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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25. 2019

카니발의 이방인

베네치아와 아이즈 와이드 셧

18세기 말 베네치아 - 19세기 말 빈 - 20세기 말 뉴욕으로 이어지는 스탠리 큐브릭의 성찰을 들여다본다


18세기 ‘그랜드 투어’라고 부르는 유럽 상류층 자제들의 유람에서 베네치아는 빠질 수 없는 경유지였고 그 핵심적인 구경거리 가운데 하나는 카니발(사육제)이었다. 

이 타락의 가면을 '전 세계 배송한다'라고 적혀 있다. 그래서 히든, 복면이 유행했나?

카니발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애도하는 사순절 직전에 욕망을 분출하도록 한 일종의 해방구였다. 무표정한 흰색 가면으로 상징되는 베네치아의 카니발은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가면은 익명성을 제공한다. 무릇 문명은 무르익을수록 타락하게 마련이고, 도덕적인 불감증은 성(性)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으로 이어진다. 카니발 시기 베네치아에는 가면을 쓴 상류층의 불륜이 묵시적으로 만연했다.

영화의 첫 파티 장면이 이 노래로 시작하는 것이 참 좋다(시나트라와 영화는 무관하다).

베네치아의 타락을 현대에 옮겨온 영화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이다. 20세기가 저무는 뉴욕, 상류층 비밀 모임이 베네치아풍의 가면을 쓰고 외딴 저택에서 난교(orgy)를 벌인다. 각자의 잠재의식에서 스와핑(커플 맞교환)을 꿈꾸는 주인공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 부부(촬영 당시 실제 부부)는 이 거대한 타락의 부속품이다.


큐브릭의 천재성은 영화에 사용한 음악에서 돋보인다. 20세기 소련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선율은 영화의 주제를 더욱 강조한다. 19세기 오스트리아에서 완성된 왈츠는 남녀가 상대방을 바꾸어가며 추는 춤이자 음악이다. 스와핑의 암묵적인 공인이자 짝짓기의 양식화인 셈이다. 큐브릭은 왈츠의 대명사인 빈 슈트라우스 일가의 음악 대신 자본주의 대척 소비에트 연방 작곡가가 쓴 재즈풍의 왈츠를 사용해 주제를 비튼다.

카사노바 또한 베네치안이다. 표지에 보이는 탄식의 다리를 너머 탈옥했다나!

더욱이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은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단편 『꿈의 노벨레』이다. 베네치아 영화제는 촬영을 마치고 작고한 큐브릭에게 비평가상을 수여했다. 슈니츨러의 소설을 영화 장면과 함께 간추려 본다.

나흐티갈은 독일말로 나이팅게일, 영화 속 이름은 닉 나이팅게일이다
소설의 암호는 덴마크, 영화의 암호는 피델리오이다. 베토벤 오페라의 주인공 피델리오는 피델리티(정조)에서 온 이름이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도 멍하니...
영화에서 강박적으로 사용되는 음악은 리게티의 <무지카 리체르카타 2번>이다
왜 이 그림이 여기에 있는가 물으신다면?
슈니츨러 소설 속 호텔은 빈 브리스톨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버르토크의 발레 <이상한 중국 관리>야말로 이 이야기에 안성맞춤이다. 짧게 들어보자
대신 큐브릭은 리스트의 <회색 구름>을 삽입한다. 리스트는 19세기 작곡가 가운데 가장 멀리 내다본 사람이다
이어지는 베베른의 <변주곡>이다. 시각적으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음악이 빈과 뉴욕을 연결하는 듯하다.
뭘 어째, 잘 헤어졌지!
영화 레오파드,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팡팡과 친구(?)의 결혼식 장면에 쇼스타코비치 '왈츠'를 입힌 유튜버

18세기 말 베네치아 - 19세기 말 빈 - 20세기 말 뉴욕으로 이어지는 문명의 황혼을 기막히게 포착한 큐브릭의 안목이 빛을 발하는 곳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뿐이 아니다.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보면 루돌프 지친스키(Rudolf Sieczyński, 1879-1952)의 ‘빈, 나의 꿈의 도시Wien, du Stadt meiner Träume’라는 노래가 포함되어 있다. 

