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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Dec 04. 2019

드레스덴의 진짜 보물

아우랑제브의 생일잔치 그리고 바흐

중단했던 연재를 다시 이어간다. 드레스덴이다

드레스덴은 작센 선제후국(Kurfürstentum Sachsen)의 수도였다.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권을 가진 제후였다. 일곱 선제후 가운데 마인츠와 트리어, 쾰른 대주교는 성직자였고, 보헤미아 왕,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라인 궁정백과 나란히 황제 선거인단에 속했으니 작센의 위상은 당당했다. 신성로마제국 내 중심에 위치한 평야 지방으로 교역의 중심이기도 했다. 궁정이 있는 드레스덴과 제국 자유도시 라이프치히가 중심도시였다. 앵글로색슨의 색슨이 바로 작센의 영어 표기이다.

베스트팔렌 조약(1648) 이후 신성로마제국 가운데 작센 선제후국(분홍색)

작센은 ‘강건왕’으로 불리는 아우구스트 2세(1670-1733)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폴란드 왕까지 겸한 그의 영토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까지 확대되었다. 오늘날 관광객이 드레스덴에서 감탄하는 건축과 유물은 대부분 그와 그의 아들 아우구스트 3세 때 것이다. ‘엘베 강의 피렌체’라는 찬란한 별명은 이때 비롯되었다.

드레스덴 아우구스트 거리, 마이센의 도자기 타일로 만든 <제후의 길> 가운데 아우구스트 2세와 3세

며칠 전 도둑이 들어 화제가 된 드레스덴의 보물 수장실 녹색방(Grünes Gewölbe)도 강건왕 때인 1723년에 설립되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드레스덴 궁전 내 열두 개 박물관 가운데 가장 값비싼 보물이 많은 곳이 허술한 보안 때문에 털렸으니 허무하다.

미술품 도둑과 사기는 아주 인기 있는 소재라서 영화로도 많이 나왔다. 스티브 매퀸과 페이 더너웨이의 <토머스 크라운 어페어The Thomas Crown Affair>는 피어스 브로스넌과 르네 루소 주연으로 리메이크까지 되었고, 오드리 헵번과 피터 오툴의 <백만 달러의 사랑How to Steal a Million>이나 브루스 윌리스가 나온 <허드슨 호크Hudson Hawk>도 비슷한 이야기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베스트 오퍼>에서 보여준 반전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반전은 안 보여주는 그냥 예고편이다

<엑스칼리버>로 유명한 존 부어먼 감독의 <제네럴The General>도 인상적이다. 얼스터 의용군의 실존 인물 마틴 케이힐은 절도로 먹고 산다. 한 번은 저택의 그림을 훔쳤는데, 경찰이 24시간 따라붙어 장물을 팔 길이 없다. 꾀를 낸 것이 하루 종일 차를 몰다가 외딴 시골길에 멈춰 선다. 케이힐은 트렁크에서 미리 준비한 기름통을 꺼내 연료를 보충한다. 그러나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경찰차는 곧 연료가 바닥난다. 케이힐의 기름통에는 ‘현명한 처녀The Wise Virgin’이라고 적혀 있다. 신약성서 마태오복음을 인용해 경찰을 조롱한 것이다.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는데 현명한 다섯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지만, 아둔한 다섯은 그러지 않았다. 밤이 되어 야경꾼이 신랑의 도착을 알리자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리 준비한 기름으로 불을 밝혀 신랑을 맞이했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그러지 못했다. 뒤늦게 기름을 구해왔을 때는 문이 닫힌 뒤였다. 그분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언제나 깨어 있으라.

바흐의 칸타타 140번 <눈을 뜨라 부르는 소리 있도다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를 연주해주고 싶다.

