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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un 03. 2019

마의 산, 다보스에 도착하다

키르히너와 토마스 만의 요양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 스위스(라틴어로 헬베티아이다). 초콜릿과 하이디의 나라. 동화 같은 스위스에서 역사상 많은 위인이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그들이 알프스에서 받은 값진 영향과 도움을 살펴보기 위해 2017년 연말연시 열흘 동안의 꿈속으로 돌아간다. 폭풍 때문에 철도가 마비되어 향하게 된 다보스...


빈터투어 시립 미술관을 나와 역으로 향한다. 한국 여행객들이 스위스에 머무는 시간이 평균 하루가 되지 않는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나라는 작은데 물가는 유럽에서 가장 비싸니 그냥 반나절이나 당일 코스로 스쳐간다는 얘기이다. 그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은 인터라켄이나 체르마트 같은 유명한 산간이다. 빙하특급은 천정까지 유리로 된 열차도 있어서 사철 알프스의 놀라운 장관을 체험할 수 있다.

이 영화사 최대의 히트작은 <타이태닉>이고 그 뒤를 <트랜스포머>와 <미션 임파서블>이 따르나, 나는 <인터스텔라>를 최고로 친다. 글 마지막에 이유가 나온다.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로고로 유명한 체르마트에서 동계 올림픽을 두 번(1928, 1948)이나 치른 장크트 모리츠까지 운행하니 인기가 없을 수 없다. 북쪽에서 내려온 내가 코스 전체를 타는 것은 좀 지루한 일이다. 후어(Chur)에서 장크트 모리츠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코스면 충분했다. 빙하특급의 또 다른 코스는 다보스로 갈라지는 루트였다. 다보스 포럼으로 유명한 바로 그곳이다. 사실 나는 이번 스위스 여행 내내 다보스를 꿈꿨다. 

나는 맨 위 취리히 인근의 빈터투어에서 후어(Chur)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후어에 도착했더니 빙하특급은 불통이라는 것이다. 이 또한 어제 닥친 폭풍의 여파이다. 워낙에 드문 일이라 시계처럼 정확한 스위스 철도 당국도 적시에 대응하지 못한 듯했다. 돌아가야 했을까? 나는 천우신조라고 생각했다. 후어에서 다보스까지는 일반 열차가 운행한다. 당일치기 빙하특급 대신 1박 2일 다보스행을 감행했다.


왜 다보스이냐고? 빌 게이츠라도 만나고 싶었을까? 세계경제포럼(WEF)은 1월 말에 열리니 아직 멀었다. 이곳이 바로 토마스 만이 쓴 《마의 산》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음악 칼럼니스트 정준호에게 가장 중요한 작가 셋을 꼽으라면 셰익스피어, 괴테, 토마스 만을 들겠다. 나는 토마스 만을 통해 바그너와 니체에 더욱 가까워졌다. 그의 소설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놀라운 사고의 폭에 압도되곤 했다. 빅토르 위고나 찰스 디킨스가 뜨거운 눈물을 흐르게 하고,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가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면 토마스 만은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까! 나는 지체 없이 다보스행 기차에 올랐다. 스트라빈스키는 잠시 잊어도 좋다. 사실 잊긴커녕 더 깊숙이 들어갈 판이다. 차창 밖으로 호들러가 보였다.

이런 풍경을 보면 호들러의 풍경화가 진경산수임을 알게 된다

후어에서 다보스까지는 멀지 않지만 첩첩산중인 데다가 눈사태를 막기 위해 서행해야 하기에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해가 지기 전에 키르히너 미술관을 먼저 찾았다. 나는 평소 표현주의 미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많은 작품을 접하고는 선입견이었음을 알았다. 미술관은 키르히너의 상세한 이력 안내문을 비치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는 188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스트라빈스키보다 두 살 많고, 토마스 만보다는 다섯 살 어리다. 드레스덴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 1905년 동료들과 다리파를 창설한다. 1913년 동인들 사이의 다툼으로 키르히너가 다리파를 탈퇴하면서 모임은 해체된다.


1914년 키르히너는 삶의 전환점을 맞는다. 예나 미술 협회에서 철학자 에버하르트 그리제바흐를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된다. 앞서 다보스를 방문했다가 요양병원 원장 루치우스 슈펭글러의 딸 로테와 결혼했던 그리제바흐는 장모 헬렌 슈펭글러에게 키르히너라는 화가를 만난 기쁨을 편지로 알렸다.

