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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Oct 30. 2019

라 스칼라는 어떻게 최고가 되었나?

오페라보다 더욱 흥분되는 그들의 이야기

오페라 역사의 현재 진행형, 라 스칼라를 가다


그리하여 우리는 라 스칼라에 도착했다. 오페라 400년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이탈리아에서 나온 작품이 나머지 모든 나라에서 나온 작품을 합친 것보다 많을 터이니, 이탈리아에서 최고라면 전 세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라 스칼라는 많은 라이벌 도시를 제치고 종주국을 대표하게 되었을까?

다 빈치 석상과 마주한 라 스칼라 오페라

오페라의 세 가지 요소를 따져보면, 작품, 극장, 관객을 들겠다. 세 가지가 어느 것 하나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결국 돈이다. 어느 문화 산업보다 경제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나폴리는 밀라노보다 앞서 오페라 극장이 들어섰고, 당대 유파를 탄생시키며 19세기 초까지 벨칸토 성지로 지위를 누렸지만, 경제적인 침체 이후로 현재의 모습은 전과 같지 않다. 그 모습은 나폴리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자. 로마는 밀라노에 비해 교황의 입김이 훨씬 강한 곳이었다. 교황이 로열박스에 앉은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로마 아르젠티나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은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베르디의 <두 사람의 포스카리>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밀라노의 제일 큰 라이벌인 베네치아는 부유하긴 했지만, 바다의 도시라 일면 폐쇄적이었고, 극장이 여러 차례 불타는 바람에 부침이 심했다. 오늘날 밀라노는 이탈리아 경제를 떠받치는 토대이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롬바르디아 지방의 GDP는 벨기에와 비슷한 정도이고, 이탈리아 전체의 4분의 1에 가깝다. 금융과 서비스업, 제조업 등 산업 전 분야에서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중추이다. 그런 경제의 꽃이 두 개의 프로축구 구단(AC밀란과 인터밀란)과 오페라로 피어난 것이다.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가 있던 자리에 지은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19세기 모습

라 스칼라는 1778년 8월 3일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드러난 에우로파>로 문을 연 이래, 오늘날에도 매년 12월 7일 시즌을 개막한다. 이날이 도시의 수호성인 성 암브로시오의 축일이기 때문이다. 초연작 중 중요한 몇몇만 추려봐도 로시니의 <이탈리아의 터키인>, 벨리니의 <노르마>, 도니체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 베르디의 <나부코>, <오텔로>, <팔스타프>,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 푸치니의 <나비부인>, <투란도트> 따위의 걸작이 줄을 잇는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빅토르 데 사바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리카르도 무티, 다니엘 바렌보임(유일한 비이탈리아인이다), 리카르도 샤이와 같은 당대 거장이 지휘자며 그 수준을 유지했다. 특히 토스카니니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 두 차례나 라 스칼라를 이끈 마에스트로였다.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극장에 돌아와 가진 공연은 유명하다.

베르디의 <나부코> 가운데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 1946년 라 스칼라 재개관 공연

토스카니니 이후 스칼라(Scala)의 주인공은 마리아 칼라스(Callas)였다. 마치 그러길 예언하고 철자만 바꿔 지은 이름인 듯하다. 그녀의 이름과 스칼라의 문장(紋章)이 나란히 들어간 EMI(현재 워너 클래식)의 음반들은 그 자체로 오페라의 전설이 되었다.

<노르마>, 여신 강림
마치, 치마 대 치마... 차마...

1957년 칼라스가 에든버러 축제에 참가했을 때 라 스칼라와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초 라 스칼라는 축제 측과 네 차례의 <몽유병 여인La sonnambula> 공연을 기획했지만,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자 1회를 추가했다. 칼라스는 이미 녹초가 되어 계약에 없는 공연을 거부하고 떠났다. 축제 측은 칼라스를 비난했고, 라 스칼라도 그녀를 비호하지 않았다. 전성기의 칼라스가 부르는 아니나를 들으면 떠나버린 그녀가 야속했음이 당연하다. 칼라스의 부재는 한 사람의 스칼라 유망주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으니, 다섯 번째 추가 공연의 대역이 레나타 스코토였다.

