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론과 댄스의 왕
샤갈 박물관을 나와서야 나는 지중해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빠르게 아폴로의 전차가 서쪽으로 달리는 중이었고, 해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그러나 많은 휴양객이 겨울바다의 낭만을 만끽한다.
이곳이 바로 빅토리아 여왕부터 처칠 수상, 가까이는 팝가수 엘턴 존까지 많은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산책로이다. 이름도 ‘프롬나드 데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 영국 산책로이다. 길가에 니스 오페라 극장이 있다. 극장 바로 뒤 마세나 광장은 니스의 중심가이다. 지금은 허물고 백화점이 들어섰지만 원래 마세나 광장의 오른편에는 카지노가 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니스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정작 그가 작품을 초연한 곳은 대개 파리였다. 야심만만한 그에게 코트다쥐르는 너무 변두리였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온 친구 마누엘 데 파야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1907년에 파리에 왔지만 당시에 쓴 걸작 오페라 <허무한 인생La vida breve>이 초연된 것은 1913년의 일이다. 그것도 파리가 아닌 이곳 니스의 카지노에서 공연되었다.
파야는 1929년 댜길레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스트라빈스키에게 편지했다. 정말 그가 멀리서 대부의 문상이라도 온 듯한 진심이 느껴져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는다.
친애하는 이고르,
댜길레프가 죽었다는 얘길 듣고 큰 충격을 받아 누구보다 먼저 자네에게 편지를 쓰네. 얼마나 상심이 큰가! 그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존경할 만한 것은 자네를 세상에 알린 것이네. 우리 모두 그에게 그 점을 빚지고 있지. 더구나 자네가 없으면 발레 뤼스는 어찌 될까? ... 우리 불쌍한 친구가 자기 업적보다 앞서 간 것이 그나마 위안이네. 나는 언제나 전쟁 중에 그가 누군가 와서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 봐 두려워하던 일이 기억나네. 뒤에 우리는 그런 두려움이 얼마나 쓸 데 없는 것인지 알게 되었지. 아무도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일세. 그리고 지금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댜길레프 발레단의 우두머리로서 내 진심 어린 애도를 받아 주게. 지금으로써 다른 누가 그것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오래고 진정한 애정을 담아 자네를 포옹하며,
마누엘 데 파야
아마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사망했을 때 언감생심 유족들로부터 받고 싶었을 인사가 이런 것이었으리라. 스트라빈스키는 이렇게 자신보다 불과 열 살 많은 후견인을 또 한 사람 떠나보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니 출근 인파는 많으나 아직 문을 연 곳이 없다. 생트 레파라트 대성당이 다행히 여행객을 맞아준다. 니스를 수호하는 레파라타 성녀를 모신 성당이다. 레파라타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 시대 소녀이다. 15세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는데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를 화형에 처하자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려 불을 껐다. 끓는 역청을 먹였는데도 배교하지 않자 결국 그녀는 참수에 처해진다. 그런데 목이 잘리는 순간 비둘기가 나타나 그녀의 영혼을 하늘에 인도했다고 한다. 시신을 실은 배는 지중해를 흘러 니스에 도착했다.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17세기에 성녀의 유골을 모신 성당이 지어질 때 세월의 옷을 입고 더욱 세공되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과장되지 않은 성녀의 기적 이야기가 바로 생각난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인 루르드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전설이다. 그녀는 1844년에 태어나 1879년에 선종한 비교적 현대인이지만 이야기는 나 같이 신앙 없는 사람이면 믿기 힘들다. 거꾸로, 믿고 싶을 정도로 솔깃하다는 것이다.
가난한 소녀 베르나데트는 땔감을 구하러 갔다가 암굴에서 귀부인을 보고 묵주의 기도를 올렸다. 부모는 그녀가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하게 했지만, 소용없었다. 베르나데트는 부인이 가리킨 곳을 파서 나온 웅덩이의 물을 마시고 몸을 씻었다. 웅덩이는 곧 샘이 되었고 소문이 퍼져 한 번쯤 하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병이 낫는 사람이 생기고 순례의 행렬이 인산인해를 이루자 정부와 교황청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의 집요한 신문을 견뎌낸 베르나데트는 결국 수녀가 되었고, 루르드는 성지가 되었다. 매년 수백만의 신앙인이 이곳을 찾는다.
오스트리아 작가 프란츠 베르펠은 유대인이었다. 그의 아내는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이자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전처였던 알마였다. 나치를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미국으로 탈출하던 베르펠 부부는 루르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들에게 베르나데트의 이야기를 글로 널리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무사히 할리우드에 온 베르펠은 <베르나데트의 노래>로 약속을 지켰고, 소설은 1943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제니퍼 존스가 주인공을 맡아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은 영화는 최근 흑백 화면을 리마스터링해 더욱 생생하다.
