박물관에 전시된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와 샤갈의 삶의 궤적은 이렇게 현대사의 격랑 속에 많은 부분이 겹친다. 그러나 나에게 더욱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각자의 장르에서 최고의 ‘스토리텔러’였다는 사실이다. 샤갈은 구약성서의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애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문화권에서 익숙한 이야기들을 너른 캔버스를 촘촘하게 구현했다.

샤갈의 에덴 동산
루카스 크라나흐의 에덴 동산

샤갈이 그린 낙원의 모습을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르네상스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그림과 비교해 본다. 마치 바흐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나란히 놓은 것과 같다. 스트라빈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덤바턴 오크스 협주곡> 같은 곡들이 바흐를 모델로 한 작품들이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 박물관의 렘브란트 그림과 대비를 이룬다. 

샤갈의 아브라함과 이삭
같은 주제를 그린 렘브란트

스트라빈스키는 만년에 일련의 성서 연작을 발표한다. 62세에 쓴 칸타타 <바벨>, 80세와 81세에 쓴 <대홍수>,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것이다. 가리 베르티니와 남서독일 라디오 합창단의 음반이 역시 샤갈의 그림을 표지로 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를 장식한 두 벽화 <음악의 승리>와 <음악의 원천> 가운데 후자를 가져온 것이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부른 <바벨>과 <아브라함과 이삭> 역시 유튜브에서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음반에 쓰인 샤갈의 <음악의 원천>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내부 오른쪽을 장식한다
왼쪽 붉은 바탕의 그림이 샤갈 <음악의 승리>

각각 영어와 히브리어로 된 가사를 노래한다. 독어나 불어, 이탈리아어가 대부분인 클래식 음악만 듣다가 영어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노래가 나오면 일단 매우 반갑다. 뜻을 몰라도 귀가 솔깃하다고 할까? 히브리어 노래는 마치 나를 낯선 이스라엘 땅 그것도 머나먼 성서 시대로 데려가는 느낌이다. 가사를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내가 렘브란트나 샤갈의 그림 속 주인공이 된다.


음반 수록곡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시편 교향곡>이다. 이것이 바로 라틴어 가사로 된 합창 교향곡이다. 스트라빈스키가 앞서 작곡한 러시아 배경의 발레를 위한 음악은 <시편 교향곡>을 통해 최종 완성을 본다. 마치 히브리에서 시작한 유대 예배의 전통이 그리스도 이후 유럽 이교도 고유의 제식과 결합해 가톨릭 미사라는 제사로 정형화되었던 것처럼, <봄의 제전>이라는 원시 풍요제가 라틴어와 그리스 정교의 옷을 입고 <시편 교향곡>으로 거듭난 것이다.

기독교 가사와 이교도 음악을 절충한 <시편 교향곡>. 러시아계 유대인 지휘자의 모습이 랍비처럼 보인다

한국 클래식 음악 애호가가 가장 좋아하는 20세기 음악으로 아마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들어도 이의 없으리라. 이 중세 예찬은 오르프가 존경하는 스트라빈스키의 <결혼>을 듣고 감명받아 <시편 교향곡>풍으로 쓴 것에 다름 아니다.

그 이교도는 다름 아닌 게르만이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그런데 비틀스의 후배가 지휘를...

시편의 가사는 대부분이 다윗 왕이 수금을 켜며 노래한 찬가이다. 예언자 예레미아가 지은 애가처럼 구약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원래부터 같은 시대에 나온 노래 가사였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샤갈과 스트라빈스키의 그림은 조우한다. 나는 핏빛이 선명한 샤갈의 애가로부터 스트라빈스키의 선홍색 찬양이 터져 나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샤갈의 <예레미아의 애가>. 이런 그림이 모두 벽면을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크기이다.

