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피츠너의 팔레스트리나
바티칸에는 교황이 관장하는 네 개의 대성당(Basilica maggiore)이 있다. 바티칸 시국 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고, 나라 바깥 로마 시내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성 바오로 성 밖 대성당이 있다. 1929년 바티칸과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교황의 지위에 대해 라테라노 궁전에서 협약을 가지면서 이 바티칸 밖 세 대성당도 교황청에 귀속된 것이다. 교황은 이렇게 세속적으로는 가장 작은 나라의 원수이지만 국경 너머에서도 세 숨 쉴 공간을 가진다. 물론 종교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큰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가톨릭 신도들은 그가 베드로로부터 천국에 들어갈 열쇠를 물려받았다고 믿는다.
그중 하나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Basilica Santa Maria Maggiore)은 로마의 중앙역 테르미니 근처에 있다. 바티칸의 교회라 그런지 입구부터 테러나 반달리즘을 방지하기 위한 검색으로 조금 삼엄하다. 그러나 교회 안으로 들어서니 곧바로 마음의 고향에 온 듯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제단 쪽 압시스(반원이라는 뜻인데 보면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 있다)에는 이 교회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그림들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로부터 왕관을 받는 그림과 그 아래 영면을 취하는 그림이다. 이 교회는 5세기에 로마 귀족 부부가 지은 것이라 한다. 아이를 못 낳고 만년에 전 재산을 교회를 지어 봉헌하려 할 때, 8월인데 에스퀼리노 언덕 위로 눈이 내려 교회터를 알렸다 한다.
내가 처음 본 이 성당은 1994년 작곡가 팔레스트리나의 서거 400주기를 기념하는 탈리스 스콜라스의 기념 공연 영상에 나온 모습이었다. 이 공연을 보기 전에 199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한 탈리스 스콜라스의 노래를 들었다. 피터 필립스가 창단한 영국의 고음악 중창단이 음반으로만 어렴풋이 알던 르네상스의 선율을 어둠침침한 대강당에 풀어놓았다.
그중에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도 있었다. 시스티나에서만 불리기는커녕 이제는 극동의 작은 나라에까지 그 신비로운 선율이 전한다. 당시 내 수준에 팔레스트리나의 다성음악은 솔직히 지루함을 참기 힘들었지만,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는 귀한 무대라는 생각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근래 유럽 무대에서 다시 부상하는 한스 피츠너라는 작곡가가 있다. 1869년에 태어나 1949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철저히 독일적인 예술가이자 스스로를 ‘안티-모더니스트’라 칭했다. 그는 선배였던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인정받았고, 후고 볼프로부터 영향을 받은 가곡을 여럿 작곡했지만, 오랫동안 적은 청중만이 그의 음악을 찾았다.
피츠너는 현대 음악에서 일어나는 조성의 붕괴와 음렬 음악의 출현을 경계했다. 그는 이탈리아 작곡가 페루초 부소니의 「신 음악 미학을 위한 소론」을 반박해 「미래주의자들의 위험성」이라는 글을 썼다. 그는 “부소니는 서구 음악의 희망을 미래에 두고, 현재와 과거는 예비 단계이자, 부족한 시작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이미 정점에 와 있으며, 아니면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뛰어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한다.
피츠너는 300년 전에 살았던 선배 예술가의 고민과 번뇌를 소재로 한 오페라를 작곡해 자신의 주장을 더욱 공고히 한다. 바로 1915년에 완성한 오페라 <팔레스트리나>가 그것이다. 조반니 바티스타 팔레스트리나는 1525년부터 1594년까지 살았던 이탈리아의 다성음악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은 일부 세속 가요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미사곡과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로마에서 35킬로미터 동쪽에 떨어진 팔레스트리나에서 태어난 그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바실리카와 조반니 인 라테라노 바실리카, 그리고 성 베드로 바실리카에서 모두 합창장을 지냈다. 피츠너가 주목하고 있는 시기는 1563년의 어느 한 때이다. 바로 1545년부터 계속되어 온 트리엔트 종교회의가 마무리되던 시점이다.
트리엔트 종교회의는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에 맞서 가톨릭 내부의 개혁을 꾀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가장 중요한 의제 두 가지를 놓고 토론이 이루어졌다. 첫째는 교회음악에서 다성음악, 곧 폴리포니를 폐지할 것인가의 여부였고, 두 번째는 미사를 각국어로 집전할 것인가 라틴어로 지낼 것인가의 선택이 그것이었다. 물론 피츠너가 주목한 것은 첫 번째 문제, 르네상스의 찬란한 다성음악 전통을 무시하고 그레고리오 성가의 단선율로 돌아갈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팔레스트리나였다.
