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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Oct 27. 2019

밀라노의 정신, 보로메오 대주교와 만초니

최후의 만찬과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다 빈치와 보로메오 대주교, 만초니를 만난 소중한 경험을 나눈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앞서 본 세 도시가 고대, 르네상스, 근대 건축과 문화유산에 기댄 관광 산업이 주요 수익원이라면 북부의 밀라노와 토리노는 이탈리아 경제를 떠받치는 두 축이다. 패션과 금융, 공업의 중심지가 바로 알프스 산맥 아래로 포(Po) 강 유역을 차지하는 피에몬테, 롬바르디아, 베네토,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이다.

시칠리아는 구둣발에 차였냐?

포 강 평원을 뜻하는 다른 말은 ‘파다니아’이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북부동맹은 현재 이탈리아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파다니아 운동’을 전개한다. 부유한 부가 빈곤한 남부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스코틀랜드, 스페인의 바스크, 카탈루냐와 더불어 독립의 열기가 뜨거운 곳 가운데 하나이다. 그 중심도시가 밀라노와 토리노이다.


피렌체가 미켈란젤로의 도시라면 밀라노는 다 빈치로 대표된다. 다 빈치 또한 피렌체에 속한 빈치에서 태어났지만, 생애 가장 창작력이 높던 삼사십 대에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을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암굴의 성모>, <족제비를 안은 여인> 그리고 무엇보다 <최후의 만찬>과 같은 숱한 걸작을 그렸다. 도시 건축과 과학에 대한 관심 또한 다 빈치의 천재성이 번뜩이는 곳이다.

체나콜로 빈치아노라는 거창해 보이는 이름은 '다빈치의 식당'이란 뜻이다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수도원의 부속 건물인 식당 문 위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아마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자웅을 겨루는 서양 회화의 아이콘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전자는 구약(엄밀히 말하자면 ‘십계명’이지만)이요, 후자는 신약이 아닌가!

영어 가이드로 예약했지만, 모두 이탈리아 사람이라 이탈리아어로 진행, 규칙대로 합시다!

그림은 수난 전날 마지막 저녁을 들던 그리스도가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말을 하자 제자들이 보인 동요를 보여준다. 그리스도 왼쪽에 앉은 세례자 요한이라 알려진 이가, 어쩌면 그의 아내였던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설을 가지고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졌을 정도로 이 그림은 크게 진동했다.

그러나 나는 성서에 나오는 다음 장면을 머릿속에 그린다. 바로 첫 번째 ‘성체성사’의 집전이다.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가 잔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며,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린 후 그들에게 돌리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잘 들어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하고 말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는 많지만 이 부분을 음악으로 만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최고였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마태 수난곡> 가운데 들어보자.

(1:46-4:18) 부분이다

바흐의 음악이 주는 고즈넉하지만 강력한 아우라는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수도원의 수사들이 이 방에 모여 다 빈치의 그림을 보며 빵과 포도주를 들 때 들었던 기분과 같은 것이리라.

전례 성가를 4 성부로 편곡한 <그리스도께서 식탁에 앉으셨을 때, BWV285>도 마찬가지이다.

바흐 탄생 333주년(별 걸!)을 기렸던 작년 전집 가운데

바로 그런 시각과 청각의 이미지를 합치고자 한 사람이 영화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이다.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 <프로스페로의 서재> 따위 영화로 유명한 그는 ‘아홉 고전 명화 재해석Nine Classical Paintings Revisited’이라는 제목으로 렘브란트의 <야경>,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과 같은 회화를 동영상으로 만들었다.

세피아 아님

단짝 음악가 마이클 니만의 미니멀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만찬장은 빛과 어둠, 공간과 시간을 입는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본 적은 없는 기록에 다 빈치와 바흐는 자신들의 이름을 깊이 새겼다. 그러나 다 빈치의 그림 맞은편 벽에 그린 동시대 밀라노 화가 조반니 도나토 다 몬토르파노의 <십자가형>은 꽤 온전한 보전상태임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원근법도 그다지 정교하지 않고 십자가 주변에 지나치게 많이 늘어놓은 군중이 오히려 산만하게 느껴진다. 중세 교부 토마스 아퀴나스에 화가 당대의 밀라노 귀족들까지 때려 넣었으니 그럴 밖에!

