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준호 Apr 26. 2019

바젤의 백만장자와 어머니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와 <어머니의 연인>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 스위스(라틴어로 헬베티아이다). 초콜릿과 하이디의 나라. 동화 같은 스위스에서 역사상 많은 위인이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그들이 알프스에서 받은 값진 영향과 도움을 살펴보기 위해 2017년 연말연시 열흘 동안의 꿈속으로 돌아간다. 드디어 음악 같은 음악을 들었다.


2018년의 첫 날을 바젤에서 맞았다. 첫 행선지는 바젤 대학 앞에 있는 베드로 교회이다. ‘페터스키르헤’라는 독일 이름보다 왠지 베드로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정겹다. 바젤 대학 교수였던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프리드리히 니체가 이 앞을 숱하게 지났을 것이다. 아침 10시에 이곳에서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나흘째 공연이 열린다. 모두 여섯 개 칸타타를 하루씩 연주한다. 12월 25일부터 사흘 동안 세 곡을 연주했고, 1월 1일에 제4곡, 1월의 첫 일요일에 제5곡 그리고 다음 월요일인 주현절에 마지막 곡을 올린다. 제4곡은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베풀고 이름을 지은 날이라 한다.

여성 지휘자 다니엘라 돌치가 이끄는 무지카 피오리타. 처음 듣는 지방 악단이다. 그러나 바젤에서 고음악을 한다면 당연히 파울 자허가 세운 스콜라 칸토룸 바실리엔시스를 나왔을 것이다. 우리 고장에 세계 고음악의 본산이 있다니 음악가로서 얼마나 행운인가! 돌치의 약력을 보니 역시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에게 배웠다.

영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 가운데 바흐를 연기한 레온하르트.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의 카덴차

사실 그런 것은 다 필요 없다. 바젤 전례 찬송가로 예배를 시작했고, 성서 낭독과 바흐의 음악이 번갈았다. 시작 좀 전에 도착해 회랑에 겨우 자리를 잡은 나는 그야말로 엉엉 울면서 노래를 들었다. 네 번째 소프라노의 메아리 아리아가 나올 때에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구세주시여, 당신의 이름은
그 작은 씨앗에게까지 
그토록 강한 두려움을 불러오십니까?
아니,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이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나이까?
아니다, 달콤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기뻐해야 하나요?
그래, 구세주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

합창단의 소프라노가 솔로이스트 반대편에서 마치 동굴에서 되울리는 것처럼 ‘아니다’와 ‘그렇다’를 되받는 노래이다. 무지카 피오리타는 이 아이디어를 더욱 공들였다. 에코가 한 사람이 아니라 도처에 자리하고 온 교회가 강한 부정과 강한 긍정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쾰른 성모승천 성당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가운데 메아리 아리아

노래가 들리는 가운데 내 눈 앞에는 홀바인의 그림 속 추레한 그리스도가 일어나 수염 덥수룩한 도스토옙스키가 되었다가 다시 말끔한 므이시킨 대공이 되어 다가온다. 정작 나에게 미소 짓는 것은 훈훈한 찰리 채플린의 모습이다.

성찬의 전례

목사의 강론은 내 독일어 실력으로도 다 알아들을 만했다.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무슨 특별한 이야기가 필요할까?

평소와 달리 많은 신도와 함께 새해를 맞아 기쁩니다. (모두 웃음) 장벽 없는 언어인 바흐의 음악 때문이겠죠. 바흐와 더불어 제가 뭔가 얘기를 해야 한다니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

나머지는 전 세계에 어느 교회에서나 들을 수 있을 신년인사일 것이다. 

참된 신앙인이 되십시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바흐의 음악보다 더 중요한 예배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사제가 아닌 음악가가 주인공이다

나처럼 교회에 나가지 않는 현지인도 있을 것이고 또는 신앙심이 깊은 여행객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바젤 베드로 교회에 왔거나, 상하이 마제스틱 극장에서처럼 중간에 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젯밤 오페라처럼 실컷 잰 체하다가 결국에는 샴페인 취기에 조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것이 바로 문예학자 발터 벤야민이 말한 “바흐의 라이프치히 초연과 경쟁하는 지방 악단의 공연”(원래는 “괴테의 바이마르 공연과 경쟁하는”이다)인 것이다.


