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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pr 15. 2019

몬테카를로와 세기의 커플들

베를리오즈와 마스네

프랑스를 미술의 나라라고 부르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은 어떠한가? 프랑스에게 음악은 어떤 것이었는지, 20세기에 이곳에 온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눈으로 살펴본다. 오페라 앞 아르날도 포모도로의 조각 엄지 위에 베를리오즈가 보인다.


몬테카를로가 모나코의 수도라는 생각은 틀렸다. 모나코 자체가 우리나라 동 하나 정도의 크기이고 몬테카를로는 그 중심지일 뿐이다. 모나코보다 작은 나라는 바티칸뿐인데, 바티칸은 유엔 가입국이 아니기에 유엔 회원국 중에서는 모나코가 제일 작다. 그런데도 니스에서 출발한 열차가 모나코역에 도착하자 휴대전화가 먹통이다. 로밍을 다시 설정해야 했다.


몬테카를로는 모나코의 네 개 행정 구역 가운데 하나이다. 그 안에 오페라와 카지노, 호텔이라는 이 나라의 3대 명소가 모두 들어 있다. 모나코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들은 대개 이 나라 출신이 아니다. 미국 배우로 대공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제일 앞에 설 것이다. 사실상 켈리가 아니면 오늘날의 모나코는 없을지 모른다. 할리우드 은막의 스타에서 홀연 모나코 대공인 레니에 3세에게 시집와 26년을 살다가 52세에 자동차를 몰던 중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는 삶 자체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켈리의 이야기를 하려면 오늘날 모나코의 성립을 들여다봐야 한다.


모나코에 카지노가 들어선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망통과 로퀴브륀이라는 두 지역이 모나코에 독립을 선언하면서 레몬을 비롯한 과일과 올리브기름에서 벌어들이던 세수(稅收)가 끊겼다. 플로레스탄 1세 대공의 아내 카롤린 대공비는 사업가 기질을 가진 여장부였다. 그녀의 주도로 독일 바트 홈부르크를 모델로 한 스파가 건설되었다. 독일 지명 가운데 바트가 붙은 곳은 모두 온천 휴양지이고, 온천장에는 늘 카지노가 따른다. 카지노는 비단 도박뿐만 아니라 연회와 무도회, 콘서트가 열리는, 오늘날로 치면 컨벤션 센터이다.


모나코에 카지노를 만든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지중해의 따뜻한 해안을 찾아 영국과 독일의 왕실과 귀족, 부호들이 몰려왔다. 덕분에 파탄 지경에 이른 나라가 일어섰다. 이들을 수용할 호텔과 여가를 즐기게 할 오페라가 필요했다. 몬테카를로의 3대 명소 카지노, 호텔, 오페라가 이렇게 완성된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는 모나코 오페라

뒤이어 국가사업을 운영할 회사 ‘모나코 해수욕과 외국인 클럽 협회’(Société des Bains de Mer et du Cercle des Étrangers à Monaco, 줄여서 SBM)가 설립되었다. 세 개의 주요 건물은 파리 오페라를 설계한 샤를 가르니에가 다시 맡아 지었다. 몬테카를로 오페라는 파리 가르니에 궁전의 동생뻘인 것이다.


1932년 발레 뤼스의 세르게이 댜길레프가 베네치아에서 57세 나이에 때 이른 죽음을 맞았다.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친구들은 충격을 받았다. 바실 대령과 르네 블룸은 몬테카를로에 발레 뤼스(Ballets Russes de Monte Carlo, 복수)를 재건했다. 이는 4년 뒤 해단했고 2년 뒤인 1938년 댜길레프의 안무가였던 레오니드 마신이 예술감독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Ballet Russes de Monte Carlo, 단수)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갔고, 이것이 뒷날 조지 발란신이 주축이 되는 미국 발레 역사의 시발이 된다.


모나코는 발란신을 미국으로 보냈지만, 한 세대 뒤에 미국에서 국모를 맞아들인다. 1953년 그리스의 선박 부호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SBM의 지분을 사들여 그 운영권을 얻는다. 오나시스는 전후 재정 파탄에 이른 영불독 3국의 관광객을 잃고 곤경에 처한 레니에 3세에게 미국 관광객을 불러 모을 묘안을 내놓는다. 당대 은막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그레이스 켈리가 그 역을 맡은 것이다. 켈리는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이던 1956년 모나코의 대공비가 되었고, 그녀는 오나시스의 연인 마리아 칼라스와 절친한 사이가 된다.

