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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17. 2019

푸니쿨리 푸니쿨라, 오르고 또 오르면...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과 폼페이 유적

벨칸토의 본고장을 지나 저승의 입구까지 돌아본 하루... 지난 1년의 연재가 찰나와 같다


나폴리는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그리스 사람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로마 제국 때도 융성했고, 12세기까지는 비잔틴 제국의 공작령으로 있다가, 이어 19세기 초까지 왕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나폴리 왕국은 프랑스 앙주 왕가와 아라곤 왕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차례로 받다가 나폴레옹의 치하를 거쳐 시칠리아 왕국과 통합한다.


18세기 나폴리는 런던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그 시절 중심인물은 해밀턴 부인(Lady Hamilton)이다. 영국 태생인 그녀의 본명은 에이미 리온(Amy Lyon)이었는데 뒷날 에마 하트(Emma Hart)로 바꾸었다. 대장장이의 딸 에마는 젊어서 런던 드러리 레인 극장의 하녀로 일하다 여러 사창가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워위크 백작의 막내아들 찰스 프랜시스 그렌빌의 눈에 들어 그의 정부가 된다. 그렌빌은 에마를 사랑해 친구인 화가 조지 롬니에게 그녀를 그리게 했다. 그녀의 미모는 그렌빌뿐만 아니라 롬니까지 사로잡을 정도로 빼어났다. 롬니는 평생 그녀에 몰두했다. 왕실 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도 그녀를 그렸다.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서 본 에마 하트

그렌빌은 에마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었고, 심지어 이를 위해 재산이 많은 여인과 결혼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에마를 숙부인 나폴리 공사 해밀턴 경에게 잠시 맡기기로 했다. 일단 결혼한 뒤 다시 그녀를 데려올 생각이었지만, 그러는 사이 그녀는 이미 숙모가 되어 버렸다.

해밀턴 부인 시대를 상징하는 나폴리 신 궁전

해밀턴 경 또한 에마에 깊이 빠졌고, 그녀는 나폴리 사교계의 꽃이 되었다. 그녀가 입는 옷, 자태, 파티의 메뉴가 빠짐없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롬니의 모델이었고, 그녀의 포즈는 그 자체로 공연이 되었다. 그 모습에 전 유럽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그 가운데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 이집트 나일 강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에 대승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나폴리로 개선한다. 위풍당당한 제독과 아름다운 공사의 아내가 사랑에 빠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든버러 대학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넬슨 미사> 공연. 지나간 얘기이지만 성 안드레아가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다. 그래서 국기가 X자

1800년, 넬슨과 그의 연인 해밀턴 부인이 오스트리아의 에스테르하지 궁전을 방문했을 때 궁정 음악가 하이든은 자신이 이전에 쓴 <깊은 슬픔의 시대 미사Missa in angustiis>를 연주했다. 하이든은 넬슨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많았지만 이 위대한 전쟁 영웅을 높이 평가했고, 그의 눈부신 승전과 같은 시기에 작곡된 자신의 미사곡을 당사자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했다.


감동한 넬슨은 이집트에서 자신이 찼던 금시계를 하이든에게 선물했고, 하이든 또한 해밀턴 부인을 위해 짧은 칸타타를 쓰면서 사용한 펜을 제독에게 주었다. 이후로 <깊은 슬픔의 시대 미사>는 ‘넬슨 미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얘기에 영화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불세출의 미모를 연기할 사람은 비비안 리뿐이다. 그녀와 넬슨 역의 로런스 올리비에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각자의 배우자를 버리고 함께 살기로 했다.

롬니의 초상화 못지않다

영화 가운데 이들이 산 카를로 극장(Teatro di San Carlo)에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보는 장면(43:30)이 나온다. 17세기 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를 시작으로 약 100여 년 동안 나폴리는 오페라의 중심이었다. 포르포라와 빈치, 페르골레시, 트라에타, 파치니, 파이시엘로, 치마로사로 이어지는 계보가 곧 오페라의 역사였다.


그 가운데 발군은 불과 26세에 세상을 떠난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36)이다. 종교곡 <슬픔의 성모Stabat Mater>와 막간 코미디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 두 작품만으로도 페르골레시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만하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마저 후배의 <슬픔의 성모>에 시편 가사를 붙여 편곡(Tilge, Höchster, meine Sünden, BWV 1083)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바로 이 공연이 페르골레시의 앙코르로 바흐를 다시 불렀다

나폴리 악파의 가장 큰 성과는 오페라를 ‘바로 지금’의 이야기로 끌어내린 데 있다. 신화와 설화 속 영웅호걸, 그리고 마법과 불가사의한 ‘기계신Deus ex machina’을 버리고 현실 속의 인물이, 또 바로 오늘 아침에 겪은 일이 오페라의 소재가 되었다.

