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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17. 2019

아말피의 달빛 소나타와 마법 정원

포시타노, 아말피, 라벨로

아말피 해변의 페리 투어에서 만난 음악들은...


토리노를 떠나 나폴리로 향하기 전에 왕립 극장에서 칸초네를 하나 들어본다. 밀라노 태생의 작곡가 조반니 단치가 쓴 ‘이렇게 살련다Voglio vivere così’를 요나스 카우프만이 불렀다. 벌써 캄파냐 지방의 훈풍이 불어온다.

가라, 내 마음이여, 꽃에서 꽃으로
행복과 사랑으로 나를 향해 가라
이렇게 살련다
얼굴에 햇볕을 쏘이며
즐겁게 복되게 노래한다
왜 칸초네 공연을 토리노에서 열었는지...

노래가 끝나자마자 소렌토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시작해 포시타노, 아말피, 라벨로로 이어지는 해안선은 우리나라로 치면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해당한다. 

제임스 본드나 리플리가 타고 올 것만 같다

영화 <토스카나의 태양Under the Tuscan Sun>에서 주인공 다이앤 레인이 로마에서 만난 훈남을 무턱대고 따라 도착한 곳이 포시타노이다.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자아를 찾기 위해, 아니 그보다는 막연한 힐링을 위해 떠난 이탈리아 여행 중에 덜컥 시골 빌라를 사버린 그녀. 뜻하지 않은 로맨스에 부풀어 포시타노를 찾았지만, 그 또한 물거품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영화에서는 한적한 어촌처럼 보이지만 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관광지이다.

바람맞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포시타노에 방문할 사람이 있다.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 1895-1991)가 만년을 이곳에서 보냈고, 그 자택은 현재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쓰인다. 빌헬름 켐프 재단의 이사이며, 역시 이곳에서 멋진 배움을 얻은 홍천이가 말한 것처럼 아름다운 포시타노에서도 최고의 경관을 볼 수 있다.

현재 재단은 할머니 한 분이 지킨다. 아네테 폰 보데커(Annette von Bodecker) 여사는 1959년부터 1991년까지 32년 동안 켐프의 개인 비서로 일했다. 어쩌면 그가 타계한 뒤로도 그 일을 지속 중이니 올해로 60년째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평소 휴대전화를 잘 쓰는 않는 노인이다 보니 몇 번이나 엇갈린 끝에 겨우 통화가 되었고, 언덕 중턱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빨간 재킷의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다시 언덕을 꼬불꼬불 올라가자 오르페오 재단이라고 적힌 건물이 나왔다.

내가 찾았을 때는 영화 <토스카나의 태양>에서처럼 수리가 한창이어서 집안 구석구석을 보여주지 못해 미안해하신다. 영화에서는 폴란드에서 온 문학 교수가 노벨상 수상 작가 체수아프 미워시의 시집을 끼고서 잡일을 했지만, 여기 인부는 본토박이인 것 같다.

포시타노의 유명한 일화는 켐프가 이곳에서 베토벤의 달빛 소나타를 연주할 때 진짜 구름 속에서 보름달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솔직히 루체른 호수의 달빛을 보고 제목을 지었다는 시인 루트비히 렐슈타프보다 이쪽의 에피소드가 더 공감이 간다.

늘 모범답안인 것만 같은 켐프의 연주

보데커 여사는 젊은 시절 전쟁을 겪고 서독으로 건너왔다. 현대사의 혹독한 고비를 넘긴 만큼 독일의 과오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가졌다. 바그너를 싫어하고, 토마스 만의 권위주의도 못마땅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남자가 자기 나라 음악에 그토록 관심이 많은 것이 희한할 법하다.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는 로베르트 슈만이다. 요즘 인기 있는 젠체하는 젊은 피아니스트들도 뭉뚱그려 깔아뭉갠다. 한 마디로 ‘켐프 스타일’만 인정한다. 단순 소박하고 정직한 음악을 지향하는 것 말이다. 슈만의 <후모레스케>에 대해 많은 얘길 나눌 수 있겠지만, 우리의 영어가 그 정도로 능숙하지 않고, 무엇보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2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음반을 참 많이도 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한 뒤에 작별했다. 마치 <잊지 못할 사랑>의 빌프랑슈 쉬르 메르와 속편 <러브 어페어>의 타히티에서, 홀로 사는 숙모를 짧게 방문했다가 뱃시간에 맞춰 떠나는 주인공들 같지 않나? 이별곡으로 켐프가 편곡한 바흐의 <마음과 입과 행동과 삶으로> 가운데 ‘예수, 인류가 소망하는 기쁨’을 제안하자 흔쾌히 공감한다.

