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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pr 24. 2019

미륵불이 메시아가 아닐까

페르디난트 호들러의 발견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 스위스(라틴어로 헬베티아이다). 초콜릿과 하이디의 나라. 동화 같은 스위스에서 역사상 많은 위인이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그들이 알프스에서 받은 값진 영향과 도움을 살펴보기 위해 2017년 연말연시 열흘 동안의 꿈속으로 돌아간다. 섣달그믐에 바젤에 도착했다.


오렌지 주스가 뿜어 나오듯이 알프스 산정을 뚫고 나온 레망 호수의 햇살이 완전히 퍼졌을 무렵에야 호텔로 돌아와 곧장 체크아웃을 하고 바젤로 향한다. 로잔 가까이에 이번 여행 가운데 가장 중요한 브베가 있지만, H는 오늘 저녁 친구들과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송년을 보낼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가까운 바젤까지 배웅해주기로 했다.

HNM

H와 비올리스트 닐스 묀케마이어는 직전 시즌에 하이델베르크 필하모닉의 상주음악가로 활동한 인연으로 그곳 지휘자 엘리아스 그란디 부부와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 연말을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닐스는 이번 스위스 만남에 왜 자기는 빠졌냐며 투덜거리는 문자를 보낸다. 나도 하이델베르크로 오라고 성화이지만, 그러기에는 일정이 너무 빠듯하다.


바젤에 도착해 잠시 역에 짐을 맡긴 뒤 시내로 들어섰다. 대개의 스위스 도시들이 호수를 끼고 있는 데 비해 바젤은 라인강변에 세운 도시이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발원한 라인강은 가느다란 물줄기로 북쪽 보덴 호수까지 흘러갔다가 취리히 북쪽 샤프하우젠이라는 도시에서 라인폭포(Reinfall)로 장쾌한 물줄기를 뿜어낸다. 그곳에서 물을 불려 자연스레 스위스와 독일 국경을 이루었다가 이곳 바젤에 도착해 북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것이다. 바젤은 바다가 없는 스위스의 유일한 항구이자 북해까지 이르는 라인 운하의 시작과 끝이다. 또 바젤 기차역에는 스위스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의 기차가 함께 들어오고, 독일 기차만 오는 바젤 바트 역이 따로 있다.

아래에서 위로. 그 자체로 장관이다

뜻밖에 따뜻한 날씨에 두꺼운 겨울옷이 덥다. 엘리자베트 교회를 지나 옛 시가지에 접어드니 바젤 극장과 팅겔리 분수가 보인다. 조금 더 걸어서 바젤 음악대학 앞까지 이르렀다. 이곳에 스콜라 칸토룸 바실리엔시스(Schola Cantorum Basiliensis)라는 라틴어 이름의 학교가 있다. 1933년 파울 자허가 세운 고음악 전문 교육기관이다.


내가 바젤에 온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곳이 파울 자허의 거점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연말연시에 도시가 쉬지 않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공공시설은 크리스마스와 1월 1일은 무조건 쉰다. 경우에 따라서 12월 24일과 12월 31일도 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진행하는 방송 스케줄 때문에 휴일이 많이 끼여 있는 연말에 여행 계획을 세웠다. 원래도 하는 일이 없는 KBS가 가을에 시작한 파업이 해를 넘길 줄 알았다면 굳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빠듯한 일정이다 보니 하루가 아쉬웠는데, 바젤의 미술관들이 연말연시에도 계속 개방하는 것을 알았다. 바젤에 숙소를 잡고 나흘을 머물면서 인근 스위스 도시를 오가면 알차게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텅 빈 스콜라 칸토룸 바실리엔시스 교정

파울 자허는 1906년에 태어나 1999년에 세상을 떠난 스위스의 지휘자이자, 교육자, 음악 후원가였다. 그는 1926년에 바젤 체임버 오케스트라(Basler Kammerorchester)를 창단해 1987년까지 60년 이상 이끌었다. 현재 활동 중인 바젤 체임버 오케스트라(Kammerorchester Basel)는 1984년 창단한 세레나타 바젤이 이름을 바꾼 것으로 자허와는 무관하다. 자허는 당대 작곡가들에게 신작을 위촉했고 자신의 악단과 숱한 초연을 이끈 20세기 음악의 산파였다.


