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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05. 2019

밀라노의 짝퉁과 진품

브레라 미술관과 론다니니의 피에타

밀라노의 편집 기술을 살펴보았다


밀라노의 심장인 두오모 광장에서 성당을 바라보고 왼쪽에 자리한 쇼핑 아케이드 ‘갈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Galleria Vittorio Emanuele II’를 통과하면 다 빈치 석상이 있는 스칼라 광장과 오페라 하우스가 나오고 그만큼 같은 방향으로 더 올라가면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에 도착한다. 옛 추억의 스카라 극장과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이 모두 밀라노에서 가져온 짝퉁인 것이다.


그러나 브레라 미술관도 거대한 짝퉁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가 조각한 <평화의 중재자 마르스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e Bonaparte come Marte pacificatore>는 이름부터 말이 안 된다. 마르스는 평화는커녕 로마의 군신(軍神)이고 나폴레옹 또한 그가 통치했던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던 위인 아닌가! 그뿐이 아니다.

유지방 3.4% 우유라고 있었는데, 이 나폴레옹도 그 우유 마시고 3.4미터가 되었나 보다

브레라 미술관 청동상의 원본은 현재 런던의 웰링턴 저택인 앱슬리 하우스(Apsley House)에 소장되어 있다. 카노바의 나폴레옹의 위촉으로 대리석상을 조각했지만, 정작 나폴레옹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퇴위한 뒤에 영국 왕실이 카노바로부터 구입해 웰링턴에게 선사했다. 웰링턴은 계단에서 내려올 때마다 높이 3.4미터에 이르는 거대 석상의 머리를 쓰다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미리 알았던가!

베토벤이 쓴 곡 중 당대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웰린턴의 승리>, 주인공이 총출동한다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의 청동상은 프란체스코 리게티가 산탄젤로 성의 대포를 녹여 주조했고 뒷날 현재 자리로 옮겼다. 청동상도 원작과 같이 오른손에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 지구를 딛고 선 도금상을 덧붙였다. 그러나 1978년에 도난당한 뒤 현재 청동 짝퉁으로 대체되었다.

화룡점정일세!

카노바는 이 조각을 아껴서 석고상으로도 만들었다. 역시 브레라 미술관 내부에 서 있다.

승리의 여신이 날아갔다

브레라 미술관은 로마나 피렌체의 미술관에 비하면 좀 편집된 느낌이다. 로마나 피렌체가 그 고장 창작품도 전부 전시할 여유가 없을 지경이라면, 브레라의 소장품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밀라노 브레라'라는 브랜드를 만든 것 같다는 말이다.

홀바인의 <그리스도의 주검>이 바로 이 그림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만토바의 거장 안드레아 만테냐는 자기 무덤에 가져갈 뜻으로 걸작 <그리스도 애도Lamento sul Cristo morto>를 그렸지만, 그가 죽은 뒤 아들이 빚을 갚기 위해 팔아 현재의 자리에 왔다. 손과 발에 뚫린 구멍과, 원근법을 무시하고 압축해 그린 그리스도의 주검이 숙연함을 자아낸다. 어쩌면 화가가 자신의 무덤이 아닌 외딴 공공장소에 나와 있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기가 두른 붉은 산호 목걸이는 삶과 죽음, 구원의 상징이다

‘브레라의 마돈나’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도 딱히 밀라노를 위한 그림은 아니다.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와 무릎을 꿇은 기사가 주인공이다. 기사는 당대 제일의 용병 대장이자 우르비노의 공작이 되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 1422-82)이다. 몬테펠트로는 특이한 외모 덕에 어디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마상시합 중에 한쪽 눈을 잃은 탓에 늘 옆모습만 그리게 했다. 또한 한눈으로도 반대쪽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콧등을 텄다.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델라 프란체스카의 몬테펠트로 부부 초상, 원경이 압권이다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은 몬테펠트로 아들의 탄생을 축하해 위촉되었다고 전하고, 마리아와 예수가 바로 몬테펠트로의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와 그들의 아들 귀도발도인 것이다. 아내가 스포르차 가문 태생이고 그 자신도 밀라노를 위해 여러 차례 싸웠지만 아기가 태어난 곳은 움브리아 지방이고 가문의 영지는 우르비노이다.

타조알치곤 좀 작아 보인다

정작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은 애프스(반구형 천장)의 조가비에 매달린 타조알이다. 타조는 몬테펠트로 가문의 문장이기도 하고 조개와 알은 모두 창조, 탄생을 의미한다. 마치 20세기 초현실주의를 미리 만나는 것과 같다. 알과 관련된 음악이 무엇일까? 무소륵스키는 <전람회의 그림>에 ‘껍질을 깬 병아리들의 발레'라는 곡을 넣었다. 이 그림과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니다.

음반 맨 아래 껍질을 벗은 병아리가 보인다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에서 이반 왕자는 마왕 카셰이의 영혼이 든 알을 깨뜨리는 것으로 저주를 푼다.