칼라스의 에든버러 공연 실황 가운데

1971년 레나타 스코토는 베르디의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로 라 스칼라 무대에 섰다. 그러나 출연진에게 가혹한 평가를 내리기로 악명 높은 라 스칼라의 청중은 무대를 향해, “브라바, 칼라스”를 외치며 “마리아, 마리아”를 연호했다. 그날 좌석에서 후배를 지켜보던 칼라스는 그런 외침을 듣지 못했고, 공연이 끝난 뒤 기립박수를 보내 훼방꾼들을 무색하게 했다.

바로 그 시즌 스코토의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최종 리허설(1970년 12월 4일)을 누가 올려놓았다. 칼라스가 옳았다!

1988년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는 특별한 녹음을 가졌다. 토스카니니의 사위였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이들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녹음한 것이다. 지휘는 호로비츠의 바람대로 악단의 옛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맡았다. 호로비츠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 완벽한 오페라이며, 그것을 이해하는 파트너로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를 선택한 것이다(줄리니는 똑같은 이유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어린 크리스티안 지메르만과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그 특별한 기록이 고스란히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호로비츠는 아내 완다에게 “여기서 내가 제일 늙었어”라고 말하지만, 댓글에 달린 것처럼 그가 가장 어려 보인다. 모차르트가 그 나이였다면 아마 호로비츠처럼 천진난만하지 않았을까.

호로비츠 부부는 늘 남편이 더 할머니 같고, 완다는 아버지처럼 좀 무서워 보인다.

전후 빅토르 데 사바타 다음으로 라 스칼라를 오래 이끌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2014년 1월 타계하자, 당시 음악감독이던 다니엘 바렌보임이 추모 음악회를 가졌다. 베토벤 교향곡 3번 2악장 ‘장송 행진곡’이 극장 안에서 연주되는 중에 라 스칼라 ‘광장’을 가득 메운 청중이 추운 날씨에도 아바도를 추억하며 자리를 지켰다. 역시 밀라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 뒤에 열린 극장 문 밖으로 광장의 시민들이 서서 듣는 형국이다. 다빈치의 석상과 함께.

이렇게 밀라노의 도시 기능은 사실상 라 스칼라를 위해 작동한다.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패션, 디자인, 조명, 기계설비와 같이 밀라노를 먹여 살리는 주요 산업이 오페라를 ‘테스트베드’로 삼는다. 밀라노에서는 심지어 교회마저 오페라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로시니의 <모세>를 공연할 때 밀라노 대성당을 미디어 파사드로 제공한 것이다. 구약의 주인공을 주제로 한 오페라이긴 하지만, 같은 일이 로마라도 가능했을까?

모세 역을 맡은 루제로 라이몬디의 또 다른 장기인 리골레토나 돈 조반니였더라도 가능했을까?

이렇게 라 스칼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오페라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나는 이번 밀라노 체류 동안 세 개의 공연을 관람했다. 먼저 이 극장과 가장 이질적인 독일 가곡 리사이틀이다. 미국 바리톤 토머스 햄슨이 슈만과 말러의 가곡을 불렀다. 1955년생으로 숱한 정상급 무대를 주름잡았고, 이제는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햄슨은 이번 시즌에야 <돈 조반니>로 라 스칼라에 데뷔했다. 그만큼 문턱 높은 이곳은 성악가에게는 꿈의 무대이다. 오페라가 쉬는 날 그의 단독 리사이틀을 만나는 경험도 흔치 않다. 최근 유행처럼, 그리고 자신의 음반과 마찬가지로 햄슨은 <시인의 사랑>의 초판본을 노래했다. 옛 독일 거장들의 노래에 익숙했던 과거에는 이 초판본이 신성모독처럼 들렸지만, 지금은 어느 쪽으로 따라 부를지 맘속으로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시인의 사랑> 가운데 "원망하지 않으리"