유럽에 와서 처음으로 음악다운 음악을 들은 나는 완전히 원기충전이 되었다. 팅겔리 박물관도 새해 첫날부터 문을 연다. 파리 퐁피두 센터 앞을 장식했던 스트라빈스키 분수, 그리고 이곳 바젤 극장 앞에 놓인 ‘바젤의 사육제Die basler Fasnacht’라는 제목의 분수가 모두 스위스 조각가 장 팅겔리의 작품이다. 파리 것은 팅겔리의 아내 니키 드 생팔의 발랄한 원색 조각을 얹었다는 점이 바젤과 다르다.


박물관 앞 잔디밭에 니키의 대표작인 <그웬돌린>이 자리한다. 빈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여성성을 강조한 니키의 작품은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만큼 널리 알려졌다. 중요한 것은 <그웬돌린> 뒤에 보이는 현대적인 건물이다. 제약회사 호프만 라 로슈의 사옥이다. 우리나라에도 합작회사가 들어와 있어 로슈라는 이름은 많이 알려졌다. 신종플루 치료제 타미플루 제조사가 바로 로슈이다.

스위스에서 드물게 보는 고층 건물이지만 그다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로슈탑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41층이나 되어 바젤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띈다. 이 세계적인 제약회사의 상속인이 바로 파울 자허였다. 자허는 생전에 세계 10대 부호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그 가운데 유일하게 본업이 기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이런 행운을 누렸을까? 나는 그 내력을 S형 덕분에 알게 되었다. 형은 내가 관심 있을 것 같다며 새 책을 하나 건넸다. 스위스 소설가 우르스 비트머의 《어머니의 연인》이라는 중편소설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세트인데 하나만 줬다. 실망이다

이 소설은 2000년 출간 당시 스위스에서 꽤 화제였다. 직전 해에 세상을 떠난 파울 자허가 제목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자허는 한 여인의 삶에 치명상을 입힌 무정한 예술가로 묘사된다. 비트머는 이 자전적인 책을 마치 자허가 죽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작고하자마자 내놓은 것이다. 비트머 또한 2014년에 세상을 떠난 터라 이제는 이 책이 얼마나 사실이고 얼마나 지어낸 이야기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비트머의 어머니, 곧 소설의 여주인공은 성공한 기업가의 딸이었다. 클라라 몰리나리가 그녀의 이름이다. 이탈리아 성에서 짐작하듯이 그녀의 아버지는 북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와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떠나보낸 클라라는 엄격한 가부장 질서를 용케 버티며 성년이 된다. 어느 날 그녀는 가난한 지역 음악가 에트빈이 막 창단한 오케스트라의 스텝으로 힘을 보탠다. 그녀의 꼼꼼한 살림살이 덕분에 현대음악 연주를 모토로 하는 그 악단과 지휘자는 점차 이름을 알렸다. 그러던 중 대공황의 여파로 아버지가 중역으로 있던 회사가 파산하면서 클라라의 삶도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녀는 충격으로 사망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문상 온 아버지의 피붙이들을 처음 만난다.

클라라는 살던 집으로 빚잔치를 한다. 반대로 그녀 덕에 형편이 핀 지휘자는 새 집을 샀고, 클라라는 비어 있는 그의 옛 하숙방으로 들어간다. 클라라는 장례식에 와준 아버지의 형제와 사촌들을 방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아버지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도모도솔라를 방문한다. 대대로 알프스를 넘나드는 짐꾼이었던 집안은 할아버지가 죽으며 남긴 평생의 저축으로 인근 척박한 포도밭을 샀다. 열심히 일한 덕에 그들은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지역 유지가 되었다. 고아인 클라라는 환대받았고 난생 처음 가족의 따뜻한 정을 느끼고 돌아왔다.