스토리텔러로서 두 예술가가 만나는 최고의 지점은 바로 ‘결혼’이다. 면사포를 쓴 신부는 샤갈이 평생 즐겨 그린 소재이다. 더불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남자가 늘 따라다닌다. 신부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모티프를 가지고 탄생한 이야기가 바로 뮤지컬과 영화로 유명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다. 러시아 아나텝카라는 가상의 유대인 마을을 배경으로 한 숄렘 알레이헴의 이야기는 바로 샤갈의 그림에 바탕을 두었다. 나는 이 뮤지컬의 전도사로 가는 곳마다 다양한 강의 소재로 인용하곤 했다. 그야말로 유대와 러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와도 같은 작품이다.

아빠는 풍각쟁이야

C형이 장녀를 시집보낼 때, 영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해가 뜨고 해가 지고Sunrise, Sunset’ 부분을 하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짧은 소개를 부탁했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이보다 잘 담은 노래는 없다. 나는 결혼식 뒤로 “내 자녀 때도 부탁한다”, “주례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는 인사를 많이 들었다.


정작 샤갈 자신은 이 뮤지컬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가르니에 궁전 천장화를 그린 샤갈에게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당연히 호들갑스러웠을 것이다. 그가 같은 소재로 된 스트라빈스키의 <결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는 <결혼>이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은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쓴 직후에 구상한 곡이다. 그러나 작곡은 전쟁과 혁명으로 지체되었고 그 사이에 <병사 이야기>를 비롯한 스위스 시대가 전개된다.

캘리포니아 라 졸라 심포니와 합창단. 죄르지 리게티 <백 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시>와 스트라빈스키 <결혼>을 결합한 아이디어가 탁월하다. 지방 악단은 이래야 한다 (6:40)

<결혼>이 초연된 것은 니스에 다시 오기 직전인 1923년의 일이다. 이때 니진스키는 정신병으로 발레단을 떠난 뒤였기에, 안무는 그의 동생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가 맡았다. 오빠를 도우며 착실히 실력을 닦은 니진스카의 안무가 <결혼>으로 만개한 것이다. 그러나 발레는 당시로서는 음악처럼 일일이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무대 배치와 조명의 도면이 실마리가 될 뿐이었다. 그런데 <결혼>의 정점을 이루는 장면의 사진이 남아 있었다. 머릿단을 올린 신부를 묘사한 안무의 한 장면을 토대로, 니진스카의 발레가 부활한다. 번스타인의 음반 표지가 바로 그 결과물이다. 내가 처음 산 이 음반의 출연진은 눈이 휘둥그레지게 한다.

위 공연도 같은 안무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네 사람의 피아니스트와 타악주자가 필요한 <결혼>의 진용으로 이만한 음반은 다시없을 것이다. 최고의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치프리앙 카차리스, 오메로 프란세스추를 이런 미지의 발레를 위해 한데 모을 수 있는 사람은 번스타인뿐이다.


니진스카의 안무를 공연한 런던 로열 발레단의 영상은 오래도록 내 보물 목록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에 언급할 만한 두 개의 자료가 추가되었다. 펠레아스라는 독립 레이블에서 나온 필리프 베지아의 영상물은 <결혼>이 작곡된 제네바 호수 인근에서 촬영한 것이다. 다시 한번 러시아 민속의 설정을 뛰어넘고 정교하게 작동하는 혼례의 음악을 현재에 대입한다.


더욱 반가운 것은 영상이 아닌 음반이지만 뇌리에 선명한 이미지를 남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조명을 받는 두 음악가의 만남으로 이뤄진 앨범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와 테오도어 쿠렌치스가 이끄는 무지카 에테르나의 음반은 표지만 보고도 깜짝 놀라게 한다. 

