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주현절 교회와 에리히 케스트너 박물관
세 사람의 동방박사와 함께 토마너와 크루치아너를 만난다
황금 기마상이 있는 드레스덴 노이슈테터 광장에서 북쪽 알베르트 광장으로 뻗은 대로는 하우프트슈트라세(Hauptstraße, ‘중앙로’라는 뜻이다)이다.
가는 길에 기이한 교회가 보인다. 겉은 깨끗하지만 첨탑만 시커멓게 그을렸다. ‘드라이쾨니히스키르헤Dreikönigskirche’, 직역하면 ‘세 왕의 교회’ 또는 ‘동방박사 교회’이지만 ‘주현절 교회’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낫게 들린다. 동방에서 온 세 왕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드린 날을 주현절(Epiphany)이라 한다.
바흐가 즐겨 사용한 코랄로 된 주현절 미사를 들으며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외관보다 더 기이하다. 가운데 제단만이 또 시커멓게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다!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본보기로 가장 혹독한 폭격을 당한 독일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주현절 교회 가운데 남은 것은 첨탑과 제단뿐이었던 것이다.
오르간 아래는 <죽음의 무도>의 부조가 붙어 있다. 16세기에 게오르크 공이 처음 만들었다가 화재로 손상된 것을 18세기에 복원해 공동묘지 벽에 두었다가 끝으로 교회 안에 안치한 것이다. 자세히 보면 맨 앞과 맨 뒤 그리고 중간에 해골 형상을 한 죽음이 교황에서 어린이까지 모든 인간을 끌고 가는 모양새이다. 중세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징이다. 생상스의 바이올린 곡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가 가장 유명하고, 리스트 또한 협주곡(Totentanz)을 썼다.
그러나 생상스나 리스트의 사뭇 비장한 음악은 그림이나 조각으로 만나는 ‘죽음’과는 어쩐지 맞지 않는다. 말러 교향곡 4번 2악장이 죽음의 안내를 슬프지 않게 담담하게 드린다. 4악장에서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죽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3악장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황홀경을 자아낸다.
결국 ‘죽음의 무도’의 의미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는가”이다. 정확하게 그 점을 노래한 음악이 있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가운데 베드로 전서에 붙인 두 번째 악장이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다.
그러고 나서 6악장 고린도 전서에 가서 죽음에게 호통치는 것이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주현절 교회를 나서며 하이네의 시에 붙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세 동방 박사Die heiligen drei Könige aus Morgenland>를 떠올린다.
세 사람의 거룩한 동방박사가
작은 마을과 거리마다 물었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이 어디니
머슴아야, 계집아이야
어린이도 어른도 알지 못했다
왕들은 계속해서 찾았다
황금빛 별을 쫓았다
사랑스레 즐겁게 빛나는 별을
그 별이 요셉의 집 위에 멈췄다
그곳에 아이가 있었다
송아지가 울고 아기도 울었다
그리고 거룩한 세 왕이 노래했다
드레스덴은 슈트라우스가 대부분의 오페라를 초연한 곳이다. <살로메>,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 <인테르메초>, <아라벨라>, <말없는 여인>, <다프네>로 이어질 인연을 예감한 것일까? 동방박사 노래 안에 <장미의 기사>로부터 <카프리치오>의 세계까지 다 들어 있다. 아마도 이 교회에서 구상했을지도 모른다.
에리히 케스트너를 만나러 간다고 해놓고는 교회에서 너무 시간을 허비한 것 아니냐고 핀잔을 줄지 모르지만, 벌써 두 개의 선명한 이미지가 케스트너에 한발 다가가게 한다. 그런데 누구이냐고? 에리히 케스트너(Erich Kästner, 1899-1974)는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20세기 독일 작가이다. <에밀과 탐정>, <쌍둥이 로티> 같은 작품도 좋지만 역시 대표작은 <하늘을 나는 교실Das fliegende Klassenzimmer, 1933>이다.
주현절 교회에서 들은 음악 가운데 <독일 레퀴엠>에 나오는 풀과 풀의 꽃, 그리고 <세 동방박사> 가운데 송아지의 울음이 바로 <하늘을 나는 교실>의 첫 부분에 나온다. 독일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던 이 책은 영화로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국내에는 2003년에 만든 영화가 DVD로 발매되었다. 베네딕도 수도원이 세운 분도 출판사 덕분이다.
그러나 더욱 유명한 것은 작가 자신이 직접 출연한 1954년 흑백 영화이다. 나는 유튜브에서 보던 흐릿한 영상이 블루레이로 발매된 것을 알고 아마존에서 구입해 직접 자막을 만들었다(역시 소수의 선택된 사람을 위해서).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작가 자신이 글을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가 있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들판이다. 케스트너는 이렇게 말한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한여름에 쓰기란 쉽지 않네요. 들판에는 꽃이 만발하죠. 들풀은 공손히 머리 숙입니다. (...) 어쨌든 에두아르트는 벌써 집에 가잡니다. 나와 집에 가는 것을 좋아해요. 우린 같은 방향이라. 같은 호텔은 아니고 모퉁이 농장에 사는 녀석이에요. 에두아르트는 예쁜 송아지인데 농부에게 들은 말로는 금방 자라 황소가 될 거랍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드레스덴의 케스트너가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슈트라우스를 만나러 간 것만 같다.
케스트너는 자신의 어릴 적 경험과 헝가리 작가 몰나르 페렌츠의 <팔 거리의 아이들>을 참고해 <하늘을 나는 교실>을 썼다.