악단은 더욱 승승장구했고 그녀는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살림꾼이었다. 에트빈은 그녀의 집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그녀를 욕망의 배출구로 삼았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폭력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사랑으로 여겼다. 클라라가 임신을 하자 에트빈은 상황이 여의칠 않으니 낙태하라고 권한다. 그녀는 묵묵히 따랐다. 에트빈의 악단은 헝가리의 거장 벨라 버르토크 부부를 초대해 연주를 가질 정도로 성장했다. 대가 부부를 수행하며 살뜰히 챙긴 사람도 클라라였다.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로 며칠 여행을 다녀오라는 에트빈의 권유에 기분전환 차 응한 그녀는 돌아와 충격을 받는다. 그 사이 에트빈이 기계공장의 유일한 상속녀와 결혼한 것이다. 에트빈은 결혼식 동안 클라라를 떼어놓기 위해 일부러 여행을 권한 것이다.

클라라도 이내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지런히 집안을 돌봤다. 언제든 찾아오라던 도모도솔라에 다시 간 그녀는 무솔리니를 접대하느라 자신을 짐짝 취급한 친척들에게 상처 받는다.

돌아온 그녀는 점차 제정신을 잃는 때가 많아졌다. 두 번째로 버르토크가 악단을 찾았을 때 그는 에트빈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그들 사이에서 클라라는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 결국 에트빈을 향한 집착 끝에 그녀는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하고, 정신병원을 드나든다.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도모도솔라의 와이너리도 망했고, 버르토크도 쓸쓸한 최후를 맞았지만, 에트빈은 오히려 허약한 중소기업을 집어삼키는 사업수완으로 더욱 부자가 되었다. 클라라는 정상과 망상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잡고 살던 끝에 요양원에서 투신해 한 많은 팔십 평생을 스스로 마감한다.

클라라의 아들, 곧 필자는 만년에 박물관에서 만난 에트빈에게 어머니를 왜 그렇게 대했는지 따지지만 돌아온 반응은 오히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것이었다. 소설의 끝은 다음과 같다.

“얼마 후 나는 몇 시간 동안 텔레비전 앞에 앉아 에트빈의 죽음을 추모하는 특별방송을 보았다. (...) 나는 버르토크와 함께한 에트빈, 스트라빈스키와 함께한 에트빈, 영국의 젊은 여왕과 함께한 에트빈을 보았다. 그리고 카메라가 시립 홀의 청중을 훑을 때 2층 관람석의 한가운데에서 멀리, 아주 잠깐, 나의 어머니일 것 같은 그림자를 보았다.”

이상이 《어머니의 연인》의 줄거리이다. 다시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가 떠오른다. 한 엄마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도중 아이를 잃어버린다. 그녀는 아이를 평생 찾아 헤맨다. 결국 그녀는 정신병원으로 가고 만다. 클라라처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적 같이 장성한 아들을 찾는다. 아니 아들이 엄마를 찾은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한 맺힌 사람과 사람들이 라벨의 <볼레로>에 맞춘 베자르 발레단의 춤으로 한 맺힌 응어리를 푼다.

클라라에게도 누군가 그런 예술의 손길을 내밀었어야 했다. 에트빈(파울 자허)이 아니라면 아들(우르스 비트머)이라도 그런 기회를 가졌어야 했다. 못내 아쉬운 결말이다.


소설에서 에트빈이 상속한 기계회사로 묘사된 것이 바로 저 니키 드 생팔의 <그웬돌린> 뒤로 보이는, 자허가 처가를 통해 상속한 호프만 라로슈이다. 그리고 라인 강변 바젤 대성당 바로 옆에 파울 자허 재단이 있다. 바젤의 다른 곳이 연말연시에 모두 문을 열어 이 도시에 나흘이나 묵게 되었지만, 파울 자허 재단은 1월 5일까지 쉰다. 팅겔리 미술관에서 여전히 전위로 보이는 설치미술들을 보고 친절한 미술관 레스토랑에서 훌륭한 점심을 먹은 뒤에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에 루체른에서 열리는 신년 음악회를 예약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륵불이 메시아가 아닐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