대략 이런 분들이 활약하셨던 WW1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는 키르히너도 피할 수 없었고, 그는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한 상태였음에도 자의 반 타의 반 입대한다. 군대에서 건강이 악화된 키르히너는 요양병원에서 치료받으며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1917년 그리제바흐는 장모에게 키르히너를 다보스로 초대하라고 권했다. 다보스에 왔다가 호들러의 그림을 보고 반한 키르히너는 아예 짐을 정리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 분도 상당히 닮았지만 한 분은 WW1에 직접 참전하신 모리스 라벨, 다른 분은 베트남전에 끌려간 사슴 사냥꾼 로버트 드니로 분이다
라벨이 WW1에서 전사한 동료들을 위해 쓴 모음곡 <쿠프랭의 무덤>
<쿠프랭의 무덤> 여섯 곡 가운데 네 곡을 추려 관현악으로 편곡

이런 인연으로 키르히너는 자신의 가장 왕성한 창작기 대부분을 다보스에서 보냈고,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키르히너가 그린 <다보스의 여름>은 마치 마법의 공간과 같았다. 웨스 앤더슨의 감각적인 영화 <부다페스트 그랜드 호텔>을 위한 포스터 같다고나 할까.

키르히너의 <다보스의 여름>
오시포프 발랄라이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카마린스카야'가 기막히게 어울리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사운드트랙 (뭔 소리냐!)

키르히너의 생애에 스트라빈스키와 토마스 만이 모두 겹친다. 스트라빈스키의 가족은 평생 폐병과 싸웠다. 스트라빈스키가 프랑스와 스위스 시절의 많은 시간을 알프스 휴양지에서 보낸 까닭도 그 때문이다. 도시의 비위생적인 환경을 떠나 맑고 건조한 공기를 찾아 알프스 산지 요양소로 간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결국 첫 아내와 큰 딸을 폐병으로 잃었고, 자기 자신도 같은 시기 다섯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토마스 만은 키르히너가 다보스에 오기 직전인 1912년에 폐렴을 치료 중인 아내를 문병 차 이곳에 왔다. 3주 동안의 체류가 《마의 산》을 쓰는 밑거름이 되었다.


키르히너를 초대했던 그리제바흐는 신학자 카를 바르트와 함께 변증법적 신학을 주창한 사람이고,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과 평생 교제했을 만큼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만일 내가 키르히너를 비롯한 표현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같은 시기 스트라빈스키가 쓴 <봄의 제전>과 비슷한 느낌이라는 이야기를 꺼낸다면, 여러분도 곧바로 뵐플린의 생각과 마주할 수 있다. 그의 대표 저작 《미술사의 기초 개념》이 말하는 주제가 바로 “어떤 예술도 당대의 보는 눈을 넘어설 수 없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키르히너나 스트라빈스키나 모두 다른 어느 행성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뵐플린은 바젤 대학에서 야콥 부르크하르트(1천 스위스 프랑 지폐의 주인공)에게 배웠다. 내가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듣고 감동했던 바젤 베드로 교회 앞의 캠퍼스가 그들의 무대였던 것이다. 그런 뵐플린이 그리제바흐의 안목을 높여주었다. 그리제바흐의 장인인 폐질환 전문의 루치우스 슈펭글러가 바로 《마의 산》에 나오는 요양원장 베렌스의 모델이다.


예상은 했지만 나는 다보스에서 유일하게 스키가 없는 사람이었다. 눈은 많았지만 역시 이상 기온 탓에 곳곳이 질척거렸다. 산간이라 이미 해는 졌고 나는 가까운 호텔을 잡았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온 몸에  잔뜩 힘을 주었던 터라 근육이 긴장했다. 설상가상 마의 산에 홀린 듯이 큰길 하나뿐인 다보스에서 방향을 거꾸로 가는 탓에 30여 분을 헤매고 나니, 초저녁이지만 눕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었다. 긴 밤을 《마의 산》의 주인공들처럼 보내게 되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담요로 몸을 돌돌 만 채 옥외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나는 따뜻한 욕조가 더 좋을 것 같다.

이 집이 아니라...