러시아 악단이 성났다

이 또한 천장에 매달린 엉뚱한 알만큼이나 그림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렇게 그림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누가 보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한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엉뚱한 음악을 들으며 다음 그림으로 넘어간다.

잉그리드 버그만, 빙 크로스비 주연 <성 메리의 종>, 너무 길면 (4:00) 정도부터 보면 된다
역시 라파엘로는 참 미남이다, 저기

사실상 브레라 미술관 최고의 걸작이랄 라파엘로의 <동정녀의 결혼식>이다. 부유한 상인 필리포 알비치니가 치타 델 카스텔로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를 위해 젊은 라파엘로에게 주문한 재단화였는데, 1798년 나폴레옹 군대가 찬탈했던 것을 되찾아 브레라로 가져왔다. 그림이 있던 원래 교회에는 모사품을 걸어 놓았다.

원래 있어야 할 시골과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대도시, 어디가 맞는 장소인가?

왜 이 그림이 최고이냐고? 그냥 느낌이 그렇다. 그림 아래 나 같은 문외한을 위한 감상법이 적혀 있다. 바로 내가 느낀 그대로이다.

그림 안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보라. 방해하지 않고 전면의 혼례를 지나가자. 걸어서 광장을 지난다. 돌 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사원에 다가간다. 마침내 계단에 도착했다. 올라가자! 문이 열린다.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자. 둥글게 둥글게 벽이 둘러 있다. 아니면 혹시 거기 선 저분이 당신 아닌지? 돔으로 올라간다. 어질어질하다. 문으로 나가니 청명한 하늘이 보인다. 무엇이 보이는가?  

꼭 해설이 적혀서가 아니라 누구나 그림 앞에 선 사람은 그런 느낌을 받게 마련이다. 파울 힌데미트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동명 시에 붙인 <마리아의 생애Das Marienleben>를 썼다.  

     마리아의 탄생   

     성전의 설교    

     수태고지   

     마리아의 방문   

     요셉의 의심   

     양치기들에게 탄생을 고함   

     예수 탄생   

     이집트 피신 중의 휴식   

     가나의 결혼식   

     수난   

     피에타   

     부활로 안도하는 마리아   

     마리아의 죽음 I   

     마리아의 죽음 II   

     마리아의 죽음 III   

그러나 이 안에 마리아의 결혼은 빠졌다. 사실 어디서도 마리아의 결혼식에 대한 이미지를 찾긴 글렀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수녀라면 모를까.

How do you hold a moonbeam in your hand?

그러나 잘츠부르크 파이프오르간의 거대한 음향은 라파엘로의 단아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그림과 어울리지 않는다. 거기다 우리는 예식을 방해하지 않고 조심조심 걸어 사원 위로 올라가 주위의 장관을 둘러봐야 한다. 이 놀라운 예식이 미칠 뒷날의 파장까지 말이다. 어쩌면 바그너의 <로엔그린> 가운데 ‘엘자의 결혼식 행렬'이 비슷한 분위기를 낼 것이다.

이 곡에 이어 3막 전주곡과 <혼례의 합창>이 나온다. 결혼식 신부 입장 때 피로연 축가를 연주하는 셈이다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나 세간티니의 목초지 풍경과 같은 걸작도 모두 밀라노와 딱히 연관은 없다.

소들은 편히 풀을 뜯고, 주님은 편히 빵을 뜯으시고...
클림트의 그림 제발 키스라고 하지 좀 말자. 무식해 보인다

거의 마지막 방에 이르러서야 프란체스코 아예츠(Francesco Hayez, 1791-1882)의 <입맞춤Il bacio>을 만난다. 아예츠야말로 장년 시절부터 밀라노에 자리를 틀었고, 브레라 아카데미 학장으로 재임하던 1859년에 <입맞춤>을 완성했다. 이탈리아 통일의 열망이 가장 힘차게 불타오를 때였고, 이 그림 또한 그런 바람을 함축한다. 여행복 차림의 남자와 하늘색 비단 드레스를 입은 귀인의 입맞춤은 정치적인 검열을 피하는 좋은 소재였다. 무사귀환을 기뻐하는 것인가, 언제일지 모를 재회를 기약하는 것인가? 아마도 둘 모두이리라. 이탈리아 오페라의 많은 주인공이 이런 모습이었다.

<일 트로바토레> 가운데 "타오르는 불꽃을 보라"

베르디 <에르나니>의 에르나니와 엘비라, <일 트로바토레>의 만리코와 레오노라 그리고 뒷날 푸치니 <토스카>의 두 주인공이 압제에 맞서 싸우며 동시에 짧고 애절한 사랑을 표현했다. ‘마지막’ 일지 또는 ‘마침내’ 일지 모를 두 사람의 조우 뒤로 어두운 구석에 사악한 펠리페 2세가, 음흉한 루나 백작이, 죽어가는 스카르피아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모든 오페라 가운데 가장 사악한 스카르피아. 그 분신이 된 브린 터펠. 이거보다 못할 거면 하지 말자
레고 성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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