자허와 가장 돈독했던 작곡가는 벨라 버르토크였다. 버르토크는 1937년 <현과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을 시작으로 해서 1937년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 1939년 <현을 위한 디베르티멘토>를 차례로 자허의 악단을 위해 작곡했다. 스트라빈스키가 1946년에 자허의 위촉을 받고 쓴 D조의 협주곡도 일명 ‘바젤’로 불린다.


고음악 전문가인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2000년에 내놓은 음반이 탁월하다. 보후슬라프 마르티누의 <토카타와 두 개의 칸초네>, 아르튀르 오네게르의 교향곡 4번 ‘바젤의 기쁨’이 모두 악단의 창단 20주년을 기념해 위촉된 곡이기 때문이다. 자허의 사진은 흔치 않지만 나는 오래전 안네 조피 무터가 녹음한 스트라빈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 표지에서 그 얼굴을 보아 익히 알고 있다. 맨 왼쪽이 자허이다.

자허 - 무터 - 루토수압스키: 스트라빈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4악장 카프리치오

자허는 선배인 스트라빈스키나 버르토크에게 곡을 위촉해 스스로 이름을 높였고, 그 명성을 바탕으로 비톨드 루토수압스키, 피에르 불레즈, 한스 베르너 헨체와 같은 20세기 후반의 후배 작곡가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마치 댜길레프의 휘하에서 작업을 시작한 스트라빈스키가 다시 발란신이라는 후배를 자신의 추종자로 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이래로 훌륭하게 작동해온 일종의 멘토-멘티 시스템이다.


자허는 1973년 바젤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했고, 주요 작곡가들의 자필 악보를 수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스트라빈스키와 안톤 베베른의 작품들이다. 이를 통해 파울 자허 재단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자료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런 현대 음악의 업적과 나란히 20세기 고음악 운동의 거점이 될 스콜라 칸토룸 바실리엔시스를 불과 27세의 나이에 설립했으니 자허는 발레 뤼스를 창단한 댜길레프 못지않은 비전을 갖췄던 셈이다.


바젤 스콜라 칸토룸에서 아우구스트 벤칭거에게 비올라 다 감바를 배운 사람이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으로 유명한 조르디 사발이다. 가장 탁월한 이 학교 졸업생은 네덜란드의 건반 연주자이자 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였다. 르네 야콥스는 카운터테너로 활동하다가 지휘자가 되었다. 그의 후배 카운터 테너가 군계일학인 안드레아스 숄이다. 그 밖에도 이 학교에서 역사주의 연주를 익힌 음악가는 셀 수 없이 많다. 이들 덕분에 바로크 이전의 음악을 그 이후에 왜곡된 모습이 아니라 작곡 당대 모습에 가깝게 듣게 되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먼지가 걷히고 미켈란젤로가 그린 선명한 색채가 돌아온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허와 그의 재단은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일단은 H와 아쉬운 작별이다. 바젤 중심가인 바르퓌스플라츠(Barfüsserplatz)는 우리말로 하면 ‘맨발광장’이다. 맨발 교회 앞이라 그렇게 부른다. 교회 이름이 맨발이라면 프란체스코 성인이 떠오른다. 바로 청렴한 이 수도사와 그를 따르는 신도들 덕분에 붙은 이름이다. 맨발광장에 있는 갈색모자식당(Restaurant zum Braunen Mutz)에서 하크브라텐과 비너슈니첼로 점심을 먹었다. 떡갈비와 비프 커틀릿쯤일까? 유럽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처음 먹는 독일 음식이다. 제네바와 로잔과 달리 바젤은 독일어권 도시이다. H와는 4월에 서울에서 다시 보기로 했다.