디에고 파솔리스가 지휘하고 소녀 욘체바가 부른 스위스 이탈리아 TV 공연. 최고이다!

<마님이 된 하녀>에서 움베르토는 나폴리의 여느 상류층 시민처럼 초콜릿을 마시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그러나 하녀 세르피나가 밥때가 다 되었는데, 웬 초콜릿이냐며 주인을 나무란다. 주인은 세르피나의 잔소리가 싫으면서도 어느덧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더 나아가 움베르토는 그것이 세르피나를 향한 사랑임을 깨닫는다. 하녀 세르피나는 레이디 해밀턴처럼 안주인이 되었다.


1770년 나폴리를 찾은 어린 모차르트는 이전에 런던에서 만난 적이 있는 해밀턴 대사의 환대를 받으며 산 카를로 극장에서 니콜로 욤멜리의 <버려진 아르미다Armida abbandonata> 초연을 참관했다. 최고의 공연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소년은 “이 극장에 너무 낡고 무거운 작품이었다”라고 평했다. 그렇게 그는 페르골레시가 연 오페라 부파의 시대를 예감했던 것이다. 결국 모차르트가 이탈리아에서 배워간 것 덕에 오페라 부파의 주도권은 빈이 갖게 된다. <피가로의 결혼>과 <코지 판 투테>는 이 장르의 절정이었다.

<코시 판 투테>의 무대가 바로 나폴리인 점을 상기시키는 가드너의 공연

물론 나폴리는 그 뒤로도 이탈리아 오페라의 맹주이자 자존심으로 자리를 지킨다. 특히 도메니코 바르바야라는 임프레사리오(극장 감독)는 극장 경영에 획기적인 방식을 도입했으니, 로비에 카지노를 연 것이다. 판돈을 극장 운영에 쓴 아이디어는 탁월했다. 빈을 비롯해 바덴바덴, 비스바덴과 같은 휴양지가 이 방식을 따랐고, 모나코의 몬테카를로가 궁극의 모델이다.


바르바야가 기용한 조아키노 로시니와 가에타노 도니체티, 빈첸초 벨리니를 빼놓고 오페라를 논할 수 있으랴! 테너 마누엘 가르시아와 그의 딸 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주디타 파스타, 이사벨라 콜브란의 이야기를 하자면 나폴리에 며칠을 더 머물러야 한다. 다만 벨칸토 역시 내 관심사에서 한참 뒤로 밀린다.

나탈리 드세가 부른 <루치아>의 '광란의 장면'. 역시 스코틀랜드가 무대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19세기 중반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나폴리의 음악은 급속히 쇠퇴한다. 중심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로 옮겨갔다. 또한 열악한 하수도 시설 탓에 콜레라가 창궐했고, 아메리카로 향하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입구가 급격히 줄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도시가 낳은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였다.

테너 마리오 란차가 출연한 <위대한 카루소> 가운데

커피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거리의 가수로 전전하던 카루소는 우여곡절 끝에 나폴리 테아트로 누오보에 데뷔했지만 혹평을 받는다. 그 뒤로 그는 다시는 고향 무대에 서지 않기로 했고, 토스카니니와 더불어 미국으로 건너가 대성공한다. 카루소는 막 도래한 레코딩 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산 카를로 극장 로비에 뒤늦게 모신 카루소 두상. 뒤에 잡힌 본인

고향에는 스파게티를 먹을 때만 가겠다던 카루소의 저주 때문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의 폭격을 가장 심하게 받은 도시가 나폴리였다. 20세기 후반 나폴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피자도 아닌 아르헨티나에서 온 축구영웅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수천 년 지중해 경제와 오페라의 중심지였던 나폴리는 그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 앉았다. ‘푸니쿨리 푸니쿨라’를 들으며 폼페이로 가본다.

니벨룽으로 가는 신들을 태운 열차인가!

