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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Oct 28. 2019

모차르트를 품을 세 번의 기회

밀라노에서 탄생한 음악

1770-73년 사이 세 번의 방문으로 모차르트가 밀라노에게 준 것을 살펴본다


밀라노의 첫인상을 다 빈치와 만초니로 기록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곳 음악을 이야기할 차례이다. 밀라노의 수호성인은 성 암브로시오 대주교(340-397)이다. 서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하던 시기 밀라노의 대주교였던 그는 원래 공직에 있었지만, 탁월한 인격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았고 성직에 오른 지 1주일 만에 주교가 되었다. 암브로시오의 설교가 얼마나 탁월했는지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한량으로 유명하던 아우구스티노가 그에게 감복해서 교화되었다는 것이다. 뒷날 <고백록>을 쓰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바로 그이다. 또한 암브로시오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성가를 정비한 것이다. 그레고리오 성가와 더불어 암브로시오 성가는 초기 교회의 중요한 성과였다.

쾰른 대성당 합창단의 그레고리오 성가와 암브로시오 성가

이렇게 초기 가톨릭 교회의 주요 교구로서 전례 음악의 중심지였고, 다빈치를 후원했던 스포르차 가문도 세속 음악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종교개혁 이후로 오히려 후퇴의 길을 겪는다. 바로 카를로 보로메오 추기경(1538-1584)과 페데리코  보로메오 대주교의 시대이다. 카를로는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을 세운 페데리코와 사촌지간이다.

두 사람을 가끔 숙질간이라 적은 자료도 있지만 역시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약혼자들>이 믿을 만하다.

1580년 보로메오(페데리코)는 성직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표명했고, ‘사촌’인 카를로가 직접 그에게 성직 의복을 전달했다. 이미 오래전에 세인에게서 명성을 얻은 카를로는 성자로 불렸다. (중략) 보로메오보다 26세 많은 카를로 추기경이 생존했을 때, 어리고 젊은 보로메오는 매우 생생하게 신성을 표현하고 업적까지 상기시켰던 그분 앞에서, 그분의 태도와 생각을 따르고자 했을 터인데, 놀랄 일이 아닌 건 틀림없다.

이렇게 페데리코는 사촌인 카를로 보로메오 추기경을 거울 삼아 성직에 임했던 것이다. 페데리코는 카를로의 시성식을 기념해 보로메오 가문의 성이 있는 마조레 호숫가에 거대 청동상을 세우게 했다. 산카를로네(Sancarlone)라 부르는 28미터의 동상은 뒷날 알자스 콜마르 태생의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세울 때 참고했다.

진격의 거인

교황의 조카로 서거 30년 만에 성인에 추대된 카를로 보로메오의 가장 큰 업적은 트렌토 종교회의에서 가톨릭 종교개혁을 이끈 것이다. 신교의 확장을 막고 가톨릭 내부 교리를 정비하는 것이 회의의 목적이었다. 그 가운데 교회음악의 통제가 한스 피츠너의 오페라 <팔레스트리나>의 주요 내용임은 이미 살펴보았다.

보수적인 대다수 회의 참석자들은 복잡한 당대 다성음악을 단선율인 그레고리오 성가로 되돌릴 것까지 주장했지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수정헌법 1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주장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보로메오 추기경은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팔레스트리나에게 교회음악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미사곡을 주문했다. 창작력이 고갈되었다는 이유로 팔레스트리나가 거절하자 보로메오는 화를 낸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트리나가 <교황 마르첼루스 미사>를 작곡함으로써 교황을 감복시켜, 다성음악의 퇴보를 막았지만, 교회가 음악을 엄격히 통제하는 분위기 조성은 피하지 못했다. 더욱이 밀라노는 16세기 내내 프랑스와 스페인,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고,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1629–31년,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13만 인구 가운데 6만을 잃었다. 음악을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18세기에 들어 카를 6세가 재임하는 합스부르크의 지배가 굳어지면서 밀라노에 궁정음악이 유입되었다. 조반니 바티스타 삼마르티니(1700-1775)는 전기 고전주의 양식의 개척자로 기억해야 한다. 역시 밀라노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으로 건너가 활동한 형 주세페 삼마르티니(1695-1750)와 달리 조반니 바티스타는 산탐브로소 교회 성가대장 지위를 유지하며 도시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활동했다. 그의 재임 중에 바흐의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과 글루크가 다녀갔고, 어린 모차르트도 3년의 밀라노 체류 기간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반니 모레토가 지휘하는 아탈란타 푸기엔스의 삼마르티니 교향곡. 짧다

1769년 12월 13일 13세의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를 떠나 볼차노, 베로나, 만토바를 거쳐 1월 23일 밀라노에 도착한다. 부자는 오스트리아 귀족 카를 요제프 피르미안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들 페르디난트 대공의 환대를 받았다. 특히 피르미안은 당대 제일의 대본작가 메타스타지오의 새 대본을 제공할 테니 이듬해 카니발을 위한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위촉했다.

첫 번째 밀라노 여행에서 모차르트가 묵었던 산 마르코 수도원, 18세기에 그린 그림(위)과 비교하면 복개천변임을 알 수 있다.

