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기념관과 베나리아 궁전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는 토리노 시민들이 삼삼오오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눈다. 130년 전에 니체가 이곳에서 지냈다. 어느 날 그는 광장에서 마부의 혹독한 채찍질을 받는 말을 목격하고 달려가 부둥켜안은 채 오열하다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유럽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2륜, 4륜 마차와 늠름한 말들을 보면 나도 그런 측은지심을 갖곤 한다. 간혹 말들이 길에 배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후미에 배변 주머니를 매단다. 언덕길을 오르던 말들이 ‘죽을 똥’을 싸는 모습은 정말 끔찍하다. 어쩌면 아등바등 사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무엇을 위한 삶인지 모른 채 쳇바퀴를 도는 신세라면 말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어쩌면 말보다 못한 존재일 것이다. 헝가리의 터르 벨러 감독이 만든 영화 <토리노의 말>이 바로 그런 인간의 처절함을 롱테이크로 잡아낸 문제작이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 니체는 요양원에서 광인으로 11년을 살다가 저세상으로 갔다. 어쩌면 그가 진작부터 부둥켜안고 싶었던 말은 그보다 좀 떨어진 곳에 한 남자를 태운 군마였을지도 모른다. 광장의 이름을 따온 사보이아의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 그를 태운 말은 그래서인지 좀 슬퍼 보인다. 이탈리아 독립을 당대가 아닌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넘겨야 했던 주인의 운명을 예감한 것인가?
오스트리아에 맞서 군대를 일으킨 카를로 알베르토였지만 국내외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1년 만에 쿠스토차와 노바라 전투에서 요제프 라데츠키 폰 라데츠 원수에게 패배하면서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고 물러난다. 빈의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이를 기념해 만국 공용어라 할 만한 유명한 행진곡을 작곡한다. 물론 만국에서 한 나라는 제외해야겠지만!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이 바라보는 카리냐노 궁전은 이탈리아 통일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라 부르는 이탈리아 통일의 과정은 1815년부터 1871년에 이르기까지 반 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 한 번도 통일 국가였던 적이 없던 이탈리아를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으니 어찌 힘들지 않았을까! 그 일련이 과정이 여기에 차곡차곡 전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침략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그의 아들 요제프 2세 황제의 초상화이다. 여제는 어린 모차르트가, 자신이 좋아하던 하세보다 인기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궁정 음악가의 자리를 주지 않았다. 아니면 그보다 전에 당돌한 아이가, 아끼는 딸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에게 청혼했던 것에 대한 뒤끝인지도 모른다. 반면 아들 황제는 잘츠부르크 대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모차르트를 곁에 두는 수를 두었다. 물론 후사가 없던 황제가 음악에 몰두한 때문이기도 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재상 카보우르와 공화주의자 마치니 그리고 니스 출신의 명장 가리발디가 정치와 군사로 통일의 주역이었지만, 문학과 음악이라면 만초니와 베르디를 선봉에 세워야 할 것이다. 베르디의 작품 거반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으로 불타는 주제이다. <1차 십자군 원정의 롬바르디아인>, <나부코>, <에르나니>, <레냐노의 전투>로 이어지는 초기 성공작은 배경이 스페인이나 이스라엘일지라도 외세와 핍박받는 백성이라는 구도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빗댄 것이다.
솔직히 베르디 팬이 아닌 나는 이런 음악에 별 관심은 없다. 일반인 음악 감상 때 가장 유명한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과 <라데츠키 행진곡>과 나란히 들려주어도 후자에만 관심이 있지 베르디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물며 <에르나니>에 나오는 남성합창 ‘일어나라 카스티야의 사자여Si videsti il Leon di Castiglia’나 <레냐노의 전투La Battaglia di Legnano> 서곡은 열렬한 베르디 추종자가 아니면 심드렁할 곡들이다.