<최후의 만찬>과 마주 보는 반대편 벽의 그림이다. 다빈치는 큰 벽을 2류에게 양보하고 어둡고 좁은 문 위에 그리는 것이 더 주목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군중을 그릴 때는 주인공이 특별히 빛이 나게 하거나 군중만을 주인공으로 그려야 하는데, 몬토르파노의 그림에서 그리스도는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 못한다. 반면 바흐가 <요한 수난곡>에서 묘사한 군중의 모습은 짧지만 훨씬 강렬하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대로 하면 그자는 제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바흐는 같은 선율에 다음 가사를 붙인다.

‘만일 그를 놓아주면 총독님은 카이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
누구든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카이사르의 적이 아닙니까’

가장 압권은 그리스도가 걸친 옷을 놓고 앉은 로마 병사들의 모습이다.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가질 것인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자’

이 마지막 노래는 기돈 크레머와 크레머라타 발티카가 현악 합주로 편곡해 연주했을 정도로 처절하다. 죽은 자의 옷을 나눠가질 제비뽑기라니.

몬토르파노의 어수선한 그림보다 오히려 제임스 티소가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그린 그림이 바흐의 <요한 수난곡> 가운데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Es ist vollbracht’와 더욱 잘 어울린다. 화면에 그리스도나 십자가는 보이지 않지만(제일 아래 그리스도의 발끝만 나왔다) 그가 보았음직한 사람들의 애타는 모습이 수채화로 묘사되었다. 티소가 중동을 여행하며 면밀히 연구한 끝에 그린 360점의 신약성서 묘사 가운데 하나로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위에 발 있다
다 이루었다!
상처 받은 영혼을 위로하네!
슬픔의 밤
최후의 때가 되도다
유대의 왕, 힘으로 승리하니
싸움은 끝났다
다 이루었다!
요즘에는 대개 카운터테너가 부르는데, 이 분도 목소리가 꽤 중성적이다

이 고통과 승리의 음악 가운데 첫 부분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1번 3악장의 아리오소를 떠올리게 한다. 베토벤은 이후를 푸가의 환희로 마무리하며 바흐의 대위법에 경의를 보낸다.

2001년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1회전

건물을 나와 바로 곁의 수도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화려하지 않고 호젓한 경내를 거닐며 이곳이 스포르차 가문의 가족 묘지로 사용되었음을 상기한다.

걸음을 암브로시아나 도서관(Biblioteca Ambrosiana)으로 옮긴다. 밀라노의 수호성인 암브로시오의 이름을 딴 도서관은 페데리코 보로메오 대주교가 1609년에 설립했다. 그는 더 유명한 카를로 보로메오 추기경과 사촌 사이이다. (카를로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19세기 이탈리아 문호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대표작 <약혼자들>에서 페데리코 보로메오 대주교와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을 자세히 묘사했다. <약혼자들>은 17세기 초 스페인 치하의 밀라노가 배경이다.


코모 호숫가(역시 그림 같은 곳이다)에 사는 렌초와 루치아는 결혼을 앞둔 시골 처녀 총각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귀족인 영주 돈 로드리고가 루치아를 맘에 두고, 주례를 서기로 한 신부(神夫) 돈 압본디오에게 압력을 넣는다. 신부는 영주와 충돌을 피하려 고분고분 결혼을 연기한다. 렌초는 영주의 몰염치한 횡포와 신부의 무책임함에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루치아를 수녀원에 숨기고 자신도 화를 피해 밀라노로 몸을 피한다. 만초니는 세속권력이 부도덕한 교회와 결탁해 백성을 괴롭혔던 17세기 스페인 치하에, 합스부르크 황실의 지배를 받던 19세기 롬바르디아 지방을 빗댄 것이다. 만초니는 위선자 돈 압본디오 신부와 달리 교회의 양심이자 실천하는 행동가로 페데리코 보로메오 대주교를 내세운다.