모차르트는 가을까지 돌아오기로 하고 3월 15일 밀라노를 떠나 볼로냐, 피렌체, 로마를 거쳐 5월 14일 목적지인 나폴리에 이르렀다. 1737년 문을 연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은 당대 오페라의 중심이었다. 나폴리에서는 산 카를로 극장 개관 직전까지 이미 거장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1660-1725)와 천재 작곡가 조반니 바티스타(세례자 요한 없었으면 이름 어떻게 지을 뻔했냐) 페르골레시(1710-1736)가 활동했다. 사실상 두 사람이 나폴리악파의 창시자와 완성자였다.


베수비오 화산과 폼페이 유적까지, 나폴리에서 짧지만 굵은 인상을 얻은 모차르트는 로마를 거쳐 밀라노로 돌아와, 앞서 위촉받은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기대했던 메타스타지오의 대본은 아니었지만, 비토리오 치냐 산티의 대본은 모차르트의 첫 밀라노 오페라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1770년 12월 26일 밀라노 궁정극장(Teatro Regio Ducal) 공연의 성공은 결과적으로 이듬해 <알바의 아스카니오>와 그 이듬해 <루치오 실라>까지 거푸 밀라노의 위촉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모차르트가 삼부작을 초연한 밀라노 궁정극장은 1776년 화재로 붕괴했다. 1986년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이 곡을 재연할 때 연출가 장 피에르 포넬은 비첸차의 올림피코 극장을 택했다. 모차르트의 걸작을 17세기 건축의 거장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최초의 현대식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공연한 것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서 공연하려면 부담 백배일 것이나 음악도 노래도 최고이다. 죽어도 사랑을 버리지 말자는 두 사람.

<미트리다테>의 배경은 기원전 1세기 흑해 연안의 폰투스 왕국이다. 로마와 대적하는 미트리다테 왕에게는 두 아들과, 젊은 약혼녀가 있다. 그 가운데 로마와 내통하여 체포된 장남은 동생이 아버지의 약혼녀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거짓 고한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정말 연인 사이였다. 두 아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미트리다테. 그러나 결국 형제는 로마군과 싸우다가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간다. 작은아들의 진심을 안 왕은 약혼녀와 행복을 빌어주고 큰 아들도 용서하며 죽는다.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비첸차의 올림피코 극장 내부

장 라신의 비극이 원작인 <미트리다테>를 통해 14세의 모차르트는 자신뿐만 아니라 밀라노의 음악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이듬해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도 거침없었다. 첫 번째 밀라노 방문 때 호의를 보인 페르디난트 총독이 데스테 가문의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결혼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위촉된 곡이었다.

원래 행사의 주된 음악은 드레스덴의 거장이자 메타스타지오의 친구였던 요한 아돌프 하세의 <루제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총애를 받던 72세의 하세는 15세 모차르트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소년의 승리를 인정하기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했던 여제는 모차르트를 궁정 작곡가로 삼아주길 기대하던 아버지의 기대를 짓밟았다.

아스카니오는 알바가 아니라 아에네아스의 아들이다. 알바는 지명, 알바 롱가의 준말

1772년 10월 모차르트 부자는 마지막으로 밀라노를 방문했다. 메타스타지오의 <루치오 실라Lucio Silla>에 붙인 오페라의 초연은 어수선했다. 대공이 극장에 두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고, 가수들 사이에는 다툼이 벌어졌으며, 막간 삽입 발레가 너무 길어 공연은 새벽 두 시가 넘어서 끝났다. 그러나 후속 공연은 호평을 받아 시즌의 다음 오페라인 파이시엘로의 작품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이번에도 아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셋째 아들인 토스카나의 레오폴트 1세에게 부름 받기를 기대했다. 모차르트는 기다리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여섯 밀라노 현악 사중주 세트와 그 유명한 모테트 <환호하라, 기뻐하라Exsultate, jubilate, K. 165>를 작곡했다.

<환호하라, 기뻐하라>의 마지막 '알렐루야'. 보름달빵이 생각나는 율리아 레즈네바

그러나 이번에도 모차르트 부자는 실망을 안고 돌아왔다. 그 뒤로 모차르트는 이탈리아를 다시 찾지 않았고, 밀라노도 향후 음악의 수도가 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뒷날 파리와 뮌헨도 마찬가지로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찼다. 만일 밀라노가 합스부르크 황실의 지배를 받지 않고, 다 빈치를 후원했던 스포르차 가문의 통치 아래 있었다면 모차르트를 품을 수 있었을까?


1776년에 화재로 무너진 밀라노 궁정극장을 대신해 1778년 새로운 오페라 극장이 라 스칼라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다. 개막작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드러난 에우로파Europa riconosciuta>였다. 2004년 라 스칼라 극장 보수 뒤 리카르도 무티가 재개관 작품으로 무대에 올릴 때까지 200년 이상 잊혔던 음악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에우로파가 숨어 지낼 동안 모차르트의 눈부신 후속작들이 라 스칼라를 지배할 것이다.

결국 무티는 3년 뒤 단원들에게 해촉 통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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