이것은 팬이냐 아니냐,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수준 차이이다. 베르디는 유치하다. 바로 그 유치함 덕분에 목마르고 피 끓는 오페라 극장에서 빠르게 인정받았고, 그렇게 얻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좀 더 성숙한 중기작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중기작도 내게는 한참 부족하다. 내가 꼽는 베르디의 걸작은 대개 <오텔로>와 같이 바그너에 기운 후기곡들이다.
그런데 니체는 바로 그런 바그너를 부정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음악으로 구현하기 위해 바그너가 이른바 ‘무한 선율’이라는 최면으로 청중을 현혹해 자신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멜로디’가 사라지고 음악이 미래를 상실했다고 진단한다. 니체가 보기에 생에 충만한 모범은 모차르트, 쇼팽, 비제와 같은 작곡가들이었다. 바그너의 최측근이었던 니체의 상실감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바그너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그 또한 극복해야 할 문제일 뿐이다. 베르디마저 결국 바그너에 기울지 않는가!
토리노에서 유명한 것으로 꼽히는 것이 세례자 요한 대성당에 모신 성의(聖衣, Sacra Sindone)이다. 그리스도의 주검을 감쌌다는 천을 보관 중이다. 헝겊에 희미하게 보이는 모습이 그리스도의 얼굴처럼 보인다고 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는데, 그 내력과 진위가 너무 복잡해서 따라가다가 포기했다. 결론은 진짜가 아니라는 쪽인 듯하다. 왜냐하면 만일 교황청도 확실하게 인정한 진짜라면 토리노와 이 성당이 이토록 한산하지 않고 늘 순례행렬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의나 성배가 진짜이면 어떻고 가짜이면 또 어떤가? 건강과 화목을 비는 이 가족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참뜻에 가깝지 않을까? 만일 그리스도가 재림해서 이 옷을 들고 가 묻는다면 아마도 이러한 답을 들을 것이다.
“아직도 그 옷을 내게 입히려 하느냐? 그런 피 묻은 거적은 제비 뽑아 갖도록 병사들에게나 주어라!”
그리하여 더욱 값나가는 돌체와 가바나를 가져가면 또 이러실 것이다.
“너희는 내 뜻을 그리도 모른단 말이냐? 그 옷을 살 돈이면 수많은 불쌍한 내 백성을 따뜻하게 입힐 수 있거늘!”
내가 아는 기독교의 참뜻은 어떻게 사는가에 달렸지, 무엇을 섬기는가에 있지 않다. 정말로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단테의 지옥에 간다고 믿는가? 그보다는 참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들었다. 그게 쉽지 않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도 가고 절도 가는 것이다. 이제 많은 사람이 내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인정. 단테의 지옥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일단 토리노 교외의 궁전으로 가는 ‘베나리아 익스프레스’를 탄다. 특급이라고 해서 기대했지만 거의 서지 않는 직행이라는 뜻이지 별다른 것은 없다. 날강두가 뛰는 토리노 축구장을 지나 한참을 더 가니 광대한 베나리아 궁전이 나온다. 역시 사람은 거의 없다.
드넓은 궁전을 거닐면서 다시 한번 니체와 바그너를 생각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바그너보다 서른한 살 아래였다. 그는 박사학위도 받기 이전인 스물네 살 때에 이미 스위스 바젤 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되었을 정도로 조숙했다. 니체는 그 무렵 라이프치히에서 바그너와 그의 아내 코지마를 처음 만났고, 마침 바그너 부부가 루체른 트립셴 별장에 머물게 되면서 매우 가까워졌다.
니체는 1872년에 <비극의 탄생>을 발표하면서 바그너의 음악이 새로운 독일 예술의 대안임을 설파했다. 당시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통일 독일의 국운이 극에 달했고, 독일의 문화적인 자존심이 강조되던 때였다. 니체는 바그너 진영의 핵심 이론가였지만, 바그너는 그런 니체를 자원봉사자쯤으로 여겼다. 그런 바그너의 독선에 염증을 느낀 니체는 1876년 독일 남부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를 찾았다가 중간에 돌아간 뒤로 왕래를 끊었다.