오늘 로열 박스에는 내일 도니체티의 <안나 볼레나>를 지휘할 이온 마린이 앉았다. 내일 객석에는 햄슨이 앉아 있을까? 라 스칼라에 흔치 않은 독일 가곡의 밤을 즐기며, 그리고 다음 달 있을 오페라 데뷔의 성공을 기원하며, 훈훈한 매너의 햄슨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무대, 이것이 밀라노의 실력이다

이튿날은 도니체티의 벨칸토 오페라 <안나 볼레나>. 주역을 맡은 히블라 게르츠마바는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스타 가수 안나 네트렙코와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 소프라노다. 네트렙코가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게르츠마바가 폐막식을 빛냈다면 소개가 쉽겠다. 남편 헨리 8세의 오해에 속절없이 무너지지만, 자신의 결백을 힘 있는 목소리로 부르짖는 앤 불린 역할에서 그녀는 도니체티 음악의 핵심인 ‘전율’을 끌어냈다.

(7:52) "올림픽 왈츠"란다. 게르기예프 대통령인 줄..

제인 시모어 역 소냐 가나시의 원숙한 존재감도 명불허전이었고, 앤의 옛 애인 리처드 퍼시를 부른 테너 피에로 프레티는 게르츠마바 다음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파바로티와 카레라스가 나란히 인정했던 이온 마린의 지휘는 흐르는 물을 끓어오르게 할 만큼 극과 일치되었다.

햄슨의 리사이틀과 <라 가짜 라드라>의 포스터. 진짜다

다음 날인 15일 음악감독 리카르도 샤이는 이 극장에서 초연된 지 200주년을 맞은 로시니의 <도둑까치La gazza ladra>를 지휘했다. 금붙이를 몰래 물어가는 까치 탓에 손버릇이 나쁘다는 오해를 산 착한 하녀가, 결국은 누명을 벗고 행복도 되찾는다는 이야기다. ‘지휘의 교본’으로 꼽는 서곡이 나올 때부터 기대가 부풀었다. 로시니 배역으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부터 젊은 유망주들까지 앙상블은 빈틈이 없었다. 라 스칼라가 자랑하는 연극과 미술, 무엇보다 음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내가 본 바로 그 공연이다!

최근 오페라는 연출의 지나친 개입이 음악의 흐름을 방해하는 일도 잦지만, 두 공연은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안나 볼레나>의 무대는 절제했으되 결코 차가운 미니멀리즘이 아니었다. 조명의 변화는 극의 몰입을 도왔고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는 지점까지 섬세하게 계산되었다. 반면, 서곡 외에 공연이 많지 않은 <도둑까치>의 무대는 눈을 뗄 수 없이 다채로웠다. 인형극과 줄타기 곡예를 도입한 해석은 객석의 웃음과 탄성을 연발케 하면서도 음악의 흐름을 해치지 않았다.


기대처럼 완벽한 경험이었을까? 로시니와 도니체티는 모든 영광을 생전에 누렸다. 이들의 인기를 두고 대중의 속됨을 한탄한 두 사람이 바로 베토벤과 베를리오즈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독일이 갖지 못한 저변을 바탕으로 찬란한 전통을 일궈냈다. 독일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현실을 넘어선 관념의 돌파구를 추구했다. 라 스칼라의 예술감독 리카르도 샤이는 양쪽 모두에 정통한 사람이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진실에 이를 수 없음을 잘 안다. 앤 불린이 사랑도 명예도 모두 갖고자 한 것처럼, 그리고 밉상인 도둑까치가 결국은 행복의 전도사가 되는 것처럼 어떤 숭고한 예술가도 이상(理想) 때문에 대중을 외면할 수 없음을 생각한 사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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