다음 날 아침, 소설의 배경인 요양원을 찾으려고 호텔 직원에게 물었다. 바로 앞에 있는 큰 병원이 요양원인지? 그렇지 않고, 요양원은 지금 호텔이 되었다고 한다. 발트 호텔(Waldhotel)! 이럴 수가, 그런 줄 알았다면 그 호텔에 묵었을 텐데! 미리 예습을 하지 않은 결과가 참 가혹했다.

이 집이다...

커피라도 한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발트호텔로 향했다.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있는 호텔 입구에 “마의 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오전 9시가 넘었지만 꼭두새벽 같은 산간마을

반갑고 아쉬운 마음에 걸음이 빨라진다. 사실 《마의 산》에 등장하는 요양원의 정통성은 여럿이 나눠 가지고 있다. 토마스 만의 아내가 치료받은 곳은 지금 내가 가는 발트호텔이지만, 소설에 나오는 곳은 샤츠알프의 베르크호텔이다. 키르히너의 주치의 슈펭글러 박사가 있던 곳이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묶은 방으로 재현해 둔 전시룸
당대 요양원의 집기들

그래서인지 발트호텔은 애써 카티아 만이 요양했던 방을 그대로 재현해 공개했다. 직원은 아침부터 투숙객도 아닌 동양 남자가 토마스 만을 찾는 것에 귀찮을 법도 했지만, 친절하게 안내했다. 호텔 곳곳에 《마의 산》의 자취가 배어 있었다. 스키를 신은 토마스 만과 헤르만 헤세의 사진이 반갑다.

이장님들 같네
클라브디아 쇼샤 부인이 문을 쾅 닫고 드나들던 식당

왜 스트라빈스키를 버리고 ‘마의 산’으로 가버렸느냐고? 버리지 않았다. 나는 평소 모든 역사를 100년으로 한정 짓는다. 무슨 얘기냐 하면, 예를 들어 1875년에 태어난 토마스 만이나 1882년에 태어난 스트라빈스키에서 앞의 18○○은 떼어버린다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75년생이고, 스트라빈스키는 82년생이다. 같은 식으로 클로드 드뷔시(1862-1918)는 올해 세상을 떠났고, 브람스(1833-1897)는 15년 뒤에 태어난다. 나와 동갑인 세르게이 댜길레프(1872-1929)는 벌써 5년 전에 <봄의 제전>을 파리 무대에 올렸고 10년 뒤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역시 한 해에 태어난 알렉산데르 스크랴빈은 3년 전에 죽었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베토벤이 <장엄미사>를 완성한 해(1823)에 라이프치히에 부임해서(1723), 베토벤이 죽던 해(1827)에 <마태 수난곡>을 초연했다.


이렇게 역사를 100년 안에 뭉뚱그리는 셈법으로 내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생각해 보라. 불과 몇 년 뒤에 <장엄미사> 그리고 <마태수난곡>이 초연된다니, 설레지 아니한가! 윌리엄 호가스와 파벨 페도토프가 스트라빈스키와 나란히 앉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만든 17세기 신분상승 풍자 영화 <배리 린든>을 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마 요절복통 배꼽을 잡고 웃을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풍자 영화 <배리 린든>의 한 장면
큐브릭에게 영감을 주었을 윌리엄 호가스의 풍속화. 사실 김홍도 신윤복이나 매한가지이다

토마스 만도 그랬다. 그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라는 대작에서 이런 통찰을 보여준다. 깊고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얼마나 깊은지조차 헤아릴 수 없고, 바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시커먼 우물 속 깊이가 무한대라면 100미터 아래이거나 1킬로미터 아래이거나 결국은 입구 언저리임에는 매한가지이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말하지 않는가. 우주 달력을 놓고 보면 인간의 역사는 섣달그믐 날 마지막 수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수억 년을 놓고 볼 때 몇 천 년 정도 안에 일어난 사건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고, 우주 역사, 아니 지구의 역사로만 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만은 이런 시간관념을 토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삼대가 실제로는 시간상 훨씬 떨어진 조손 사이이거나, 어쩌면 셋이 아닌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추론에 이른다. 실로 장엄한 구라가 아닌가!

장엄한 구라를 과학적 상상력으로 버무린 <인터스텔라>. 파라마운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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