박람회장 바젤월드

바젤에 무려 나흘 동안 머물 호텔은 유명한 바젤월드 바로 옆이다. 바젤 아트페어, 바젤 시계보석 박람회와 같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연중 북적이지만 이때만큼은 한산한 채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만이 뒤늦게 덩그마니 자리를 지킨다. 여장을 푼 내가 오후를 보낼 곳은 바젤 미술관(Kunstmuseum Basel)뿐이다. 뿐이라니! 부유한 스위스이니 만큼 걸작이 즐비하다. 런던이나 뉴욕, 파리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해도 다른 독일어권 대도시에 견줘 뒤지지 않는 컬렉션을 자랑한다.

그림이 뿜는 신비한 아우라는 사실 조명에 빚진 바 크다

시대순으로 관람을 시작했는데 한 전시실이 압도적이다. 르네상스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가 그린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모습이 나란히 걸려 있다. 문밖에서도 그 아우라에 정신이 혼미하다. 마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제일 위층 깊숙한 방에 따로 자리 잡은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같은 느낌이다. 그 방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이 많다. 빛이 새지 않지 않도록 가림막을 해놓았기 때문에 알고 들어가지 않으면 그 자태를 놓치고 만다. 그러나 일단 마주하면 말할 수 없는 분위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같은 방에 번갈아 전시되는 국보 제83호와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세상을 구원하러 올 미륵불은 곧 메시아의 다른 모습 아닌가

알브레히트 뒤러와 더불어 독일 근대회화의 막을 연 그뤼네발트의 <수난>과 알트도르퍼의 <부활>이 그러했다. 다른 방에 비해 오히려 이 방이 호젓한 것이 웬 횡재인가! 이것만으로도 오늘 구경은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덤이라는 생각은 너무 일렀다. 보물이 줄을 이었고 나는 또다시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바둥거리는 러시아 농부 바홈이 된 기분이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수난>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의 <부활>

한스 홀바인이 그린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은 이 미술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독일 화가였던 홀바인은 바젤에서 네덜란드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를 만난다. 홀바인은 그를 위해 《우신예찬》의 삽화를 그렸다. 썩은 가톨릭 교회, 나아가 인간 세상 전체를 조롱하는 계몽 서적이었다. 역설적으로 종교개혁은 화가와 조각가들의 일자리를 잠식했다.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뜻을 잘 표현한 홀바인을 바다 건너 영국의 토마스 모어에게 추천했다. 《유토피아》를 쓴 모어는 다시 그를 헨리 8세에게 보낸다. 때문에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뮈스와 토마스 모어 그리고 헨리 8세와 그의 부인들 초상은 아주 유명하다.

관 채로 공중부양

무엇보다 홀바인의 영국 시절 걸작으로 알려진 것은 <대사들>이다. 영국에 온 두 외국 사절의 초상인데, 그 주위에 온통 당대의 세계관을 압축해 보여주는 사물을 늘어놓는다. 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는 천문관측 기구나 루터의 찬송가 악보 따위가 가톨릭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의 상징물이다. 그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림 왼쪽 위에 숨겨진 그리스도상과 두 대사 앞에 놓인 일그러진 해골이다. 삶의 무상함과 절대자의 권능을 보여주는 홀바인의 수수께끼이다.

왼쪽 위 귀퉁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이 보인다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은 그보다 앞서 바젤에서 그린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놀랄 만큼 추레하다. 조금 전 알트도르퍼가 그린 성스러운 무덤에서 쏟아진 빛은 여기서 찾을 수 없다. 그저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일 뿐이다. 홀바인은 이 본연의 모습을 통해 부귀영화를 일삼던 가톨릭 교회를 고발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실제로 이 그림을 보고 발작에 이를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받는다. 그는 《백치》에서 선한 바보 므이시킨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이 그림을 보면 신앙이 깊은 사람도 흔들릴 수 있겠군.”