세기의 커플들. 추가하자면 케네디 부부

그 뒤로 모나코를 속국화 하려는 드골 대통령의 압박으로 오나시스와 레니에 3세가 결별하고, 오나시스가 당대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를 버리고 케네디 미망인과 결혼하는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 가운데

오늘날의 몬테카를로 발레단(Les Ballets de Monte Carlo)은 하노버 대공비인 카롤린이 작고한 어머니 그레이스 켈리의 뜻을 따라 1985년 창단했다. 1993년에 장 크리스토프 마요가 예술감독으로 부임해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이들의 <말괄량이 길들이기La Mégère apprivoisée>를 보기 위해 모나코에 왔다. 나는 발레단이 가르니에가 지은 오페라가 아닌 모나코 역에서 가장 먼 그리말디 포룸이라는 곳에서 열리는 사실에 조금 실망했다. 공연을 보고 니스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몬테카를로 오페라 앞에는 두 작곡가의 동상이 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천벌>이 1893년에 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원작자인 괴테처럼 베를리오즈 또한 《파우스트》를 무대에서 재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칸타타 형식으로나마 제대로 공연되기를 바라던 <파우스트의 천벌>이 마침내 몬테카를로에서 오페라로 최초 전막 공연되었던 것이다.

오페라 앞 베를리오즈 상
2015년 파리 오페라의 <파우스트 천벌>
극장 옆의 마스네 상

다음 세기 발레 뤼스가 파리에서 <불새>를 초연하기 직전인 1910년 2월 프랑스를 대표하는 원로 작곡가 마스네의 마지막 작품 <돈키호테>가 몬테카를로 무대에 올랐다. 러시아의 표도르 샬리아핀이 돈키호테를 불렀다. 샬리아핀은 스트라빈스키의 아버지 표도르를 잇는 러시아 베이스의 자존심이었고, 라흐마니노프의 절친한 친구였다.


<돈키호테>는 마스네가 극심한 류머티즘을 견디며 침대 위에서 마무리한 노작이다. 돈키호테의 매 순간이 마스네의 지나온 세월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풍차로 돌진하는 모습이 뭉클하고, 마지막 산초에게 그동안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섬을 물려주는 장면은 짠하다. 물론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섬이기 때문이다.

2010년 브뤼셀 라 모네 극장의 <돈 키호테>. 조세 반 담이 타이틀 롤을 빚냈다

두 작품으로 이 극장을 한순간 빛나게 한 작곡가들을 동상으로 기린 것이다. 세종문화회관 앞에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이 서 있다. 그러나 극장에서 이들을 기릴 합당한 작품을 나는 알지 못한다. 예술의 전당 앞에? 국적불명의 시계탑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밑으로 휑하게 터널만 지난다. 이것이 모나코와 우리의 차이이다.


세기말 모나코를 다스린 것은 알베르 1세와 그의 미국인 아내 앨리스 헤인(Alice Heine)이었다. 앨리스 공비는 유대계 프랑스인 은행가 미셸 엔(Michel Heine)의 딸이었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그의 사촌이었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성을 달리 발음했겠지만, 앨리스는 다시 모나코에 와서 엔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은행가 가풍을 물려받아 사업 수완이 좋았다. 그녀는 경제가 파탄에 이른 모나코를 일으키기 위해 나라를 문화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했고,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데르 3세의 추천을 받아 라울 귄스부르를 오페라 감독으로 초빙했다. 베를리오즈와 마스네의 오페라를 초연한 것이 바로 그가 한 일이었다. 귄스부르 뒤로 앨리스 공비가 손짓한 인물이 바로 발레 뤼스의 세르게이 댜길레프였다. 그리고 이때는 젊은 조르주 발랑신(George Balanchine)이 발레단에서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있었다. 원래 게오르기 발란치바제(Georgiy Melitonovich Balanchivadze)였던 그의 이름도 뒷날 조지 밸런친이 된다.

카를라 프라치가 로마 오페라 발레 단장 시절 부활시킨 발레 뤼스의 모대 가운데 <암사슴>

2018년 봄 예술의전당이 기획한 마리 로랑생 전(展)에서 하이라이트로 내세운 것이 프랑시스 풀랑크의 발레 <암사슴Les biches>이 몬테카를로에서 초연되었고, 샤넬의 라이벌이었던 마리 로랑셍이 무대를 디자인했다는 사실이었다. 서울 전시회에서는 말도 안 되게 몬테카를로를 스페인 도시라고 표기했다. 그러나 마리 로랑생이나 풀랑크의 <암사슴> 정도는 이제 이야기할 작품들에 비할 바가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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