두 사람은 1878년 이탈리아 소렌토에서 우연히 재회했다. 바그너는 구상 중인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에 대해 니체에게 설명했다. 그는 이 필생의 역작을 특별히 ‘무대신성축전극’(ein Buhnenweihfestspiel)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성배(聖杯)를 지키는 기사의 이야기가 그 소재였다. 바그너는 이 악극으로 자기 작품을 종교적인 위상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그러나 낡은 전통을 해체해 진보를 꾀하던 니체에게 기독교의 무비판적인 세계관에 대중을 옭아매려는 바그너는 더 이상 존경 대상이 아니었다.
1882년 69세의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완성했다.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은 <파르지팔>의 신비롭고 영적인 분위기를 구현하는 데 이상적이었다. 이듬해인 1883년 2월 13일, 19세기 후반 유럽 문화의 중심인물이던 바그너가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의 유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파르지팔>을 바이로이트 밖에서 연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 스물세 살의 구스타프 말러는 바이로이트를 처음 찾아 바그너 축제에서 <파르지팔>을 관람했다.
바그너가 죽고 말러가 이 오페라의 신비로운 음악에 매료된 바로 그 1883년 여름에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탈고했다. 다음 해 1월에는 마지막 4부가 완성되었다. 니체 스스로 지금까지 쓴 모든 책 가운데 으뜸이라고 생각했다.
1886년 말러는 라이프치히 국립극장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는 다섯 살 연상인 아르투어 니키슈와 공동으로 지휘했다. 니키슈와 말러는 독일 정신의 보고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와 바그너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1887년 11월 30일에 두 사람은 <파르지팔>의 음악을 발췌해서 지휘했다.
1888년과 1891년에 이어 1894년 한스 폰 뷜로가 이집트에서 세상을 떠난 해 여름, 말러는 바이로이트를 네 번째 방문했고 또 한 번 영적인 <파르지팔>의 세계를 경험했다. 1895년 말러는 세 번째 교향곡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했다. 지휘자로 바쁜 시즌을 보냈던 그에게 허락된 작곡 시간은 짧은 여름휴가 때뿐이었다.
잘츠부르크 인근 아터 호숫가 인근 슈타인바흐(Steinbach am Attersee)에 오두막을 지은 그는 매일 아침 여섯 시 반부터 작곡을 시작해 하루 대부분을 여기서 지냈다. 니체가 폭발적인 에너지로 단기간에 저술을 완성했던 것과 같이 전에 없이 거대한 말러의 작품도 솟구치는 영감의 발로였다. 그해와 이듬해 여름 동안 말러는 전체 여섯 악장을 완성했다. 연주 시간이 1시간 반이 넘는, 교향악 사상 최대의 작품이었다.
말러는 교향곡 3번을 온 우주를 포괄하는 유기체로 만들고자 했다. 그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한스 폰 뷜로를 통해 더욱 가깝게 된 니체의 생각들이었다. 여섯 악장에는 각각 ‘여름의 시작, 목신의 깨어남’, ‘꽃들이 내게 말한 것’, ‘숲 속 동물들이 내게 말한 것’, ‘밤이 내게 말한 것’(뒤에 ‘사람이 내게 말한 것’으로 바뀜), ‘뻐꾸기가 내게 말한 것’(‘아침 종소리’로 바뀌었다가 다시 ‘천사가 내게 말한 것’이 됨), ‘사랑이 내게 말한 것’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 제목들은 니체가 <자라투스트라>에 앞서 완성한 <즐거운 학문>으로부터 가져왔다.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는 대자연을 깨우고, 이어서 그 구성 요소들과 차례로 대화한다. 두 번째 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꽃이다. 말러는 슈타인바흐의 아름다운 초원에 핀 꽃들을 작품에 녹여냈다. 그 꽃들은 자라투스트라의 머리에 얹을 화관을 만들 눈부신 것들이다. 3악장 스케르초에서는 이를 비꼰다. 여기서 묘사한 것은 동물들이다.
