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번스타인과 글렌 굴드
오르세 미술관 카페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가까운 앵발리드(Les Invalides)로 향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전쟁기념관이다. 영어로 인밸리드(invalid), 곧 환자라는 뜻에서 유추하듯이 원래 이곳은 부상병을 위한 병원이었다. 뒤에 가서 대성당이 들어서고 나폴레옹이 사후 안장되면서 전몰자들의 납골당을 겸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관을 보기 위해 굳이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니다. 1837년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1830년 혁명 희생자를 추모할 레퀴엠을 의뢰받았다. 스스로 그때까지 작곡한 최고의 음악이라고 생각한 그의 진혼곡이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아직 나폴레옹의 유해가 오기 3년 전의 일이다. 1975년, 베를리오즈와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챔피언인 미국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곳에서 역사적인 베를리오즈의 초연 무대를 재현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라디오 프랑스 합창단의 연합 무대가 장관을 이루었다. 나폴레옹의 관을 둘러싼 기둥 사이사이에 DVD로 본 그 장면이 생생하게 감돌았다.
러시아인들에게 나폴레옹은, 우리로 치자면 고구려에 쳐들어온 수양제나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 태종 홍타이지쯤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쿠투조프 원수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의 대군을 패퇴시켰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소설 장르의 금자탑으로 우뚝 세우는 소재가 되었다.
스트라빈스키의 후배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오페라 <전쟁과 평화> 또한 그의 작품 가운데 으뜸이다. 톨스토이와 쌍벽을 이루는 도스토옙스키의 《도박사》도 프로코피예프에 의해 오페라가 되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 두 문호,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와 별 연관을 찾기 어렵다. 이 또한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아버지는 도스토옙스키와 친했고, 함께 시 낭독회를 여는 사이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늘 노름빚에 쪼들리고 잘 씻지 않고 다니는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스트라빈스키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중 하나를 택하라면 후자라고 답했지만 그를 음악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만일 그런 능력과 기회가 있었더라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훨씬 심오한 주제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가령 채플린이 함께 ‘카바레의 수난극’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뭔가 의미 있는 결과가 나왔거나 최소한 ‘신성모독이다’는 답변보다는 나은 대꾸를 했을 것이다.
대신 스트라빈스키는 푸시킨을 좋아했다. <불새>도 그렇지만 오페라 <마브라>가 푸시킨의 《콜롬나의 작은 집》에 붙인 것이다.
오페라 대본을 쓴 보리스 코흐노는 당시 열일곱 살에 불과했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의 니진스키와 마찬가지로 코흐노도 댜길레프와 동성애 관계였으며, 그 이전에는 폴란드 작곡가 카롤 시마놉스키와, 이후에는 미국 뮤지컬 작곡가 콜 포터와 사귀었다. 코흐노는 댜길레프가 죽은 뒤 안무가 세르게이 리파르와 함께 발레 뤼스를 지키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뒤에 몬테카를로 발레단을 창단했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롤랑 프티와 더불어 샹젤리제 발레단을 만들기도 했다. 코흐노는 <마브라>의 대본을 조금씩 완성해 스트라빈스키에게 보냈다.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결과물과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젊고 아름다운 파라샤는 수를 놓으며 무심한 애인을 야속해한다. 이레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경기병 바실리는 그녀를 달랜다. 둘은 밀회를 약속하고 바실리는 돌아간다. 파라샤의 어머니는 귀여워하던 하녀가 죽은 것을 아쉬워하며 들어온다. 어머니는 딸에게 튼튼한 하녀를 하나 구해보라고 얘기하고 막 들어온 이웃 아낙 페트로브나와 수다를 떤다. 잠시 뒤 파라샤는 여장을 한 바실리를 데려와 하녀 ‘마브라’라고 소개한다. 마브라가 주는 대로 급료를 받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만족하고 당장에 채용한다. 어머니가 이웃사람과 나가자 바실리와 파라샤는 둘이 함께 살게 되었다며 얼싸안고 기뻐한다. 어머니가 돌아오는 기척에 딸은 하녀에게 일을 시킨다.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나가고 바실리는 이제 밤마다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고 신나서 노래한다. 그는 변장을 벗고 수염을 깎기 시작하는데 그만 그때 들어온 어머니에게 들키고 만다. 어머니는 도둑이 든 줄 알고 소리치다 기절하고 뒤따라 들어온 파라샤는 애인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나, 바실리는 창문 너머로 도망친다.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다시 도둑 잡으라고 외치고, 파라샤는 창밖으로 바실리를 외쳐 부른다.
<마브라> 또한 음반이나 영상이 많은 작품이 아니다. 그러나 유튜브에는 없는 게 없다. 파리 오페라에서 2001년 상연했던 것을 그리스 TV의 영상으로 올려둔 이가 있다.
무대는 바로 페르골레시나 도니체티의 희가극, 가령 <마님이 된 하녀>나 <사랑의 묘약> 같은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창문 너머로 도망치는 바실리의 모습은 역시 창문 너머로 사라지는 ‘장미의 정령’의 패러디 같지 않은가? 면도하는 여자라는 설정 또한 스트라빈스키 만년의 오페라 <탕아의 행각> 가운데 터키의 바바와 같다.