이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도 가야 하나?

다이앤 레인이 거닐던 포시타노 해변에는 우리를 아말피로 데려갈 배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관광객이 아니면 유지가 안 되는 형편이지만, 과거 아말피 공화국은 지중해 무역의 주요 거점이었다.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안드레아 성인의 유골을 모신 성당이 도시의 중심이다.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는 형과 달리 유순한 성격 탓인지 많은 일화가 전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뒤에 그리스에서 붙잡혀 순교할 때 X자형 십자가에 달리기를 청했다고 한다. X가 그리스 말로 그리스도의 첫 글자이기 때문이었다. 성당 앞 광장에 그를 형상화한 분수대가 있다. 같은 모습은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도 있다.

성 안드레아 십자가 분수

짧은 아말피 체류 시간 동안 관광객들은 젤라토를 사 먹고 지역 특산물인 레몬으로 담근 독주 리몬첼로를 사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음악 칼럼니스트에게 이곳은 클링소르의 공간이다. 만년의 바그너가 바로 인근 라벨로의 루폴로 빌라에서 클링소르의 마법 정원을 구상했다.

꽃처녀들의 유혹을 받는 파르지팔: 도밍고와 안나 네트렙코의 첫 만남 (2:02)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에서 클링소르는 원래 성배의 기사였다. 그러나 성심을 잃고 타락해 성배와 성창을 빼앗아 간다. 성배의 성 밖 자신의 정원에 미녀들을 두고 성배를 구하러 오는 기사들을 홀려 어둠의 기사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파르지팔이 그를 찾아가 유혹을 물리치고 성배와 성창을 되찾는다. 과연 빌라 루폴로의 광경은 지상낙원 그 자체이다. 누가 이곳을 벗어나고 싶으랴! 보데커 여사가 바그너를 더욱 싫어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바그너가 여기서 니체에게 <파르지팔>을 열심히 들려줬으니, 그가 바그너를 얼마나 속물로 보았겠는가? 바그너는 정말 클링소르일지도 모른다.

클링소르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2막의 마지막 대사가 끝내준다. 마법사를 죽이고 성창을 빼앗은 파르지팔이 요부 쿤드리에게 말한다.

“어디로 가야 날 찾을 수 있을지 알겠지!Du weisst, wo du mich wiederfinden kannst!”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에서 여성 스파이 ‘일사’(역시 <로엔그린>의 주인공 엘자의 패러디이다)가 톰 아저씨에게 두 번 똑같이 얘기한다. 어떻게든 날 찾아오라는 얘기이다. 

2012년 바이로이트 실황, 연출가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듯..

토마스 만의 <마의 산Zauberberg> 역시 전반부를 같은 대사로 마무리한다. 사육제 파티가 있던 날 쇼샤 부인은 한스에게,

“내 연필 꼭 돌려줘야 해N’oubliez pas de me rendre mon crayon”

라고 말한다. 작가가 두 사람의 대사를 모두 불어로 쓰긴 했지만, 내가 아는 <마의 산>의 번역본은 모두 이 부분을 “내 연필 꼭 돌려주러 와야 해”로 잘못 옮겼다. “돌려줘야 해”와 “돌려주러 와야 해”는 완전히 다르다. 설마 토마스 만이 그렇게 싸구려이겠는가!  솔직히 남의 번역을 베낀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마법의 정원을 무사히 벗어났다

아말피의 위험성당을 뒤로하고 다시 배에 오른다. 내일은 나폴리와 폼페이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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