이 음악들을 쓰는 동안 말러는 가곡집 <어린이의 요술 뿔피리Des Knaben Wunderhorn> 가운데 ‘높은 이성의 찬양Lob des hohen Verstandes을’ 작곡했다. 이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숲 속의 뻐꾸기와 나이팅게일이 노래자랑을 했다. 둘은 누가 더 노래를 잘하는지 가려줄 심판으로 귀가 큰 당나귀를 정했다. 둘은 당나귀에게 날아가 차례로 노래했고, 당나귀는 현란한 노래를 부른 나이팅게일보다는 단순하지만 높은 이성을 노래한 뻐꾸기의 손을 들어줬다. 당나귀는 ‘이-야’(I-ja)하고 소리 내어 울면서 자신의 안목을 자찬한다. 그러나 사실 나귀는 그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동물이다.
뻐꾸기와 나이팅게일, 당나귀 모두 <자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상징이다. 당나귀는 ‘네Ya’라는 대답을 언제나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이-야I-ya’하고 왜곡하는 존재이다. 니체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민심을 져버린 왕, 신앙을 잃은 교황, 홀로 진리를 찾겠다고 길을 떠난 나그네를 한 자리에 모은다. 이들은 ‘지체 높은 분들’이지만, 결국 존재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하고 멍청한 당나귀를 숭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제전을 열고 만다.
말러가 이 악장을 통해 영화 <아바타>와 같이 동물들이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인간에 반응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면 좀 과장이 아닐까. 이 소박하고 천진한 음악은 깨우치지 못한 또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동물 그리고 그 못지않게 우매한 인간에 대한 솔직한 묘사이다. 말러가 니체를 읽었고 그 영향을 이 작품에 녹여냈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4악장에서 우중(愚衆)은 깨달음을 얻는다. 말러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나그네의 밤 노래’를 알토가 노래하게 한다. 자라투스트라가 인간에게 명령하는 것은 삶에 대한 사랑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으라는 것이다. 그 결과 어린이 합창이 노래하는 5악장의 동심(童心)에 도달하게 된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한다. 어떻게 인간의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獅子)가 되고, 마침내 사자가 어린이가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낙타는 당나귀와 마찬가지로 수동적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동물이다. 니체는 그런 노예근성을 벗고 백수의 왕 사자와 같이 의지를 관철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성이 아니다. 니체는 사자의 단계에서 천진난만하게 삶을 즐기는 어린이의 단계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춤추고 노래하는 어린이의 유희야말로 삶의 고통과 무게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인 것이다. 말러의 5악장은 그런 니체에 대한 응답이다.
마지막 6악장의 광대무변한 음악은 말러가 바이로이트에서 들었던 바그너의 <파르지팔>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파르지팔이 누구인가? 그는 죄 없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백치(白痴)이다. 정확히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운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성혈(聖血)을 담았던 성배가 세상의 타락 때문에 모습을 감추었을 때 그 참다운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말러의 ‘파르지팔’은 바그너와 같이 관중을 수동적으로 기독교의 제전에 참여하도록 명령하는 인물이 아니다. 앞선 악장들에서 충분한 계몽을 거친 청중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삶의 의지를 확인하고 당당하게 그 짐을 벗어버리는 ‘위버멘슈Übermensch’, 곧 초인이 된다. 말러가 쓴 사랑의 교향곡을 통해 바그너의 파르지팔이 니체의 자라투스트라와 화해한 것이다.
방대하고 아름다운 베나리아 궁전의 극히 일부를 보고 밖으로 나왔다. 익스프레스를 놓쳐 마을까지 한참을 걸어 나왔다. 조그마한 읍내에 ‘시네마 천국’처럼 생긴 극장이 나온다. 토리노의 한때를 생각나는 영화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바람의 신부>에서 야심 찬 유대인 작가 프란츠 베르펠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앞에서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가운데 아리아를 노래하며 바그너와 같은 어두운 음악은 걷어치우고 밝고 건강한 베르디야말로 참 음악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 알마 말러도 새로운 햇살을 느끼며 베르펠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얄궂지만 베르디가 이긴 것으로 하자. 여긴 이탈리아이니까! 이제 남쪽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