스트라빈스키는 파라샤의 아리아를 제일 먼저 작곡했고, 서곡을 마지막에 썼다. 이 시기의 다른 여러 작품과 마찬가지로 목관이 주로 사용되었다. 작곡이 끝난 뒤 댜길레프는 콘티넨털 호텔에서 시연회를 가졌다. 1922년 6월 3일 파리 오페라에서 정식 연주되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댜길레프는 연출자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문에 가수들은 그녀의 안무를 따르지 않았다. 또한 댜길레프는 늘 그랬듯이 이 작은 작품을 다른 큰 러시아 작품과 함께 공연했다. 폴란드 지휘자 그제고시 피텔베르크의 해석도 문제가 있었다. 평단은 실패를 단정했다.
스트라빈스키는 30분 남짓한 이 오페라를 푸시킨과 글린카, 차이콥스키에게 헌정했다. 모두 고인이었다. 특히 차이콥스키를 넣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러시아인이 아닌 친구들, 특히 프랑스의 작곡가들에게 또 다른 러시아 다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들은 차이콥스키를 감상적이고, 걸핏하면 눈물이나 자아내는 바보로 생각했다.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5인조의 동방 여행 가이드 같은 오리엔탈리즘이었다. 그는 러시아 음악 속에서 풍경을 걷어내고 싶었다. 그러한 풍경은 눈속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가진 우아함과 위트를 보여주고 싶었다. 의도는 일면 성공했다. 그가 좋아했던 사티가 이 작품을 칭찬했던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자서전을 보면 그가 <마브라>를 썼던 시기에 특별한 음악에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구노의 오페라 <필레몽과 보시Philémon et Baucis>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가운데 ‘필레몬과 바우키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쓴 작품이다.
필레몬과 바우키스는 가난한 노부부이다. 인간 세상의 동정을 살피러 온 주피터가 그의 집에 묵기를 청한다. 부부는 가진 것이 없지만 극진히 대접한다. 음식을 내오던 바우키스는 주피터가 집자마자 딱딱한 빵이 부드럽게 변하고, 술을 아무리 따라도 병이 비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신임을 알게 된다. 각박한 인심 속에 선하게 사는 부부에게 주피터가 상을 내리겠다고 하자, 이들은 그저 한날한시에 죽기를 소망한다. 주피터는 부부를 잠들게 한 뒤 밖으로 나와 사악한 나머지 인간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린다.
(간주곡) 오페라의 대본은 원작에 살을 붙인 라 퐁텐의 시를 바탕으로 2막을 이어간다. 페르 라 셰즈 묘지에 몰리에르와 나란히 안장된 우화작가이다.
잠에서 깬 노부부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그런데 주피터가 아름다운 바우키스를 보고 그릇된 욕망을 품는다. 못 말리는 주피터, 제버릇 개 못 준다. 바우키스도 주피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못 이기는 척 입맞춤을 한다. 이를 본 필레몬은 아내와 신을 원망하며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바우키스도 뒤늦게 후회하며 신에게 남편과 같은 소원을 청한다. 주피터는 화가 났지만 결국 이들을 용서하고 젊음의 선물을 되돌리지 않은 채 축복을 내린다.
나는 오래전 스트라빈스키의 자서전을 통해서 구노의 <필레몽과 보시>를 알았지만, 당시 이 곡을 들을 방법은 묘연했다. 애플 뮤직 서비스인 아이튠즈에도 전곡은 없지만, 몇 개의 노래와 이중창으로도 구노 음악의 서정미는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놀라운 발견을 했다. 2018년 2월 프랑스 투르 오페라가 이 곡을 상연하면서 유튜브에 예고편을 올린 것이다. 편집한 짧은 장면이나마 반가운 마음에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그리고 구노의 음악이 명백히 스트라빈스키의 <마브라>에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앵발리드 생 루이 예배당에 들어섰다. 나폴레옹의 육중한 관이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말안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트라빈스키의 라이벌이었던 쇤베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나폴레옹 찬가>를 썼다. 바이런의 시에 목소리와 피아노, 현악 사중주의 반주를 붙인 곡이다. 당시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는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의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선배 라흐마니노프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이 모두 비벌리 힐스 인근에서 전쟁을 피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번스타인이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을 연주한 앵발리드에서 굴렌 굴드가 좋아했던 쇤베르크의 <나폴레옹에게 부치는 찬가>를 떠올린다.
번스타인과 굴드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할 때 벌였던 대립은 유명하다. 엄청나게 느린 템포를 고집한 굴드에게 마지못해 맞춰준 번스타인은 연주를 마친 뒤 청중에게 자신의 해석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1960년 굴드와 번스타인 스트라빈스키가 TV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당시 굴드는 28세, 번스타인은 42세, 스트라빈스키는 78세였다. 실제로 세 사람의 신장이 세대 차이를 보여준다. 번스타인은 반올림해서 170센티미터, 스트라빈스키도 반올림해서 160센티미터의 단신이었지만 굴드는 180센티미터였다. 인터넷에서 구한 굴드의 여권에 보면 나와 있다. 하지만 사진에 보이는 키는 그 반대이다. 우연이었는지 누가 연출한 것인지, 스트라빈스키가 가장 우뚝하고 번스타인도 키 큰 굴드와 마주 본다.
번스타인이 스트라빈스키를 찬양하며 쇤베르크를 배격했다면, 굴드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소련을 찾은 굴드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강연할 때 연주한 것은 부르주아 형식주의 음악이라고 소비에트 당국이 금지했던 쇤베르크의 음악이었다.
이런 긴장 관계가 현대 음악사를 지탱해온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토마스 만이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장편 《파우스트 박사》의 내용이다. 여기서는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는 병사쯤이 아니라 12음 기법을 만든 작곡가가 악마와 영혼을 놓고 거래를 한다. 이 중요한 이야기 역시 스위스에 가서 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