1564년에 태어난 페데리코 보로메오는 어떤 시대에서든 탁월한 재능과, 매우 부유한 모든 수단과, 특권을 누리는 모든 이익과, 지속적인 하나의 목표를 더 좋은 것을 연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이용했던 보기 드문 사람들 축에 속했다. 그의 인생은 바위에서 깨끗하게 흘러나와 고여 있지도 결코 탁해지지도 않은 채 여러 토양으로 오랫동안 흘러내리는 동안 깨끗하게 강물로 합류되는 시냇물 같았다.

<약혼자들> 가운데, 김효정 역, 문학과 지성사 (이하 인용 동일)

그가 도서관을 세우는 일도 상세히 서술된다.

암브로시아나 도서관과 페데리코 보로메오 대주교의 석상
페데리코는 대담하게 자본을 투자하여, 기초공사부터 많은 공을 들여 도서관을 건립했다. 도서관을 서적과 필사본으로 채우기 위해 - 연구하면서 이미 소장했던 책들을 기증한 것 외에도 - 사비를 지불해 더욱 학식이 높고 교양 있는 여덟 사람들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독일, 플랑드르 지방, 그리스, 리바노,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책을 모으도록 했다. 그리하여 3만 권의 책과 만 4천 권의 필사본을 모았다. 도서관의 부속 기구로 박사회가 있었다.
(중략)
전적으로 개인적인 비용으로 건립된 이 도서관에서 책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었고, 누구든 책을 요구하기만 하면 필요한 메모를 할 수 있도록 앉을자리와 종이, 펜, 잉크가 제공되었다. 반면 이탈리아의 다른 유명한 공공 도서관에서 책은 볼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책장 속에 닫혀 있었다. 도서관장들이 잠깐 동안 책을 보여주겠다고 친절하게 생각할 때에만 책장 밖으로 책이 나올 수 있었다.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공부할 편리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다.

만초니도 <약혼자들>을 쓸 때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의 풍부한 자료를 열람했다. 그리고 19세기 작곡가 에밀카레 폰키엘리(1834-1886)는 이를 동명의 오페라로 옮겼다. <약혼자들I promessi sposi, 1856>은 폰키엘리가 22세 약관에 쓴 처녀작이지만 뒷날 <라 조콘다>를 쓸 재능을 엿보게 하는 뜨거운 장면이 많다.

지휘자가 올린 밀라노 음악원 전막 공연인데, 주인공이 다 한국사람: 김혁수, 백민아, 김지용

페데리코 보로메오 대주교가 세운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은 중요한 세 그림을 소장해 왔다. 다빈치가 그린 <음악가의 초상>의 주인공을 혹자는 당대 밀라노의 음악가 프란키노 가푸리오라 추정하기도 하고, 혹자는 다빈치 자신의 모습이라고도 한다.

만일 다빈치의 초상이라면 둘이 마주 보네

최근 가장 믿을 만한 다 빈치의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은 이 인물이 가푸리오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가푸리오의 초상과 닮지 않았고, 당시 그의 나이보다도 그림의 얼굴이 더 젊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러면서 다 빈치가 밀라노로 올 때 따라온 젊은 음악가 아탈란테 밀리오로티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약간의 불안감을 비치면서도 예술가다운 다부진 표정을 한 이 젊은이가 누구인지보다, 다 빈치의 섬세함이 더 흥미롭다. 아이작슨은 그림의 더 밝은 쪽인 오른쪽의 동공이 왼쪽 동공보다 작음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다 빈치의 빛과 인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한다.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의 두 번째 소장품은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이다. 잎은 누렇게 시들었고, 사과를 비롯한 과일도 벌레 먹었거나 상태가 좋지 못하다. 이는 당대의 부패한 교회를 상징한다. 카라바지오의 후원자였던 델 몬테 추기경으로부터 그림을 입수한 보로메오 대주교는 아마도 그림을 타산지석으로 삼았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의 구도이다. 카라바조는 과일 바구니를 거의 화폭의 밑선과 일치시키고 대신 윗부분의 여백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감상자에게 생각할 공간을 준 것일까?