이것은 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시온의 딸이 야경꾼의 노래를 들으니
솟아나는 기쁨으로 뛰어오른다
잠에서 깨어 서둘러 일어나고
영광된 친구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자비로 충만하고 진실로 무장하였으니
그녀의 빛은 밝고 그녀의 별은 떠오른다
이제 오소서, 소중한 왕관이여
주 예수, 하늘의 아들이시여!
호산나!
우리 모두 따르리
기쁨의 방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들리라
오르간을 위한 코랄 연주

드레스덴 미술관이 털리는 바람에 너무 멀리까지 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입이 떡 벌어질 보물이 나타난다. 금세공사 요한 멜히오르 딜링거(Johann Melchior Dinglinger, 1664-1731)가 만든 <무굴제국 아우랑제브 황제의 생일>이다. 강건왕과 그의 아들은 이런 사치품에 국부를 탕진했고, 결국 국운도 기울었다. 이들 왕 이후로 작센은 폴란드를 잃는다. 

폭 1.5미터쯤 될까 싶은 초호화 장식

로베르트 슈만이 아일랜드 시인 토머스 무어(Thomas Moore, 1779 –1852) 원작인 <랄라 루크Lalla-Rookh>를 가지고 오라토리오 <낙원과 요정 페리Das Paradies und die Peri>를 쓸 때 딜링거의 걸작을 보았을까? 그랬다면 슈만은 그에 필적하는 음악을 쓰고자 했을 것이다. 아우랑제브 황제의 딸 랄라 루크를 그린 이야기는 대략 아래와 같다.

부카라의 젊은 왕과 정혼한 랄라 루크 공주는 시집가는 도중 길에서 만난 시인 페라모르즈에게 반한다. 시인은 그녀에게 네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코라산의 베일을 쓴 예언자, 낙원과 요정 페리, 불의 숭배자들, 하렘의 빛. 이렇게 네 이야기를 들으며 궁에 도착한 랄라 루크는 황홀해하다가 낯익은 목소리에 정신이 든다. 그녀를 감동시킨 시인은 다름 아닌 약혼자인 왕이었던 것이다.

랄라 루크가 들을 이야기 가운데 두 번째가 바로 슈만의 소재인 것이다. 그 이야기는 또 이렇다.

페리는 중동 신화에 나오는 날개 꺾인 천사이다. 추방된 페리가 낙원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하늘의 뜻에 맞는 보물이 필요하다. 페리는 나라를 염려하는 인도인이 폭군의 손에 흘린 최후의 피 한 방울을 가져가지만 거절당한다. 페스트에 걸린 약혼자의 숨에 섞은 이집트 아가씨의 마지막 숨결도 거부되자 낙담하는 페리. 세 번째 보물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어린이를 보고 회개하는 시리아 도적의 눈물이다. 그것을 하늘이 받아들이면서 천사 페리에게 다시 낙원의 문이 열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슈만의 걸작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익숙한 성서의 이야기도 아니고 아우랑제브가 샤를마뉴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피날레(1:26:16)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요정 페리):
기쁨이여, 영원한 기쁨이여, 내가 할 일은 끝났네
이제 천국으로 가는 문도 열렸네
얼마나 행복한가, 기쁨이여, 얼마나 행복한지!
달콤한 에덴동산도 여기에 비하면 얼마나 어두운지
셰두키아의 다이아몬드 탑도
용연향의 향기로운 그늘도 무디기만 하네!
안녕히, 속세의 유혹이여
마치 연인의 한숨처럼 달아나는구나!
이제 행운의 나무가 나의 기쁨이네
영원한 향기를 퍼뜨리니
안녕히, 화관에 꽂은 꽃들이여
한창 피어나 이미 시들기 시작하는구나
아, 어떤 지상의 꽃과 비교하랴
알라의 옥좌에 핀 연꽃은
영원한 줄기로 감겨 있고
모든 잎에 영혼이 살아 있네

(축복의 합창):
환영합니다, 환영해요
우리에게 온 것을 환영해요
그대는 싸웠고, 쉬지 않았죠
만일 속세에서 바칠 것이 있다면
하늘이 소중이 할 선물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가져온 이 눈물이네요
죄인의 눈에서 흐른 이 눈물이
그대에게 다시 한번 천국을 허락합니다
그대는 싸웠고, 쉬지 않았죠
이제 값진 선물을 얻었네요
이제 에덴동산에 들어왔으니
사랑스러운 영혼들이 그대를 기다립니다
영원한 축복이 그대를 에워쌀 거예요
우리에게 온 것을 환영해요

바흐의 칸타타가 그의 기악과 성악의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듯, 슈만의 오라토리오와 극음악도 눈부신 가곡과 약동하는 교향악을 한데 모은 것이다. 그 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여기까지 와야 한다. 존 엘리엇 가드너,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필리프 헤레베헤처럼 말이다.