조선시대 예송논쟁 못지않게 사소하고도 복잡한 것이 바로 종교 개혁의 의제와 논의 과정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스페인과 독일,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요지를 다스렸던 카를 5세는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거센 혁명의 물결 아래 프로테스탄트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이내 스페인의 왕위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주고 은둔한다. 그 후 이탈리아의 트리엔트에 모인 각국의 추기경과 사절단은 때로는 자국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고자, 때로는 별것도 아닌 개인의 생각을 고수하고자 18년 동안이나 갑론을박을 벌인 것이다.
오페라가 시작되면 팔레스트리나의 아들인 이기노와 그의 친구이자 작곡가의 제자인 실라가 등장한다. 실라는 이미 스승의 시대는 갔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피어난 새로운 예술이 대세가 될 것이라며 흥겨운 연애 가요를 흥얼거린다. 이기노는 친구에게 아버지가 최근 의기소침해 있다며 걱정한다. 또다시 자신의 새로운 노래로 친구를 위로하는 실라. 여기에 팔레스트리나와 보로메오 추기경이 들어온다. 추기경은 실라의 경박한 노래에 아연실색하지만 팔레스트리나는 시대는 언제나 새로운 음악을 요구한다며 젊은이들을 옹호한다.
팔레스트리나는 아내를 잃은 뒤 이전의 왕성했던 창작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하고 시름에 잠겼다. 그런 그에게 교황의 측근 보로메오 추기경이 새 미사의 작곡을 명한다. 대다수 사절이 다성음악을 폐지하고 단선율 성가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지만, 황제와 교황이 모두 다성음악을 원하므로 모두를 감동시킬 미사를 작곡하면 반대파가 설득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트리나는 창작력의 고갈을 호소하며 거절한다.
화가 난 보로메오가 나가자 팔레스트리나는 고독감을 이길 수 없다. 그런 그 앞에 과거의 거장들이 나타나 지상에서 그의 의무는 끝나지 않았으며, 작곡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거장들의 모습이 사라진 방안에 천사들이 가득 차 미사를 부르기 시작한다. 팔레스트리나는 이들의 노래를 정신없이 받아쓴다. 다시 들어온 실라와 이기노가 탈진해 쓰러진 팔레스트리나를 발견한다. 이들은 쓰다 만 악보를 보고는 대단한 걸작이며 이것이 위기에 처한 다성음악과 창작 의욕을 상실한 팔레스트리나 모두를 구제해 줄 것이라며 기뻐한다. 여기까지가 제1막이다.
제2막은 앞서 말한 두 가지 의제, 곧 다성음악의 존치 여부와 각국에 미사 집전을 놓고 토론하는 종교회의장의 모습이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의견이 서로 다르고 독일과 교황이 각자 속내가 있다. 까닭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가 난무한다. 회의장 안의 소요는 결국 총성으로 이어진다. 많은 인명이 죽고 부상한 뒤에야 겨우 사태가 진압되자, 성직자들은 “과연 이것이 성스러워야 할 종교회의의 모습인가” 하고 자탄한다.
마지막 제3막은 다시 팔레스트리나의 집이다. 여기에 그가 악장으로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 합창단원들이 와 있다. 앞선 종교회의 중에 팔레스트리나는 교황의 명을 거역한 죄를 물어 투옥되었고, 그 사이 실라와 이기노가 아버지가 하룻밤 사이에 쓰다만 미사의 악보를 모아 교황청에 제출한다. 때마침 팔레스트리나가 풀려나와 집에 돌아온 것이다. 모두가 팔레스트리나는 물론 다성음악의 운명을 결정할 교황청 시연회 결과에 초조해한다.
이때 멀리서 팔레스트리나를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고 교황 비오 4세가 직접 등장한다. 교황은 성자 요한(이탈리아어로는 ‘조반니’, 곧 팔레스트리나의 이름이다)이 천사의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자신도 또 한 사람의 조반니가 쓴 음악을 듣고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며 팔레스트리나를 치하한다. 아울러 그는 팔레스트리나를 시스티나 예배당의 종신 악장으로 임명한다. 보로메오 추기경은 한때 등 돌렸던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팔레스트리나는 그가 잘못한 점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제자 실라를 소개하고자 하지만 그는 이미 그곳에 없다. 제자가 새로운 음악을 좇아 피렌체로 갔음을 직감한 그는 당연한 일이라 자위하며, 영감을 되돌려준 신께 감사한다.
피츠너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동시대 음악가들 모두 <팔레스트리나>의 주인공을 피츠너와 동일시했다. 1917년 뮌헨에서 이 곡이 초연되었을 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작곡가에게 “당신이 팔레스트리나군요”라고 말했다. 초연을 지휘한 브루노 발터도 팔레스트리나의 성격이 피츠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만은 『비정치적인 사람의 생각』이라는 책에서 이 오페라가 “고백적인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만은 초연에서 팔레스트리나를 부른 카를 에르프와 피츠너가 체격과 외모가 유사함을 들어 이 오페라가 자전적인 것임을 더욱 확신했다. 실제로 피츠너는 초연 뒤 악보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예술가로 살면서 내가 쓴 최고의 작품을 세계에 초연하는 무대에서 당신과 같은 이상적인 해석자를 주역으로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를 에르프라는 이름은 이 독일 예술과 함께 언제까지나 칭송받을 것입니다.”
