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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17. 2018

첫 번째 로엔그린: 낭만주의의 극치

슈타른베르크 호수


오데온 광장에 초승달이 뜬 뮌헨에도 세 개의 콘서트가 기다리고 있다. 마리스 얀손스가 이끄는 바이에른 라디오 심포니는 10년 전 한 저널의 설문조사에서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선정되었다. 2위 역시 당시 얀손스가 이끌던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였다.


내가 들은 콘서트는, 바로 얀손스에 이어 콘세트르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지만, 올초부터 전 세계에 불어닥친 ‘미투 운동’의 여파로 불명예 퇴진한 다니엘레 가티가 지휘한 무대였다. 공연에 앞서 ‘이 사람과 해야 하나’라며 불만을 터뜨린 단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수 성향의 유권자가 많고 연령층이 높은 뮌헨 객석의 반응은 차분했다. 아니, 그보다는 인내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마치 한 번 기회를 줄 터이니 만회해보라는 기운이 가득한 헤라클레스 홀이었다.

바이에른 라디오 심포니와 리허설 중인 다니엘레 가티. 뒤편에 헤라클레스의 무용담을 새긴 양탄자가 걸려 있다

슈베르트의 교향곡과 20세기 작곡가 안톤 베베른을 엮어 연주한 가티는 굳은 표정이었지만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준 악단과 청중에게 진정 고마워하는 모습이었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다시 재기할지 아니면 서서히 사라질지 두고 볼 일이다. 같은 오스트리아 빈의 토양 아래 100년의 차이를 두고 활동했던 슈베르트와 베베른의 음악은 18세기 바로크의 벨베데레 궁전에 걸린 20세기 분리파 클림트의 그림 ‘입맞춤’처럼 독특한 친화력을 보였다.

20세기 초 빈이 만든 음악의 결정: 베베른

이튿날 아침 뮌헨 바로 아래, 슈타른베르크 호수를 찾았다. T. S. 엘리엇의 ‘황무지’ 첫 구절에 나오는 곳이다. 여의도 면적의 7배가 넘는 호수의 느낌은 양수리 비슷하다. 아침이면 짙은 안개가 끼고 아스라하게 알프스가 보인다. 1886년 6월 13일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의 익사체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바그너를 숭상한 나머지 작품 속 배경을 직접 현실로 구현한 루트비히 2세를 두고 모두가 ‘미친왕’으로 수군댔기 때문에 사인도 미스터리였다.

루트비히 2세의 익사체가 발견된 곳에 세운 십자가

오늘날 루트비히 2세가 지은 인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헤렌힘제 성, 린더호프 성은 모두 달력 그림으로 안성맞춤일 만큼 남독일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바탕으로 한 노이슈반슈타인은 디즈니 성의 모델이고 왕이 탔던 마차에서 신데렐라가 당장 내릴 것만 같다. 

님펜부르크에 있는 루트비히 2세의 마차

왕의 시신이 발견된 호수의 외딴 기슭에 교회와 십자가가 쓸쓸히 서 있다. 역설적으로 그가 죽은 곳에서 다시 한번 ‘로엔그린’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안개가 깔린 호숫가에서 동생 살해범으로 지목받은 브라반트의 공주 엘자가 자기변호를 시작하는 장면이다. 토마스 만은 이렇게 말했다.

토마스 만의 라디오 연설: 바그너에 대해
나는 ‘로엔그린’을 가장 먼저 들었다.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들었고, 지금까지도 그 가사와 음악을 거의 외우고 있다. 나는 아직 골디셰 델리아의 옛날 음반을 가지고 있는데, 엘자의 ‘우울한 날에 외로이’에서 트럼펫의 ‘매우 여리게’로 음악이 시작되고 ‘휘황한 검의 광채 속에 한 기사가 다가왔어요’라는 노래가 나오면, 열여덟 살이었을 당시처럼 진정 황홀감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낭만주의의 극치이다. 

슈타른베르크 호숫가 루트비히 2세 추모 교회: 성배 전설에 나오는 위험성당을 떠오르게 한다
멀리서 들려오던 트럼펫 소리가 가까워지며 백조의 기사가 등장한다

나도 처음 인터넷에 연결되던 때를 기억한다. 1995년 여름 플로피디스크 한 장에 들어가는 넷스케이프라는 프로그램을 깔고 전화선을 통해 어렵사리 세상과 연결되었을 때 내가 처음 찾아본 것이 바로 T. S. 엘리엇과 토마스 만에 대한 자료였다. 작가가 직접 낭송하는 ‘황무지’와 ‘로엔그린’ 추억의 육성은 우리 집을 슈타른베르크 호수로 만들었다. 지금은 유튜브에 널려 있지만, 내가 처음 들었던 기억을 대신할 수는 없다.

엘리엇이 낭송하는 '황무지'

다음 공연은 뮌헨 필하모닉의 창단 125주년을 기념하는 말러의 교향곡 8번 연주이다. 말러가 대규모 합창을 동원해 1천 명에 이르는 공연을 치른 곳이 바로 뮌헨이었다. 덕분에 이 곡은 ‘천인 교향곡’으로 불린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한 이날 무대에는 어림잡아 600명 정도가 선 듯하다.