베르펠은 이웃 스트라빈스키에게 영화의 배경에 쓸 음악을 부탁했다. 영화에 많은 관심이 있는 스트라빈스키였지만 이미 60대에 접어든 그가 호락호락 남의 뜻대로 움직일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중도에 그만두었고 알프레드 뉴먼이 이어받았다. 20세기 폭스 영화사의 로고 음악으로 유명한 뉴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대신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성모의 환영’ 음악은 다른 곡에 사용되었다. 바로 <세 악장 교향곡>이다. 첫 악장에는 뉴스로 본 중국의 초토화 작전이 모티프가 되었다. 적에게 이로운 것을 남기지 않기 위해 농작물과 집, 가축을 모조리 불태우는 이 가차 없는 병법이 스트라빈스키의 악상으로 보여진다. 두 번째가 성모가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는 환영의 음악이고, 마지막 악장은 다시 뉴스에서 본, 군홧발을 높이 차며 걷는 동맹국 군대의 행진 모습을 묘사한다. 폭압적인 전제국가의 모습 사이에 베르나데트의 음악이 서 있는 것이다.
스트라빈스키가 사망한 이듬해인 1972년 그를 기리는 축제에서 조지 발란신이 이 교향곡을 안무했다.
2008년 사이먼 래틀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 대강당을 찾았을 때 <세 악장 교향곡>을 첫 곡으로 연주했다. 모두 유튜브에서 흔적을 듣고 볼 수 있다.
생트 레파라트 성당 안은 역시 크리스마스 직후인지라 아직 성탄절 미니어처가 그대로이다. 파리 노트르담에서 본 것에 비할 바 아닌 소박한 것이지만, 지중해 연안 풍경으로 꾸며진 구유가 실제 베들레헴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
생트 레파라트 성당을 나왔지만 아직 해가 퍼지지 않았다. 라스카리스 궁전의 악기 박물관이 문을 열 때까지 바로 앞 카페에서 카페라테, 아니 카페오레를 한 잔 마셨다. 노천에서 피우는 담배 냄새가 자꾸 카페 안까지 들어와 일어섰다. 몸을 움직여 덥히는 쪽이 낫겠다 싶어 니스 성에 오르기 시작한다. 언덕으로 난 계단 난간에는 니스가 고대 그리스 식민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리는 보도블럭과 타일 장식이 눈길을 끈다.
영국 사람들이 니스를 좋아한 이유는 영어로 ‘좋다Nice’는 뜻인 그 이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Have a Nice Day! 내 또래는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의 짝퉁 ‘나이스’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나이스는 참 제대로 베낀 것이다. 나이키가 승리의 여신 니케를 말하듯이 니스가 바로 그 여신의 이름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흔적만 겨우 남은 니스 성 위에서 내려다본 해변이 시원하다. 뒤로 돌아서면 폭풍우로부터 배를 지켜줬을 천혜의 항구 림피아가 보인다. 아내의 세례명을 딴 요트 아우렐리아호의 선주이자 선장인 K피디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K피디와 인연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간지 기자였던 나는 KBS 1FM의 <FM실황음악>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프로그램의 월간 스케줄을 받아서 그럴듯하게 포장해 두 페이지로 소개하는 일이 보람 있었다. <FM실황음악>은 선친이 KBS에 근무하던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 국제협력실에서 유럽방송연맹(EBU)을 담당하던 아버지는 당신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이야말로 가장 좋은 국제 교류 아이템이라고 굳게 믿었다. 음악은 번역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라디오의 P프로듀서와 의기투합해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했다. 음악학자 김춘미, 피아니스트 박은희가 진행하던 <세계 음악의 현장>이 그렇게 태어났다. 아버지가 텔렉스로 EBU에 방송하고 싶은 공연을 신청하면 몇 달이 걸려 선편으로 릴 테이프가 도착했다. 방송국에서 틀지 않은 릴 테이프가 가끔 집에 흘러왔고, 내 책상 아래 빈 공간을 차지하곤 했다. 나는 매일 밤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실황을 들으며 성장했지만, 당시는 그것이 아버지가 관여한 일인 줄은 잘 알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공연은 주세페 시노폴리가 지휘한 바이로이트 축제의 <탄호이저>와 엑상프로방스 축제에서 윌리엄 크리스티가 지휘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였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전당도 가기 빠듯하던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세계 음악의 현장>은 이상향이었다. 스트라빈스키가 황실 오페라 극장에서 차이콥스키나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K피디를 돕던 때로부터 채 10년이 못 되어 2007년 4월 나는 제목만 바뀐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었다. 혹자는 내가 아버지의 후광으로 얻은 자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K피디와 아버지는 면식 정도 있는 사이였고, 그나마 아버지는 KBS를 나와 십수 년째 홀로 좋아하는 일에 매진 중이었다. 나도 아버지도 내가 그 프로그램 디제이가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K피디는 나와 1년 진행한 뒤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겼다.