프란츠 바우어는 초연 1년 뒤에 그린 피츠너의 초상에서 생각에 잠긴 피츠너의 머리 위로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연주하는 천사의 모습을 그려 그와 팔레스트리나를 동일시했다.
이렇게 피츠너는 팔레스트리나라는 과거의 작곡가를 통해 20세기 음악의 위기를 진단한다. 팔레스트리나가 천사의 도움으로 하룻밤 사이에 미사를 썼다는 설정은 실제로 전하는 <교황 마르첼로 미사>에 얽힌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또한 폴리포니가 지배했던 종교음악을 뒤로하고 피렌체로 떠난 실라의 모습에서 오페라의 시대가 왔음을 감지할 수 있다. 바로 이어지는 17세기는 몬테베르디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피츠너의 음악은 서양 음악 역사상 가장 두터운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자랑한다. 그는 <팔레스트리나>에서 말러와 슈트라우스의 대편성을 극한까지 몰고 간다.
그러나 팔레스트리나의 제자 실라가 몬테베르디의 단선율을 선택한 것과 같은 일이 피츠너 당대에도 반복되었다. 피츠너가 비판했던 무조음악은 젊은 작곡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고, 독일 밖에서는 러시아에서 나온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가 대세였다. 그러나 피츠너는 신성독일제국의 음악을 끝까지 고수하고자 했고 독일 작곡가로서 ‘성스러운 책무’를 다하고자 했다.
이는 제3제국 초기 국가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악용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피츠너는 팔레스트리나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향해 예술을 고개 숙이게 하지 않았다. 나치는 그에게 유대인인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을 극 부수음악을 쓰라고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뛰어난 음악은 작곡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피츠너와 유대 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끈끈한 우정을 보고 그의 뜻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당국은 그를 놓아준다.
피츠너가 훗날 나치의 인종 정책에 일면 동조한 것은 ‘독일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반유대주의는 민족 전체에 대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독일 정신을 위협하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반사적인 경계였다. ‘독일적인 것’은 그만큼 근대의 토대가 약했고, 그들로서는 어렵게 획득한, 지키고자 애쓰지 않으면 안 되는 존립의 가치였다.
유대인 브루노 발터는 피츠너의 참뜻을 알았고, 1917년 6월 12일 뮌헨에서 <팔레스트리나>를 초연한 이래 1922년 9월 30일까지 무려 마흔여섯 차례나 무대에 올렸다. 그는 1955년 이렇게 회상했다.
“나를 비롯해 그를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의 꼿꼿한 성품 속에 자리한 믿을 수 없는 모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팔레스트리나>보다 더 도덕적으로 진지하고 감성적으로 현명한 작품을 알지 못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인본주의 그 자체이다. 그의 행동 때문에 그 진정한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한스 피츠너와 가까웠던 사람은 누구나 그가 비인간적인 것을 멀리 했고, 그의 영혼이 그것을 참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독일적인 것을 섣불리 강조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나치의 냄새가 나는 것은 청산과 희석의 대상이었다. 1949년에 피츠너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작품은 빠르게 잊혀갔다.
아무리 팔레스트리나가 소재이더라도 독일 음악으로 탈바꿈한 것이니 여기에 와서 이런 얘기를 한참 한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지루해할 것이다. 문을 닫기 전에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고 나가자.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안에는 미켈란젤로가 최만년에 만든 스포르차 가문의 예배당이 있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다. 스포르차는 밀라노의 유력 가문인데, 바로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에 가면 미켈란젤로가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수수한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 어떤 예술가보다, 만년에 내려놓는다는 것에 대해 잘 알았던 사람이다. 포도원 농부가 <라오콘 상>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맨발로 달려갔던 곳이 바로 이 성당 밖이다.
반면에 스포르차의 라이벌인 또 다른 유력가 보르게세 집안의 예배당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금장과 벽화로 치장한 예배당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루가 성인이 그렸다고 전하는 비잔틴 이콘이다. 역병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킨 뒤 ‘로마 백성의 구원Salus Populi Romani’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그림 또한 복원을 위해 잠시 예배당을 떠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로마의 또 다른 주인공,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이곳에 묻혔음을 표시한 석판이 새겨 있다.
성모 마리아 대성전을 나서며 <아베 마리아Ave Maria>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가장 유명한 것은 슈베르트가 월터 스콧의 가사에 붙인 것과 구노가 바흐의 평균율을 바탕으로 쓴 노래들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에게 최고의 <아베 마리아>는 베르디가 <오텔로>를 위해 쓴 것이리라. 남편의 의심을 받는 데스데모나가 마지막 잠자리에 들기 전 부르는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