오르간의 신호로 시작한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의 합창은 가스타이크(Gasteig)를 진동시켰다. 원래 음악당 자리는 유명한 술집이었고 그곳에서 히틀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미수로 그쳤다. 말러의 음악은 악명 높은 ‘비어홀 폭동’의 잡음을 쓸어내는 듯했다. 콘서트홀을 위한 미사곡인 1부를 마치고 휴식 뒤에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장에 붙인 2부가 시작되었다. 첫대목은 바로 가르미슈와 같은 고산준령으로 청중을 안내한다. 이내 여러 교부들의 아리아가 시작된다.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바리톤 솔로를 연상케 하는 선창
영원한 기쁨의 불길
불타는 사랑의 인연
들끓는 가슴의 고통
치솟는 성스런 기쁨
화살아 나를 꿰뚫고
창이여 나를 찌르고
몽둥이야 나를 부숴라
번개야 나를 태울 지니
허무함 모두 사라지고
쉼 없는 빛 비추게 하라
영원한 사랑의 씨앗이여

어린 천사들과 성숙한 천사들이 죄 많은 파우스트의 육신을 위로하고, 구원의 여인 그레트헨과 성녀들이 그를 성모 앞으로 인도한다. 1910년 뮌헨 초연 때, 앞서 글에 언급한 인물이 거의 다 참석했다. 말러의 동료 슈트라우스와 제자 안톤 베베른, 작가 호프만스탈과 토마스 만,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가 괴테의 환상이 마침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프린츠레겐텐 극장 인근의 토마스 만 빌라

토마스 만이 뮌헨에서 살던 집은 이자르 강을 끼고 영국 정원 건너편에 있다. 호젓한 고급 주택가는 귀족과 같은 삶을 살았던 완고한 독일 작가의 기운이 남아 있다. 마이스터의 나라 독일에서 그는 정신을 갈고 문장을 깎아 자기 문화유산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숨 막힐 것 같은 그 기운을 벗어나니 영국정원의 해방감이 느껴진다. 세상의 굴레를 벗어던진 유토피아와도 같다.

뮌헨 영국정원의 상징과 같은 모놉테로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독일 여행의 마지막 날,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관현악 무대는 대개 이렇게 오전에 마련된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사랑받다가 가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는 키릴 페트렌코가 지휘한다.


전반부, 현재 가장 주목받는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협주곡을 협연했다. 12음 기법의 난해한 곡이었지만, 이날도 맨발로 주술사처럼 무대를 장악한 코파친스카야의 카리스마에 청중은 집중했고 갈채는 끝없이 이어졌다. 몰도바 태생 앳된 얼굴의 애기 엄마가 자기보다 한 배 반은 더 키가 큰 클라리넷 주자와 미리 준비한 앙코르를 들려준 뒤에야 청중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쇤베르크 협주곡을 협연한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

회랑에 걸린 극장의 옛 주역들 초상을 보다가 2부 시작종이 치고야 성급히 자리로 돌아가려던 나는 뜻밖에 횡재를 했다. 역시 객석에서 후반부를 보려고 무대 뒤에서 나오는 코파친스카야에게 사인을 받은 것이다. 횡재는 멋진 바이올린 모양의 사인이 아니라 그녀가 페트렌코가 지휘할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다른 청중과 함께 들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여행의 첫 공연이었던 함부르크의 바흐 ‘미사’ 때도 전반에 호른 독주를 분 단원이 후반부에 내 뒤에서 동료들의 연주를 들었다. 이것이 진정한 음악가의 자세이다.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의 사인
난생처음 사인받는 모습

슈트라우스가 무지개를 마감한 뒤로 쇤베르크는 무지개 없는 시대를 주도했다. 그는 12음 기법을 두고 “독일 음악 200년의 헤게모니를 확보했다”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한 것과는 다를지 모르지만, 무지개 없는 시대가 정말 200년 정도 지속될지 모른다.

세인트 폴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를 공연하는 코파친스카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 클래식 음악은 무엇인가’ 묻는다.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클래식 음악은 대략 바로크 시대에 시작되어 20세기 전반에 마무리되었다. 함부르크의 클롭슈토크와 말러가 예고하지 않았던가, 죽어야 부활한다고!


누구도 박물관에 왜 어제 그린 그림과 오늘 새긴 조각은 없는지 묻지 않는다. 콘서트홀이나 오페라 극장도 박물관과 같다. 새로운 음악은 바흐나 베토벤, 심지어 말러나 슈트라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서 쓰임새를 인정받은 뒤에 그것을 위한 마땅한 장소에 자리를 얻을 것이다. 어쩌면 유튜브나 인터넷이 새 콘서트홀인지도 모른다.


오후에 뮌헨의 미술관인 알테와 노이에 피나코테크를 갔다. 많은 걸작 가운데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그림이 눈에 띈다. 세간티니가 그린 ‘밭 가는 풍경’이다. 두 농부가 합심해 함께 이랑을 판다.

조반니 세간티니의 '밭 가는 풍경'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번스타인의 오페라 ‘캔디드’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하다. 여행 중에도 서울과 드레스덴에서 각기 이 곡이 연주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상수시 궁전 식객이던 철학자 볼테르가 30년 전쟁의 참상을 해학적으로 그린 소설에 번스타인이 곡을 붙인 것이다. 


아마도 이젠하임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나 세간티니, 슈트라우스, 토마스 만이 지금 살고 있다면 지구 온난화나 이민자 갈등에 대한 작품을 그리고 쓸 것이다. 당대에 그랬듯 스스로 나약하다고 느낄 것이다. 어쩌면 더 이상 ‘극복한 영웅’이 되는 것이 해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침 바이에른 주 선거에서 극우가 약진한 만큼 집권당은 크게 패했고, 메르켈은 총리직은 유지하되 당수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사회도 정권이 바뀌었지만 갈등과 분열은 별반 해소되지 않았다.

번스타인 <캔디드>의 피날레 합창

<캉디드>의 마지막 합창이 답이다. ‘우리 밭을 일구자Make our garden grow’야말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위한 최선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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