신랑 테오도르와 신부 파트리치아. <결혼> 가운데 제4장 결혼 피로연

러시아 시골 어디쯤에서 열렸을 법한 결혼식 사진인데, 자세히 보면 지휘자와 독주자가 신랑 신부로 분장하고 찍은 것이다. 더욱이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작을 수록하고 남은 시간에, 단독으로는 전혀 인기가 없을 <결혼>을 함께 담은 것이다. 실제로 스트라빈스키의 <결혼>에서 바이올리니스트가 설 자리는 없다. 그런데 코파친스카야가 오직 쿠렌치스가 지휘할 <결혼>을 위해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을 협연하고, 커버 사진까지 자청하고 찍은 것이다. 이 또한 유튜브에서 전곡을 들을 수 있다.


쿠렌치스와 무지카 에테르나의 연주는, 내가 그동안 들어온 <결혼>이 마치 서울내기가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 낸 연기였다는 인상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지카 에테르나는 러시아 페름 극장 단원이 주축이 된 앙상블이기 때문이다. 페름은 우랄 산맥 근처의 도시이다.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 때 얼마나 먼 곳이냐 물으면 이렇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쓰고 데이비드 린이 영화로 만든 <닥터 지바고>. 이 걸작에서 혁명을 피해 우랄 산맥 근처의 바리키노로 간 유리 지바고는 인근 유리아틴의 도서관에 갔다가 그곳에서 사서로 일하는 라라를 만난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속 아나텝카처럼 바리키노와 유리아틴도 가상의 이름이다. 아나텝카의 모델이 샤갈의 고향 비텝스크라면 유리아틴의 뿌리는 바로 파스테르나크가 머문 적이 있는 페름이다.

채플린의 딸을 잊고 햄릿의 어머니에게 간 루돌프 황태자. 렛 잇 고!

히틀러의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하기 전에 마린스키 오페라(당시는 레닌그라드 키로프 오페라)는 모든 기물과 예술가를 멀리 우랄 산맥 근처 페름으로 피신시켰다. 그만큼 외진 곳이면서 또 수준 있는 극장과 전통을 갖춘 곳이었다. 전란 속에 문화를 지켜낸 페름은 ‘국립 차이콥스키 오페라 발레 극장’이라는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 태생의 지휘자 테오도르 쿠렌치스가 2011년 페름에 왔고 오랫동안 묻혔던 이름이 그와 더불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쿠렌치스는 페름의 단원들이 주축이 된 무지카 에테르나 앙상블과 함께 루체른과 잘츠부르크 축제를 강타했고, 2018년부터 새롭게 출범하는 서독일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슈투트가르트와 바덴바덴 프라이부르크의 오케스트라를 통합한 것)의 초대 지휘자로 부임했다. 페름에서 2003년에 시작된 국제 페스티벌이 ‘댜길레프 축제’이다.

2018년 페름 댜길레프 축제의 홍보 영상. 언제 갈 테냐!

페름이 왜 댜길레프 축제의 도시가 되었을까? 보드카 양조업을 하던 퇴역 장교 파벨 댜길레프의 아들 세르게이가 고등학교 때까지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가 살던 집은 댜길레프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기차역처럼 생겼다

마지막으로 하나. 어릴 때 공룡이나 지질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중생대 쥐라기, 백악기와 같은 용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페름기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고생대 마감하는 페름기는 당시 지형이 처음 발견된 페름에서 따온 말이다. 

고생대의 끝을 불러온 페름기의 대종말 모습. 멀고 먼 옛날 은하계 저편에서 있었던 일이다

쥐라는 스위스 서북부의 산악지대이다. 안데르센이 이곳에 머물며 프랑스 말을 익혔고 눈과 얼음에 대한 많은 동화를 잉태했다. <겨울 왕국>의 산실이 쥐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악을 볼 수 있는 곳은 독일 북해 연안 뤼겐이다. 며칠 뒤 스위스 빈터투어에서 다시 이 이야기를 만나자. 샤갈 박물관의 타일 벽화처럼 고생대와 중생대의 퍼즐이 하나둘 알듯 모를 듯한 그림을 맞추어 갔다.

샤갈 박물관의 외부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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