그리스도의 주검을 추레한 바디로 그린 홀바인의 용기가 대단하다

장 콕토가 일본 화물선에서 만난 채플린을 두고 한 말을 떠올려본다.

채플린이 자기가 쓰지 않은 작품에 연기자로 출연한다면 언젠가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므이시킨 대공을 맡길 바라자. 므이시킨 대공이야말로 그에게 맞춘 듯이 들어맞을 역할이 아니겠는가?

독자는 내가 음악을 잊고 엉뚱한 데에 정신이 팔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정말 그랬다면 나는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훨씬 장황하게 했을 터이나 지금 나는 정말 자제하고 있다.


300여 년 뒤에 홀바인의 그림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은 사람이 있다. 사실 나는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라는 화가의 이름을 이번 여행에서 처음 들었다. 25년 전 스위스에 왔을 때 세간티니라는 이름을 알았던 것만큼이나 값진 수확이었다. 베른 출신의 호들러는 세간티니와 더불어 스위스가 자랑하는 화가이다. 전날 제네바의 거리를 거닐 때 호들러 특별전 포스터를 여러 차례 보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쳤다. 미리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1875년 22세의 호들러는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그림을 보고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깊이 연구한다. 그의 사색은 깊이를 더해 아르누보와 상징주의가 주도하는 세기 전환기 풍토에서 독특한 화풍을 낳았다. 호들러는 이것을 스스로 ‘평행파parallelism’라고 불렀다. 그의 그림을 보면 왜 평행인지 짐작이 간다.

호들러의 수평구도
수직구도

고향 베른에 있는 호들러의 대표작 <선택받은 자>는 아이를 둘러싼 천사들이 수직을 이루어 엄숙한 제의의 분위기를 더한다. 이 선한 바보 같은 아이를 ‘소년 므이시킨’ 또는 ‘소년 파르지팔’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반면에 홀바인의 영향이 두드러지는 <밤>은 수평 구도이며 클림트의 그림을 예고하는 듯하다. 호들러의 작품 가운데 상당수에 해당하는 풍경화도 마찬가지이다.

알프스 산정 호수. 라인강의 수원은 이보다 개울에 가깝다

단 한 소절만 들어도 무슨 음악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눈에 익은 것이라면 한 조각만 떼어놓아도 누구의 그림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스타일’이다. 나는 호들러의 그림에서 내가 익숙한 다른 화가를 떠올렸다.

니콜라스 레리히(1874-1947)는 러시아 사람이다. 그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위해 디자인한 무대와 의상은 아주 유명하다. <봄의 제전>은 사실상 이 둘과 니진스키가 머리를 맞대고 작곡한 공동창작이다. 레리히의 그림은 많은 음반 커버에도 쓰였고, 지금도 오리지널 안무로 공연할 때면 대개 그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레리히의 무대를 사용한 <봄의 제전> 커버
레리히의 또 다른 무대 배경을 쓴 <봄의 제전>
위 배경으로 공연했던 초연의 무용수들

나는 레리히가 스위스에 와서 호들러를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의 이력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레리히의 그림 앞에 선 무용수들을 보면 영락없이 호들러의 그림에 나온 경치와 인물을 하나로 모은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그림에 모두 나오는 푸른색 호수와 녹색 산이 어우러진 풍경은 도대체 러시아인가 스위스인가? 스위스를 다녀간 도스토옙스키가 러시아에 돌아가 레리히에게 호들러의 그림에 대해 알려주기라도 했단 말인가?


<봄의 제전> 초연 사진에 찍힌 처녀들이 호들러의 천사 그림과 같은 여섯 명인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더욱이 호들러의 <선택받은 자>라는 그림 제목은 바로 <봄의 제전>의 마지막 희생 장면 제목과 같다. 풍요 제식에 바치기 위해 간택되는 처녀나 축복받은, 또는 험난한 앞길을 예고받는 소년의 모습은 매한가지이다.