무명 악사들이 제일 낫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광이 저물 무렵 작곡된 아름다운 노래이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 씨씨, 황실 사냥터 마이얼링에서 함께 목숨을 끊은 루돌프 황태자와 마리 베체바, 구스타프 말러와 그의 아내 알마 그로피우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시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곳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런데 ‘빈, 나의 꿈의 도시’가 영화의 어디에 나오는지 몇 번을 돌려봐도 찾을 수 없다. 나는 감독이 의도한 장면이 사후 편집되면서 사운드트랙 리스트에서 미쳐 지우지 못한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뭔가 석연치 않다. 마침내 발견했다. 유레카! 이 중요한 노래는 영화에 단 1초쯤 나온다. 그것도 바이올린 선율로! 니콜이 상가에 간 남편을 기다리며 무심코 TV를 볼 때 산 마르코 광장 배경의 화면이 나온다. 

1초면 충분하다

화면에 비친 영화 <블룸 인 러브Blume in Love>는 이혼 전문 변호사 블룸이라는 남자가 전처와 현 애인, 자신의 비서 사이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베네치아에서 방황하는 이야기이다. 큐브릭은 이 영화가 주 선율로 쓴 노래 ‘빈, 나의 꿈의 도시’를 <아이즈 와이드 셧>으로 단 1초쯤 가져온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라는 큐브릭의 선물이다.

니콜이 보던 영화의 예고편. 제일 처음 음악이 '빈 나의 꿈의 도시'이다

오늘날에도 베네치아를 향한 그랜드 투어의 물결은 그치지 않는다. 나를 비롯해 수많은 관광객이 보기 드문 물의 도시를 찾아 적잖은 지출과 불편함을 감수한다. 토마스 만이나 스탠리 큐브릭이 거대 문명의 일몰 지점으로 꼽은 도시이지만, 여전히 비엔날레와 영화제가 회를 이어간다. 만일 그 창작의 동력이 아직 유효하다면, 설령 200년 뒤 베네치아가 물 위 도시가 아니라 물밑 세계가 된다 해도 후대는 몬테베르디와 비발디의 베네치아처럼 21세기 베네치아도 그리워할 것이다.

<서머타임>의 캐서린 헵번처럼!

태백산맥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남한강이 양수리에 모여 서해로 나가기까지 숱한 난관을 거치면서도 기적적인 발전을 이룬 서울이 베네치아보다 못하리란 법은 없다. 오랜 세월 카리스마 있는 화합의 리더십을 갖지 못한 탓에 모두가 공감하고 자랑스러워할 ‘이야기’가 축적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무리 노래하고 춤춰봐도 그것을 관통하는 이야기 없인 먼지와 같다.


이야기는 부지불식 간에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를 담는다. 지상낙원에 살지 않는 이상, 어느 이야기나 더 나은 곳(Over the rainbow)을 향한 동경을 담고, 어떻게 그곳에 갈지를 고민한다. 이야기가 없거나 하찮다는 것은 지향하는 바가 없거나, 그것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존감 없는 사람이 아무리 돌아다녀봐야 결국 남부럽기만 한 오리엔탈 문화난민 아닌가.


이만 진정하고 이방인은 밀라노행 열차에 오른다. 우연이지만 큐브릭의 영화에서 유일하게 생존 작곡가로 이름을 올린 조슬린 푹(Jocelyn Pook, 1960생)은 앞서 본 영화 <베니스의 상인>의 음악도 담당했다. 그 가운데 카운터테너 안드레아스 숄이 부른 ‘달빛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How Sweet The Moonlight’를 들으며, 안녕, 라 세레니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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