인도를 통일한 황제의 위세가 정말 대단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보로딘의 음악을 가지고 만든 뮤지컬 <키스메트> 가운데 ‘And This Is My Beloved’가 절로 흘러나온다.

내가 자막을 만든 영화도 좋지만 이 음반의 노래가 더 좋다

요한 하인리히 쾰러가 만든 <신기료장수> 세공을 두고 한스 작스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진정한 바그네리안이 아니리라! 어디 작스뿐인가?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분홍신>을 쓴 안데르센이며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세묜까지 발을 위한 이 직업의 종사자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손바닥만 한 크기이다
한스 작스의 채점을 받는 베크메서의 세레나데. 2013년 잘츠부르크의 만행

그러고 보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는 날개 떨어진 천사 미하일이 바로 요정 페리와 같은 존재 아닌가?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는 다미엘(브루노 간츠 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녹색방을 나와 아우구스투스 다리로 엘베 강을 건너면 강건왕의 황금 기마상이 나온다. 자신의 궁전을 뒤로하고 강건왕이 향하는 곳은 폴란드의 바르샤바이다. 때문에 드레스덴 사람들이 이 동상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금상은 강건왕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가 세웠다. 그러나 이 금붙이보다 빛나는 것이 있다.

강 건너 성모교회의 돔이 보인다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왕이던 부자(父子)가 교체되던 1733년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가 <미사 B단조>를 작곡한다. 정확히 말하면 라이프치히에서 빠듯하게 살던 바흐가 스스로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드레스덴의 궁정작곡가가 되고 싶어 했고, 그를 청원하기 위해 미사곡을 제출한다. 작센이나 바흐가 속한 라이프치히는 신교였지만 폴란드는 가톨릭이었고, 바흐가 믿는 루터파는 가톨릭 전례 가운데 ‘키리에’와 ‘글로리아’를 계승했기 때문에 바흐는 미사의 첫 두 악장을 이때 헌정한 것이다. 그때 바친 헌사는 다음과 같다.


경외하는 선제후님, 자비로우신 주인님, 은혜의 제왕 폐하께,
비천한 제가 음악이라는 학문에서 획득하여 만든 이 하찮은 것을 바치오니 폐하께서는 이것을 하찮은 작품이라 여기지 마시고, 세계적으로 명망 높으신 폐하의 자비로우신 눈으로 보시기 간절히 비나이다. 그리고 황공하오나 이것으로 저를 폐하의 보호 하에 품어 주시기 바라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그리고 현재 라이프치히의 두 주교회에서 음악 책임자로 봉직하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부당하게도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때로는 제 직책과 관련된 보수도 삭감받아야 했고, 또 (앞으로는) 완전히 한 푼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억울한 형편이옵니다. 제왕 폐하께서 제게 은총을 내리시어 궁정 카펠마이스터의 칭호를 하사하시어, 이를 명하는 문서가 지역의 담당 관청에 높으신 명령으로 하달된다면, 이 모든 부당함은 일거에 사라질 것이옵니다. 저의 비천한 간청을 은혜로 받아주신다면 폐하께 향한 무한한 존경으로 저는 늘 복종할 것이오며, 제왕 폐하께서 바라시는 바 교회음악의 작곡이나 오케스트라의 음악 작곡에 무한정 심혈을 기울이겠사옵니다. 저의 온 힘을 폐하를 모시는 데 다 바칠 것이옵니다. 제왕 폐하께 무한한 충성을 결심하며 비천한 충복,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삼가 올리나이다.

라이프치히로부터 받았던 대우보다는 드레스덴 선제후에게 보인 한없는 읍소가 더욱 안쓰럽다.

드레스덴 성 십자가 합창단을 지휘했던 루돌프 마우어스베르거의 고전적인 음반

이제 에리히 케스트너를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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