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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y 03. 2019

루체른 신년 음악회의 천사들

KKL의 조지 거슈윈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 스위스(라틴어로 헬베티아이다). 초콜릿과 하이디의 나라. 동화 같은 스위스에서 역사상 많은 위인이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그들이 알프스에서 받은 값진 영향과 도움을 살펴보기 위해 2017년 연말연시 열흘 동안의 꿈속으로 돌아간다. 거슈윈과 함께 2018년을!


전날 송년 음악회에 이어 신년 음악회까지, 나는 서울에서도 하지 않던 일을 이곳에 와서 하고 있다. 내가 콘서트에 가지 않는 이유는 감동받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예매하지 않아도 초대권을 얻을 수 있으니 설렘이 없다. 덕분에 딱히 반갑지 않은 사람들과 섞여 각종 소음과 무례를 참아야 한다. 나 또한 부동자세로 한두 시간을 견디기 점점 힘들다. 때론 무성의한 연주까지 인내해야 한다. 반면에 집에는 아직 듣지도 읽지도 보지도 못한 자료가 너무 많다. 남은 시간을 두고 콘서트에 가는 것과, 가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을 양팔 저울에 올려봤을 때 콘서트는 내게 사치요 낭비이다. 언젠가부터 공연장이나 악단, 연주자 모두 한 번 보았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이해에 우리나라를 찾았던 음악가들이다

루체른 컬처 앤드 콩그레스 센터, 독일어 약어로 KKL(Kultur- und Kongresszentrum Luzern)이라고 부르는 음악당이다. 장 누벨의 설계로 완공되어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개관 공연을 했던 것이 벌써 20년 전이다. 그동안 루체른 음악제의 안방으로 숱한 명연의 산실이 되었지만, 나는 그동안 직접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밖에서 건물만 보거나 DVD로만 연주를 들었던 홀 안에서 2018 신년 음악회를 마주하는 것이다.

2013년 마지막으로 KKL 무대에 섰던 클라우디오 아바도. 로베르토 베니니와 브루노 간츠가 보인다.

바젤에서 기차를 타면 1시간 만에 루체른에 도착하면 KKL은 기차역과 바로 붙어 있다. 광화문에서 예술의전당 가는 시간이나 비슷하다. 제임스 개피건이 지휘하는 루체른 심포니와 피아니스트 니콜라스 에인절리치 그리고 소프라노 에인절 블루가 마련한 거슈윈 콘서트는 내가 유럽에 와서 처음으로 하나도 졸지 않고 본 공연이었다.


조지 거슈윈은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유대계 리투아니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뉴요커였다. 아버지의 성은 게르쇼비츠였다. 조지와 그의 형 아이라는 동유럽 유대 말을 쓰는 이디시 극장에서 보리스 토마솁스키와 일했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인 마이클 틸슨 토머스의 할아버지이다. 캐럴송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유명한 작곡가 어빙 벌린, 당대의 명배우 에드워드 G. 로빈슨이 모두 토마솁스키의 극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이디시 극장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뿌리임을 보여주는 BBC 다큐멘터리

특히 로빈슨은 뒷날 채플린과 거슈윈, 스트라빈스키의 다리를 놓는다. 앞서 말한 ‘카바레의 십자가형’ 시나리오가 거론된 것이 바로 로빈슨의 식탁이었다. 또 스트라빈스키에게 할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은 채플린의 제안은 진지하지 않은 것이고 언제건 변덕스럽게 바뀔 수 있으니 중요하게 여길 필요 없다고 말한 사람도 로빈슨이었다. 과연 그랬을까? 나는 콕토가 중재했더라면 달랐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김연아가 밴쿠버 올림픽에서 사용했던 거슈윈의 피아노 협주곡 F장조는 뉴욕 필하모닉 콘서트 실황 시그널로도 익숙하다. 이 곡이 깔리고 뒤에 영화배우 알렉 볼드윈이 호스트로 등장한다. 우리로 치면 안성기가 서울시향 해설을 맡는 격이랄까? 내가 매년 모아서 라디오에서 소개했던 실황이다. 루체른 심포니의 독주자는 니컬러스 에인절리치. 미국 태생으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는 중견 피아니스트이고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도 협연했다. 이제는 머리숱이 많이 줄어든 내 또래이다.

전반은 관현악, 후반은 리사이틀, 천사 남매

이날 공연은 루체른 심포니의 연주 외에 에인절리치와 소프라노 에인절 블루가 리사이틀을 함께 가졌다. 에인절리치와 에인절 블루. 한 사람은 적어도 이름은 천사다운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푸른 천사이다. <푸른 천사>는 20세기 초 독일을 대표하는 배우이자 보컬리스트 마를렌 디트리히가 주연한 표현주의 걸작 영화이다. 독일의 사라 베르나르라고 할까!

디트리히가 노래할 때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을 것이다!

미국 소프라노 에인절 블루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차세대 레온틴 프라이스”라고 치켜세운 유망주이다. 흑인 여성 성악가 가운데 최고라는 뜻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영혼이 풍부한 재즈 덕에 루체른의 신년 음악회가 뉴욕의 송년 음악회 같은 기분이다. 사이키델릭 조명까지 곁들이니 카네기홀 같다.

2011년 시애틀 오페라에서 <포기와 베스>에 출연한 에인절 블루

거슈윈이 채 마흔이 되기 전에 갑자기 죽지 않았더라면 미국 음악은 훨씬 풍요로웠을 것이다. 그가 잠시 라벨에게 배우기 위해 유럽에 갔을 때 라벨이 한 충고는 유명하다.

“왜 이류 라벨이 되려 하는가, 이미 일류 거슈윈인 것을!”

당대 파리 최고의 음악 교육자였던 나디아 불랑제도 거슈윈에게 자기 음악을 하라고 조언했다. 불랑제는 어머니가 러시아인이었기에 그녀의 살롱에 많은 러시아인들이 드나들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녀의 주빈이 바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그의 친구인 시인 폴 발레리였다. 불랑제 만년의 제자가 지휘자 존 엘리엇 가드너이다. 그는 스무 살 무렵에 <오이디푸스 왕>의 악보를 처음 보고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아마도 불랑제의 서재가 아니었을까?

피아노에 앉은 사람이 라벨, 오른쪽 끝이 거슈윈

개피건과 그의 루체른 악단은 6월에 다시 한국을 찾아 호평을 듣고 갔다. 10년 전 처음 내가 라디오에서 소개할 때는 인터넷에 약력조차 없던 마이클 틸슨 토머스의 부지휘자였다. 그가 아는 거슈윈에 대한 모든 것은 틸슨 토머스가 할아버지 토마솁스키에게 들은 것이리라. 콘서트홀 옥상에서 내려다본 피어발트슈테터 호숫가의 풍경 또한 동심에 젖어들게 한다. 스케이트 타는 어린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본다. 마리, 마리! 아무도 보지 않겠지만.

5시에 시작한 신년 음악회가 7시 반에 마쳤고, 9시 전에 바젤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아, 그나저나 애증의 파울 자허를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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