5년 전쯤 퇴직한 K피디에게 멋진 니스 요트 선착장의 사진을 전송하니 뭔가 뿌듯하다. 11년 전 처음 <FM실황음악>을 진행할 때에는 바로 저 산 뒤에 보일 모나코 몬테카를로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 마레크 야놉스키였다. 나는 가보지도 못한 모나코에 대해 들은풍월로 해설을 했고, 그때의 야놉스키는 스트라빈스키의 친구였던 에르네스트 앙세르메가 창단한 제네바의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가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끝으로 모든 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도 글 쓰는 일에 더 매진하기 위해서 11년 만에 라디오를 그만두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최고라지 않는가.
유럽에 와서 며칠 동안 골목길만 돌아다니다가 모처럼 탁 트인 대양을 마주하니 호연지기가 끓어오른다. 그런데 내려오는 길에 그만 다시 묘지행에 빠지고 만다. 우연히 지나친 묘지에 누가 묻혔나 검색했더니 가스통 르루라는 이름이 나온다. 아 누구더라, 다시 인터넷의 힘을 빌어야 했다. 우연찮게 《오페라의 유령》을 쓴 원작자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어섰는데, 또다시 ‘남산에서 이서방 찾기’이다. 다행히 묘지 관리하는 인부들이 있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철학자 묘지기를 떠올리며 한 사람에게 가스통 르루의 무덤을 물었다. 모르는 눈치이다. 그러면서 혹시 ‘니스 샤토 묘지’를 찾는 거냐고 묻는다. 알고 보니 내가 들어온 곳은 담을 두고 붙어 있는 ‘니스 유대인 묘지’였다. 안 되어 보였는지 아저씨는 나에게 ‘아스테릭스’를 아느냐고 묻는다. 그 프랑스 국민 만화 캐릭터의 작가 르네 고시니가 여기 묻혔다고 알려준다.
제라르 드 파르디외와 로베르토 베니니라는 두 배우가 실사영화로 만들었을 정도로 인기를 끈 만화 캐릭터. 국내에도 개봉해 꽤 흥행에 성공했다. 고시니는 아스테릭스 시리즈 외에 꼬마 니콜라라는 캐릭터의 작가이기도 하다.
나중에 안 일이나 니스 유대인 묘지에는 금세공사 알프레드 반 클리프의 묘지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몬테카를로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샤토 묘지로 건너갔다. 이번에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지만 오기가 발동해 묘지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결국 허탕이었다. 문을 나서는 순간 입구 바로 오른쪽에 가스통 르루의 무덤이 있다. 나는 남극 탐험대를 이끄는 아문센이나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이라도 된 것처럼 구글 지도에 표지를 세웠다. 르네 고시니나 가스통 를루 모두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를루는 가르니에 궁전의 미로와 같은 공간에 음악의 숨결을 불어넣었고, 고시니는 프랑스 역사 이야기를 고대 로마 시대까지 끌어올렸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그들의 문예창작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점에서 샤갈이나 스트라빈스키의 친구라 할 만하다.
언덕을 내려와 니스에서 마지막으로 돌아볼 라스카리스 궁전 악기 박물관으로 향했다. 니스의 귀족이었던 라스카리스 가문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실 이 악기 컬렉션은 19세기 니스의 성공한 사업가였던 앙투안 고티에의 유산이다. 그가 시에 남긴 악기들을 이 건물에 옮겨 전시한 것이다.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고티에의 살롱에는 음악이 그치질 않았다.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와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 외젠 이자이와 같은 당대의 명사가 살롱의 손님이었다. 고티에가 남긴 다양한 악기는 250여 점이나 된다. 방마다 악기군별로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팀파논’이라고 적힌 악기이다. 한눈에 보아도 현을 손가락으로 뜯거나 채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치타르 군에 속하는 악기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금이라고 부르고, 헝가리에서는 침발롬이라 한다. 바로 스트라빈스키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스위스에서 처음 듣고 자신의 차기작 <결혼>에 쓰려했던 악기이다.