1880년 바다 건너 베수비오 화산에 산악열차 푸니쿨라가 설치되었다. 서기 79년 폼페이의 멸망을 가져온 대폭발의 공포는 아직 가시지 않아서 사람들이 열차를 타지 않았고, 그래서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6년 뒤 22세의 젊은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곳을 찾았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교향시 <이탈리아로부터Aus Italien>를 썼고 4악장에 ‘푸니쿨리 푸니쿨라’의 선율을 인용했다. 이탈리아가 아니었다면 독일 음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 또한 나폴리 태생이다

잿더미가 된 폼페이의 모습은 진시황릉의 느낌과 유사하다. 시간을 묻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 찰나의 순간에 매몰된 영광이 박제와 같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다. 이들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재로 변한 폼페이 소년과 진흙으로 만든 진시황의 병정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는 나폴리 광장에서 본 풀치넬라 인형극에 음악을 붙였다. 바로크 시대의 느낌을 주기 위해 페르골레시를 비롯한 당대 음악을 자기 방식으로 편곡했다. 사실상 표절이었지만 그것을 ‘신고전주의’라고 불렀다. 파블로 피카소가 무대를 꾸미고 레오니드 마신이 춤을 춘 발레 <풀치넬라>로 스트라빈스키는 1930년대를 풍미한다.

폼페이의 융성함을 보여주는 원형극장. 거의 원형 그대로이다
나폴리 플레비시토 광장의 인형극사가 풀치넬라를 가지고 논다
취리히 극장의 영상물을 몇 번이나 보았던고

<풀치넬라>의 끊이지 않는 선율의 매력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바그너를 잊는다. ‘무한 선율’이 웬 말이냐!

로마로 가는 길에 포추올리를 지난다.

쿠마의 시조인 트로이 왕자 아이네이아스가 저승으로 가기 위해 도착한 쿠마에(Cumae)가 바로 이곳이다. 그는 쿠마의 무녀 시빌의 도움으로 저승으로 가는 열쇠 황금가지를 얻는다. 동대문 경동시장에서 한약재로 파는 겨우살이이다. 그것으로 저승의 입구 아베르노를 통과해 자신이 버린 디도의 혼령과 작고한 아버지를 만난다.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세 줄로 요약하는 절제력을 발휘했으니 앞서 못마땅했던 벨칸토 팬들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터너가 시빌과 에네아스를 그리지 않았을 리가 있는가!

우리의 관심사는 아이네이아스가 아니라 쿠마에의 무녀 시빌이다. 먼저 음악으로 그녀를 만나보자. 모차르트의 <레퀴엠> 가운데 ‘분노의 날Dies Irae’ 첫 부분이다.

분노의 날, 바로 그 날
세상이 불꽃으로 녹아내리리다
시빌과 함께 하는 다윗의 증언으로

베르길리우스가 <에네이드>에서 메시아의 예언자 가운데 하나로 그녀를 지목한 덕에 미켈란젤로도 <천지창조>의 한 귀퉁이에 그녀를 그려 넣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가운데 시빌과 롬니가 그린 <시빌로 그린 에마>

그리고 마침내 T. S. 엘리엇이 <황무지The Waste Land,1922>의 제명으로 그녀를 불러낸다. 페트로니우스(<쿼바디스>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로 쿠마에에서 자결했다)가 <사티리콘>에 적은 트리말키오의 이야기를 다시 인용했다.

정말로 한 번은 쿠마에의 시빌이
그녀의 항아리에 매달린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소년들이 그녀에게 물었다.
“시빌, 뭘 원해요?”
그녀는 답했다.
“죽고 싶어.”

아폴로는 자신을 섬기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녀는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생명을 빌었다. 소원대로 되었지만, 그녀는 불노(不老)를 함께 청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샤일록이 1파운드의 살과 함께 피도 갖는다는 조항을 잊은 것처럼,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마법사가 스스로 램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처럼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만 것이다. 결국 해가 갈수록 줄어든 시빌을 아이들이 항아리에 넣고 놀려대기에 이르렀다. 엘리엇은 현대인이 시빌과 같은 상태임을 지적하고자 이 고사를 인용했다.


이탈리아에서 보낸 한 때. 영원한 것은 없다. 이탈리아의 오페라도 독일의 교향곡도 결국엔 그 효용을 다한 채 폼페이의 유적이 되어 간다. 나는 시빌처럼 잊은 것이 없을까? 늘 많은 것을 잊는다. 그러면서 또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 하는 수 없이 선배 이탈리아 여행자가 <파우스트>에 쓴 말을 떠올리며 <이탈리아 음악 여행기>를 마무리한다.

‘길을 잃게 마련이다, 노력하는 한은’
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

연재에 성원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Arcangelo Corelli: Christmas Concerto, Adagio Op. 6 No. 8 by Voices of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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