도서관의 마지막 보물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의 밑그림이다. 라파엘로가 플라톤의 모델을 존경하는 다 빈치로 삼았음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것으로는 가장 크기가 큰 이 밑그림도 보로메오 대주교의 수집품 가운데 하나였다.

1609년 도서관이 문을 연 무렵, 셰익스피어는 마지막 희곡 <템페스트>를 쓰던 중이었다. 그 주인공 프로스페로는 밀라노의 공작이었지만 책을 좋아한 나머지 정사를 멀리하다가, 야심 많은 동생에 의해 쫓겨나 무인도로 유폐된다. 셰익스피어가 상상했던 프로스페로의 서재는 아마도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대개의 프로스페로 배역도 다 빈치와 유사한 모습이다. 다시 한번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프로스페로의 서재>를 떠올린다.

정말 선구적인 영화이다

바흐가 <요한 수난곡>을 쓴 해(비발디가 <사계를 작곡한 해이기도 하다)인 1725년에 런던의 헨델은 자신의 최대 걸작 오페라인 <로델린다>를 상연했다. <로델린다>는 8세기 롬바르디아의 왕 페르크타리트의 고사를 토대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헨델과 대본작가 니콜라 프란체스코 하임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프랑스 비극작가 코르네유가 각색한 희곡을 토대로 했다. 내용은 정적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아내와 아이를 볼모로 잡힌 롬바르디아의 왕이 복권한다는 것이다. 타이틀롤인 로델린다는 볼모가 된 왕비로, 자식에 대한 사랑과 남편에 대한 지조를 꿋꿋하게 지켜낸다.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당대 이후 철저히 묻혔던 <로델린다>는 20세기 헨델 오페라 부활의 핵심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 가운데 201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공연은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과 카운터테너 안드레아스 숄이 부부로 등장해 화제를 낳았다. 특히 연출가 스티븐 워즈워스는 로델린다의 지조를 시험받는 2막과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3막의 피날레 무대를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내부로 꾸몄다. 일반인에게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기에 오페라 무대를 통해 보는 경험 또한 특별하다.

도서관 내부는 실제로 이와 같이 아름답게 생겼다
달랑 1분 여를 올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옹졸함. 아들을 구하고 남편과 재회한 것을 기뻐하다 마는 로델린다

도서관을 나와 밀라노 추모 공원(Cimitero Monumentale)으로 향한다.

이곳에 밀라노를 빛낸 이들의 무덤과 기념비가 서 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앞서 본 알레산드로 만초니이다. <약혼자들>을 통해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운동에 불을 붙인 그가 1873년 세상을 떠났을 때 주세페 베르디는 <레퀴엠>을 작곡해 애도를 표했다. 원래 베르디는 그보다 5년 전인 1863년 로시니 서거 때 진혼곡을 썼다. 그러나 이때는 그를 비롯한 열세 명의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한 악장씩 작곡해 하나로 모은 것이었다. 그러나 <로시니를 위한 미사Messa per Rossini>로 불린 이 곡은 주최 측의 무성의로 초연이 취소되었다.

결국 만초니가 서거했을 때 베르디는 로시니를 위해 쓴 ‘리베라 메’ 악장의 수정판을 포함한 레퀴엠 전곡을 완성한 것이다. 밀라노 추모 공원에는 만초니의 묘를 비롯해 아밀카레 폰키엘리, 아리고 보이토,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그의 사위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화가 프란체스코 하예즈와 같은 위인의 묘가 있다. 베르디도 원래 이곳에 묻혔지만 곧 밀라노의 음악가 복지관(Casa di Riposo, 현 베르디 재단)으로 이장하고, 현재는 추모상만 남겼다.

베르디 뒤에 그의 대본작가이자 작곡가였던 아리고 보이토의 이름이 보인다
<로시니를 위한 미사>의 전곡 초연은 1988년 헬무트 릴링이 해냈다

베르디가 로시니를 위해 썼던 ‘리베라 메’와 만초니를 위해 쓴 <레퀴엠> 가운데 ‘인제미스코’를 떠올리며 다음 장소로 떠난다.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기렸던 2013년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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