<하늘을 나는 교실>의 배경은 알프스 산간의 키르히베르크(Kirchberg)라는 소도시인데, ‘벚꽃동산’이라는 뜻의 흔한 지명이다. 요한 지기스문트 인문학교 기숙사 아이들의 성장기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주인공들은 인근 라이벌 실업학교 학생들과 해묵은 반목 끝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일전을 벌인다. 친구가 납치되어 구타당하고 시험지를 빼앗아 태워버리는 좀 험악한 내용이지만, 케스트너는 이를 양측 간의 권투 대결과 눈싸움으로 해소한다.
큰 소동을 벌이고 기숙사 규칙을 어긴 학생들이 사감인 ‘정의파 선생Justus’에게 불려 간다. 시대에 따라 영화 속 인물은 다르지만 대사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감동적이다. 대개 이런 경우는 자초지종 따지지 않고 혼나기 일쑤이다. 선생님도 훈육을 잘 못한 책임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신뢰하는 정의파 선생님은 왜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그래야만 했는지 차근차근 묻는다. 그리고 모두 무사한지 여부가 가장 먼저 들어야 할 답이다. 아이들은 “물론”이라 목청을 높인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아이들은 선생님을 먼저 생각하는 가운데 기숙사 생활은 신뢰가 더해진다. 아이들에게 내린 벌은 방과 후 사감실에서 근신하는 것이다. 다과를 나누며 정의파 선생님은 자신이 이 학교 학생일 때 경험담을 들려준다.
착하고 부지런한 아이가 있었다. 불의를 보면 끓어올랐지, 마르틴처럼. 그럴만할 때에는 싸움도 했어, 마츠처럼. 때로는 기숙사에 앉아 고향 생각을 했다, 울리처럼. 어려운 책도 많이 읽었지, 제바스티안 같이. 그리고 조니처럼 언젠가 작가가 될 꿈을 꿨단다. (...)
케스트너는 이 책을 시공을 초월한 성장기 이야기로 만들었다. 더 이상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옮길 재간도 재량도 없다. 아직 이 책을 못 본 분은 횡재한 것이다. 드레스덴의 케스트너 박물관은 대단한 소장품보다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쉼터이다. 케스트너 생가는 전쟁 때 사라져 그의 삼촌이 살던 집을 꾸민 것이다. 케스트너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서 태어났다. 만일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부자라고 해도, 아이에게 그런 곳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천 년 동안 빚은 아름다움이 하룻밤 새 완전히 파괴되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할 무렵 <하늘을 나는 교실>을 쓴 케스트너가 10년 뒤 벌어질 참극을 짐작이나 했을까? 나치 선동가 괴벨스는 평화주의자인 케스트너의 책을 모두 불태웠다. 케스트너는 뒷날 <하늘을 나는 교실>의 속편 <이발소의 돼지>를 썼는데 여기서 울리와 마츠가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을 참관한다. 이 대회 아이스하키 우승팀은 놀랍게도 영국이었다. 소년들은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눈다.
2003년에 나온 <하늘을 나는 교실>은 바흐가 재임했던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의 기숙사가 무대이다. 아이들이 눈싸움을 벌이는 장면 뒤로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의 녹화 장면이 흐른다. 바흐도 역시 고향을 떠나 기숙사에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눈물짓는 학생을 다독이고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돌고 돌아 또 바흐이냐고? 멀리까지 갈 것 없다. 드레스덴에는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소년 합창단(1212년 설립) 못지않게 유서 깊은 성 십자가 교회 소년 합창단(Dresdner Kreuzchor1300년 설립)이 있다. 토마스 교회 학생을 ‘토마너Thomaner’라고 부른다면 성 십자가 교회 합창단원은 ‘크루치아너Kruzianer’라 일컫는다. 유구한 역사만큼 배출한 인재도 출중하다. 20세기 최고의 리릭 테너 페터 슈라이어, 그와 앙상블을 이룬 베이스 테오 아담, 현역 최고의 베이스 르네 파페, 한때 피셔 디스카우의 후계로 지목되었던 바리톤 올라프 베어, 지난 세기 바흐 부흥의 선구자 지휘자 카를 리히터, 그리고 현역인 한스 크리스토프 라데만과 하르트무트 헨헨 등이 드레스덴 크루치아너였다.
이들 대부분을 길러낸 칸토르는 루돌프 마우어스베르거(Rudolf Mauersberger, 1889-1971)이다. 1930년에 합창단 지휘자로 부임한 마우어스베르거는 당대 많은 지식인들처럼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나치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에게 나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고, 또 당에서 금지한 유대인 작곡가 멘델스존의 음악을 노래하도록 했다. 그의 동생 에르하르트 마우어스베르크 또한 합창 지휘자로 토마스 교회 합창 지휘자가 되어 두 사람이 함께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지휘했다. 이때 독창진에 슈라이어와 아담이 참여한다.
결국 ‘또 바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드레스덴 성 십자가 교회에는 바흐 이전에 독일 음악의 초석을 놓은 작곡가가 재임했다.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ütz, 1585-1672)이다.
쉬츠가 드레스덴에서 활동한 1615년부터 1672년까지는 독일이 30년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었던 때이다. 케스트너가 양차 세계대전을 겪은 것과 매한가지였다. 30년 전쟁으로 치명타를 입은 신성로마제국이었고, 세계대전으로 자신은 물론 세계에 치명상을 입힌 제3제국이었다. 그러나 쉬츠와 바흐가 남긴 음악의 유산과 케스트너의 따뜻한 인간애는 세상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아니 잃을 수 없는 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