류트와 하프 종류도 빼곡하다. 그리스에서 ‘리라’라고 부르던 악기이다. 아폴로와 오르페오, 다윗왕 등 모든 음유시인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하프이다.
스트라빈스키는 1928년과 1946년에 각각 <뮤즈를 거느린 아폴로>와 <오르페우스>라는 그리스풍 발레를 작곡했다. <뮤즈를 거느린 아폴로>는 미국의 음악 애호가이자 부호인 엘리자베스 스프러그 쿨리지 여사가 위촉한 것이었다. 그녀는 뒤에 애런 코플런드에게 <애팔래치아의 봄>이라는 발레도 쓰게 한다. <뮤즈를 거느린 아폴로>는 스트라빈스키가 만든 첫 ‘발레 블랑’, 곧 고전적인 스타일의 무용이었다. 여섯 파트로 엄격하게 나눈 현악기군이 그동안의 스트라빈스키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고대 그리스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발레의 파리 초연으로 스트라빈스키는 젊은 무용가 조지 발란신과 처음 호흡을 맞춘다. 이제 그가 댜길레프에 이어 스트라빈스키에게 날개를 달아줄 안무가이다.
<오르페우스>에는 주인공의 악기인 하프가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음악사상 첫 오페라로 꼽히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나 글루크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와 달리 스트라빈스키의 발레는 오비디우스의 원작을 충실하게 따랐다. 몬테베르디는 오르페우스를 승천하는 결말을 만들었고, 글루크는 아내를 되찾는 설정으로 만든 데 비해, 스트라빈스키는 슬픔에 목놓아 울던 오르페우스를 복수의 여신들이 갈가리 찢고, 아폴로가 그의 영혼을 거두는 새드엔딩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할리우드의 이웃이던 후배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스 나보코프(《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의 사촌동생이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에필로그는 마치 억누를 수 없는 욕망과 같이 들리네. 멈출 수 없는 뭔가 같아. 오르페우스는 죽었고, 그의 노래도 가버렸지만, 반주는 계속 남아 있네.
발레 <오르페오>의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한 사람은 일본계 미국인 에사무 노구치이다. 발란신이 창단한 뉴욕 시티 발레단은 노구치가 이 발레를 위해 고안한 하프를 오랫동안 자신들의 로고로 사용했다. 하프와 같이 간결한 스타일의 노구치 테이블은 아르누보에서 출발한 현대 디자인이 실생활과 결합했음을 보여준다. 코플런드의 <애팔래치아의 봄>을 위한 무대도 노구치의 작품이었다. 그는 또한 몇 시간 뒤에 만날 일본식 정원의 디자이너로도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나는 노구치를 통해 중요한 실마리를 끌어들일 수 있겠다. 코플런드는 <애팔래치아의 봄>에 미국 셰이커 교도들의 찬송가 ‘소박한 선물A simple gift’을 인용했다. 첨 들어도 금방 친숙해질 민요풍의 선율이다.
뒤에 시드니 카터라는 사람이 ‘춤의 제왕Lord of the dance’라는 가사를 이 곡조에 붙인다. 춤의 제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자신의 수난을 춤에 비교한 노래를 들려준다.
이 가사의 원전은 다시 영국의 오래된 크리스마스 캐럴 ‘내일은 내가 춤추는 날이 되리니Tomorrow Shall Be My Dancing Day’로 거슬러 올라간다.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직전 그리스도의 자조 섞인 심정을 유절로 노래하는 것이다. 여기에 곡조를 붙인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이다.
1952년, 그가 쇤베르크의 음렬 기법을 처음 시도한 음악 가운데 하나인 <칸타타>는 여러 가지 세속의 가사를 빌려와 썼다. 그 중심에 있는 노래가 ‘내일은 내가 춤추는 날이 되리니’이다. 그는 어쩌면 <카바레의 수난극>을 준비 중인 채플린에게 신호를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수난곡 다 준비되었소만!”
그러나 <라임라이트>를 마지막으로 채플린의 미국 생활은 끝났다. 1953년 채플린은 매카시 선동을 피해 스위스 브베로 이주했다.
만 하루 정도의 짧은 머무름이지만 니스의 이국적인 인상이 얼어붙은 겨울을 따스하게 했다. 스트라빈스키도 샤갈도 그런 점을 좋아했을 것이다. 오후에 나는 댜길레프가 죽은 뒤 발레 뤼스가 새로 정착한 모나코로 갈 것이다. 장 크리스토프 마요가 쇼스타코비치 음악에 붙인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