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형제들
아들리콘의 뷔히 부부는 20년 전부터 취리히를 떠나 시부모가 살던 전원주택에서 그야말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주위에 키우는 과실나무만 가지고도 일이 끊이질 않는다.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거기에서 10분만 나가면 엄청난 침엽수림이 숨 쉬는 곳이다. 2007년, 2014년, 2017년에 이어 연달아 2018년 연초부터 네 번째 아들리콘을 찾았다. 모처럼 와인을 각 1병씩 마시고 묵은 여독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나는 전날 얼마나 대단한 폭풍이 내 머리 위를 지나갔는지 알았다. 뉴스에는 서유럽을 덮친 겨울 폭풍에 대해 특보가 이어진다. 우리나라였다면 밖에 나가지 않았을 날씨였다. 물론 이곳에서도 기상이변이었기 때문에 뜻밖의 사고가 속출했다. 내가 바젤 뮌스터 광장에서 바람에 날리는 트리 부속품에 맞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콜마르에 가는 기차가 완전히 불통이 된 것도, 바젤에서 샤프하우젠으로 오는 기차가 연착한 것도 모두 같은 이유이다. 집을 나온 지 보름 가까이 되기도 했고, 갑자기 일정이 바뀌기도 했기에 나는 오늘 하루를 완전히 쉬기로 했다. 오전 잠을 더 청했다.
다음 날, 계획이 섰다. 일단 가까운 빈터투어(Winterthur)로 가서 구경한 뒤에 빙하 열차를 타기로 했다. 열차 정기권인 스위스 패스를 끊어 왔는데 라뮈즈 지폐 값(200프랑)을 하려면 어디라도 가야 했기 때문이다. 빙하 열차를 타고 왕복하면 설원은 원 없이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빈터투어는 중요한 곳이다. 테어도어 라인하르트(1849-1919)는 이곳에서 여러 산업을 일으켜 큰돈을 모았다. 그 자신이 예술 애호가로 많은 작품을 수집했다. 네 아들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맏아들 게오르크 라인하르트(1877-1955)는 당대 예술가를 후원하고 기획 전시를 통해 그들의 작품을 알렸다. 둘째 한스 라인하르트(1880-1963)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작품을 각색해 연극으로 공연했다. 스위스 작곡가 아르튀르 오네게르가 오라토리오 <다윗왕>을 프랑스어로 발표하자, 직접 독일말로 옮겨 무상 공개했다.
셋째 베르너 라인하르트(1884-1951)와 막내 오스카어 라인하르트(1885-1965)는 각각 음악과 미술에서 더욱 중요한 메세나였다. 베르너는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온 스트라빈스키가 순회 극단을 꾸려 <병사 이야기>를 공연하도록 후원했다. 스트라빈스키는 뒷날 “라인하르트는 모두에게 모든 것을 제공했다”라고 회고했다. 그의 후원을 받은 작곡가는 스트라빈스키에 그치지 않는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아르놀트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 파울 힌데미트가 그의 리헨베르크 빌라에 묵었다. 현재 빈터투어 음악원으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바로 옆에는 ‘암 뢰머홀츠Am Römerholz’라고 부르는 동생 오스카어의 집이 있다. 루카스 크라나흐에서 빈센트 반 고흐에 이르는 걸작을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좀 더 있어야 문을 연다. 현대 음악과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라인하르트라는 빈터투어 집안을 기억해야 한다. 시내에 있는 오스카어 라인하르트 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바젤 미술관의 그뤼네발트와 알트도르퍼 방에 이어 다시 한번 신비로운 기운이 뿜어 나오는 전시실 앞에 섰다. 카르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뤼겐의 백악 절벽>이라는 그림이다. 북해의 뤼겐이라는 섬에는 ‘옥좌’라고 부르는 해안 절벽이 있다. 흰색의 암벽이 뿜는 독특한 기운이 화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절벽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작은 돛단배가 보인다. 젊은 여인과 쓰러진 노인, 나무에 기댄 젊은이가 뜻 모를 사연을 담고 있다. 인물의 뒷모습만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카스 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이 그림을 나는 아서왕 전설에 빗댄 적이 있다. 친구 란슬롯과 왕비 기네비어의 배신을 알아차린 아서왕의 몰락이라고 말이다.
이 낭만적인 그림은 여러 음반 표지로 사용되었다. 오보이스트이자 지휘자인 하인츠 홀리거의 슈만 관현악집 가운데 피아노 협주곡 음반이 ‘기네비어’를 줌인했다. 홀리거가 스위스 음악가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빈터투어 무지크콜레기움의 슈베르트 <로자문데> 음반이 더욱 반갑다.