나는 이날 이후로 빈터투어에서, 취리히에서, 스위스 가는 곳마다 멀리서도 페르디난트 호들러의 그림을 알아보았고, 반갑게 다가가 그 앞에서 <봄의 제전>이 재현되는 소리를 상상했다. 바젤 미술관에는 사실 이보다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인상파와 피카소 따위의 그림이 많았지만, 나에게 가장 큰 소득은 홀바인과 호들러였다. 저녁에 예매한 오페라를 위해 일단 호텔로 돌아왔다.


바젤에서 공연을 볼 계획은 딱히 없었다. 나는 그저 호텔에서 조용히 2017년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었지만 H가 오페라를 권했기에 예매한 것이다. 마침 공연 뒤에는 송년파티도 열린다. 나는 유럽을 여행할 때마다 로시니와 자주 마주친다. 하필이면 바젤 극장의 송년음악회도 <라 체네렌톨라>이다. ‘신데렐라’의 이탈리아판이다. 그러면 뭐 독일 오페라라도 기대했을까! 송년과 신년에는 독일에서도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나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를 준비하지 않는가. 짐짓 진지한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바젤 오페라의 로시니 <체네렌톨라>

바젤 극장의 <라 체네렌톨라>도, 작지만 탄탄한 스위스의 실력을 잘 보여준다. 대도시의 돈 많은 극장과 경쟁하려 들지 않고 알찬 예산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내보이는 것이 과연 스위스답다. 음악도 연극도 기대 이상이었다. 문제는 내가 로시니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비교적 음악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지만 그 안에서도 엄연히 서열은 있다. 로시니에서 시작한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는 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린다. 그런데 내가 유럽에서 가장 많이 본 오페라가 로시니이다.


벨칸토는 기본적으로 누가 작곡했느냐보다 누가 부르느냐가 중요한 예술이다. 곧 대중 예술이라는 뜻이다. 훌륭한 인프라와 오랜 전통을 갖춘 이탈리아 오페라 청중은 신작에 즉각 반응했고 작곡가는 늘 그 수준에 부합하는 작품을 양산했다. 딱 알맞은 달콤한 디저트 같은 것이 로시니요, 벨칸토이다.


프랑스나 러시아는 그런 이탈리아 스타일을 흠모했고, 독일은 궁색한 형편 탓에, 또는 진지한 취향 탓에 오페라를 꿈꾼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렇다, 독일은 늘 꿈을 꾼다.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독일 사람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뭔가를 기대하고 먼 뒷날에 가능한 것을 바라는 데 독일만한 나라는 없다. 오히려 나에게 익숙한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작곡해 놓고 초연 순서가 뒤로 밀리자 댜길레프와 함께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을 관람했다. 당시만 해도 이 곡을 바이로이트 밖에서 연주하면 안 된다는 바그너의 유지가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는 바그너 최후의 음악이 청중에게 강요하는 절대적인 복종을 참지 못했다. 의자에서 몸을 뒤틀 때마다 집중되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 연주 시간만큼 하염없는 막간의 지루함, 그때마다 주어지는 맥주와 소시지의 추억만을 간직한 채 바이로이트를 떠났다.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의 2017년 송년 음악회

반대로 나는 진저리 칠 정도로 달달한 로시니의 음악과 잘 빼입은 바젤 극장 정기회원권 소지 노인들, 그리고 막간에 넘실대는 샴페인 거품의 허영을 견디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밖에서는 폭죽이 오래도록 시끄러웠다. TV에서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가 ‘독일의 로시니’라 할 프란츠 레하르의 곡들을 가지고 흥청거린다. 독일군 장교 같은 틸레만과 레하르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일 아침 베드로 교회에서 들을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기대하며 2017년과 작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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