빈터투어 무지크콜레기움의 역사는 16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뤼겐의 백악 절벽>보다도 190년가량 앞선다. 이 유서 깊은 악단을 1922년부터 1950년 사이에 지휘한 사람은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헤르만 셰르헨(1891-1966)이다. 셰르헨은 나치가 집권한 1933년 이후로는 아예 빈터투어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그를 후원한 사람이 바로 베르너 라인하르트이다.
1933년은 우연히도 파울 자허가 바젤에 고음악 전문학교 스콜라 칸토룸 바실리엔시스의 문을 연 것과 같은 해이다. 헤르만 셰르헨의 관심사도 파울 자허와 일치했다. 고음악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과 새로운 음악을 장려하는 것이다. 자허가 남긴 녹음이 그리 많지 않은 데 비해 셰르헨은 매우 많은 음반을 녹음했다. 그 레퍼토리는 18세기 바흐와 헨델에서, 20세기 루이지 노노와 카를 하인츠 슈토크하우젠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 이 레코딩은 대부분 웨스트민스터 레이블이 발매했다가 지금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정리했다.
셰르헨 자신의 녹음도 의미 있지만, 그의 딸 미리암 셰르헨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미리암은 프랑스 푸르트벵글러 협회 회장인 르네 트레민과 1993년에 타라(Tahra)라는 음반사를 설립한다. 타라는 푸르트벵글러와 셰르헨, 한스 크나퍼츠부슈,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 키릴 콘드라신과 같이 저평가된 지휘자들을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음반사 이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오하라 가문의 목장 타라(Tara)에 아버지 헤르만 셰르헨의 머릿글자 H를 더해 지었다. 비록 공동 창업자인 트레민이 세상을 떠나고 음반 산업이 사양기에 접어들면서 2014년 문을 닫았지만, 타라 덕분에 숨은 20세기 보물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셰르헨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은 20세기 후반에 대세가 될 당대 스타일 연주의 선구라고 할 만하다. 바흐의 수난곡과 칸타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등을 지휘한 그가 20세기 음악들의 사도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흥분되지 않을 수 없다. 타라는 그의 <푸가의 기법>과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을 한 음반에 수록했다. 이것이 바로 파울 자허에게는 없는 업적이다.
빈터투어 한복판에 있는 오스카어 라인하르트 미술관을 나와 바로 옆 빈터투어 시립 미술관으로 향했다. 뜻밖에 고흐와 모네, 뭉크 따위의 걸작을 만났지만, 그보다 눈이 간 쪽은 이번에도 페르디난트 호들러였다. 그가 그린 알프스가 진경임을 이날 오후 내내 확인했다.
바젤의 아머바흐 가문과 라인하르트 가문, 호프만 가문 같은 예술 후원자를 ‘메세나Mecenat’라고 부른다. 고대 로마 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언자였던 마이케나스에서 따온 명칭이다. 대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비롯해 로마의 황금시대에 예술을 지원하고 장려했던 그를 기려 현대 기업이나 사회 지도층의 예술 후원을 메세나라고 부른다. 파울 자허나 에른스트 바이엘러도 그 자신이 음악가와 화상으로 시작했지만 많은 재산을 일구어 메세나의 주역이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제정 러시아 말기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이콥스키를 후원했던 것으로 유명한 폰 메크 부인은 남편과 함께 러시아 철도 사업으로 큰돈을 번 집이었다. 차이콥스키에게 폰 메크 부인이 있었다면 라이벌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는 미트로판 벨랴예프(Mitrofan Belyayev)가 있었다. 목재상으로 거부를 이룬 벨랴예프는 자신의 이름을 딴 그룹에 속한 작곡가들을 후원했고, 러시아 작곡가 작품의 저작권 보호를 위해 애썼다.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의 집안도 철도 사업이 배경이었다. 마몬토프는 아브람체보(Abramtsevo)라는 영지를 구입해 여러 예술가들이 활동하도록 후원했다. 대표적인 성과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작곡하고 미하일 브루벨이 무대를 그렸으며,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연출을 맡은 오페라 <눈 아가씨>이다. 마몬토프의 ‘사설 오페라’에서는 브루벨의 아내인 소프라노 나데주다 자벨라와 베이스 샬리아핀 같은 성악가들이 배출되었고,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후기 오페라 대부분이 이 단체에 의해 초연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유명한 러시아 메세나는 파벨과 세르게이 트레티아코프 형제(Pavel&Sergei Tretyakov)이다. 섬유로 성공한 가문은 모스크바에 자신들의 컬렉션을 모은 미술관을 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가 서유럽 미술품에 치우쳤다면, 트레티아코프는 러시아 근현대 미술의 보고이다. 파벨은 라흐마니노프의 사촌 형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알렉산데르 실로티의 장인이기도 했다.
폰 메크 부인과 미트로판 벨라예프, 사바 마몬토프, 그리고 트레티아코프 형제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가 음악가가 된 밑거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