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준호 Nov 11. 2018

선택받은 영웅과 스스로 도달한 영웅

라이프치히 미술관의 베토벤상과 게반트하우스의 말러

‘보체크’ 새 연출의 초연 무대를 마다하고 서둘러 라이프치히로 가야 한 것도 교향악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구스타프 말러의 첫 교향곡을 듣기 위해서이다. 20대의 말러가 라이프치히 오페라 지휘자 시절에 작곡한 이 곡은 1888년 부다페스트에서 초연되었다.


만하임에서 베르타 벤츠가 남편의 자동차를 몰고 친정에 다녀온 해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1902년에 라이프치히의 조각가 막스 클링거가 베토벤상을 만들었다. 완성된 조각은 빈으로 잠시 옮겨졌는데, 그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베토벤 벽화’와 나란히 전시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빈 분리파 전당에 전시된 ‘베토벤 벽화’는 클림트의 친구 말러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교향곡 4번을 쓰던 무렵이다.

막스 클링거가 만든 라이프치히 미술관의 베토벤상. 뒤의 그림은 그가 그린 '올림포스의 그리스도'

나는 라이프치히 심장부에 위치한 미술관이 독창적인 컬렉션을 갖췄음에도 그토록 한적한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더욱이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은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무색하게 적막감이 돌 정도로 한산했다. 솔직히 나는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랐다.


25년 전쯤에는 빈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보기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분리파 전당이나 벨베데레 궁전이 구름 관중으로 몸살을 앓는다. 클림트가 상품화된 것이다. 다행히 옛 동독에 속했던 라이프치히는 아직 관광도시는 아니다. 덕분에 막스 클링거도 여전히 ‘소비’되는 예술가가 아니다. 대리석 덩어리 위에 적힌 토마스 만의 주석을 바라본다.


헤라클레스나 지크프리트는 ‘선택받은 영웅’(Hero)이지 ‘스스로 도달한 영웅’(Held)은 아니다. 영웅다움이라는 것은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나약함을 극복하는 것이 영웅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약해야 한다. 클링거의 작고 여린 베토벤은 거대한 신들의 옥좌에 앉아 있다. 그는 타는 듯한 눈빛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그야말로 스스로 도달한 영웅인 것이다.

베토벤상 뒤로 토마스 만이 남긴 주석이 보인다

조각을 만든 사람은 막스 클링어이지만 그것을 완성한 사람은 다름 아닌 토마스 만이다. 베토벤은 그 이후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웅이었다. 말러가 교향곡 1번에 붙인 제목 ‘거인’(Titan)에 대해 이 지면에 다 쓸 수는 없다. 말러가 제목을 가져온, 베토벤 시대 작가 장 파울의 소설은 아직까지 국내에 번역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로 생소하기 때문이다. 아마 번역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인공지능 번역기의 개선을 기다리는 편이 빠를지도 모른다.


괴테를 숭상했던 베토벤은 괴테에 대한 반발로 나왔던 장 파울을 알지 못했지만, 베토벤을 존경했던 슈만은 장 파울도 통독했다. 베토벤과 슈만과 장 파울 모두에 정통했던 구스타프 말러는 전부를 꿰뚫는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말러의 ‘거인’은 베토벤이요, 그 자신도 거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베토벤과 말러의 정수가 그 깊은 내력에 도달하기도 전에 너덜너덜하게 상업화되지 않도록, 미국의 찰스 아이브스가 ‘콩코드 소나타’에 베토벤의 ‘운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초월’이 필요하다. 이렇게 함부르크에서 들은 ‘콩코드 소나타’와 라이프치히의 말러 교향곡은 같은 영웅의 시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유대인 구스타프 말러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이었던 체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스스로의 좌표로 제시한 말이 유명하다.


나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아 사람이었고,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었으며, 미국에서는 유럽인이었고, 세계에서는 유대인이었다.

어딜 가도 이방인 취급받았던 말러였지만, 사후 100년이 지나 그는 교향악 전통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독일 오스트리아 작곡가로 앞다퉈 연주된다. 라트비아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는 막 마흔이 된 젊은 음악가이지만, 이곳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미국 보스턴 심포니까지 정상의 두 악단을 이끌고 있다. 그 또한 말러나 자신의 멘토인 마리스 얀손스처럼 유대인이다.


넬손스가 끌어올린 거인의 높이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바로 앞 라이프치히 오페라를 이끌었던 선배 지휘자들, 멘델스존, 말러, 푸르트벵글러, 쿠어트 마주어를 다 합친 것만큼 높이 솟았다.

라이프치히 공연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유럽 투어를 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독일 음악동화는 남쪽 바이에른으로 계속 이어진다.

독일 중동부 라이프치히에서 남부의 뮌헨까지는 3시간 남짓 걸린다. 나는 먼저 뮌헨을 지나 조금 더 아래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까지 내려간다. 독일 최남단이자, 최고봉 추크슈피체가 있는 알프스 지방이다. 엄청나게 긴 이곳의 지명은 히틀러가 동계 올림픽 개최를 위해 두 마을을 하나로 합친 데서 비롯되었다.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은 겨울에는 스키를, 여름에는 하이킹을 즐기는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나처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러 오는 사람은 훨씬 적다. 슈트라우스는 구스타프 말러와 같은 연배이다. 그러나 말러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에 죽은 데에 비해 슈트라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4년을 더 살았다.


슈트라우스는 독일에서 흔한 성이다.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와 성은 같지만 무관하다. 음악도 달달한 요한에 비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은 대중적이지 않지만, 누구나 아는 한 곡이 있다. 바로 교향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 일출 부분이다. 점증하는 팡파르에 맞춰 두드리는 북소리는 아폴로의 황금전차가 지평선을 넘어올 때 낼 법한, 딱 그 소리이다.

슈트라우스의 '일출'을 배경으로 쓴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전날 늦게 도착해 여장을 풀고 아침부터 슈트라우스가 가장 오랜 기간 살던 그의 집으로 갔다. 그가 죽은 뒤 재단 사무실로 쓰던 곳이 몇 년 전부터 박물관으로 보통 사람을 받고 있다. 정원은 아예 공원으로 개방해, 이날도 유치원 아이들의 소풍이 한창이다. 함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초대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가 슈트라우스의 멘토였다.


뷜로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말러를 지휘자로만 인정했지만, 슈트라우스는 지휘는 물론이고 작곡으로도 으뜸으로 치켜세웠다. 뷜로가 죽은 뒤에도 이것이 말러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클래식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작곡가로 꼽힌다. 반대로 가장 수준 높은 청중에게 슈트라우스는 궁극의 황홀경을 주는 사람이다. 작곡가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내 관현악 작품들은 베토벤의 천재성에 범접할 수 없습니다. 또 내 오페라들은 바그너의 영원불멸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소재와 그것을 다룬 나의 솜씨는 옛 작품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덕분에 나는 무지개 끝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슈트라우스 빌라

오만 하달만큼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슈트라우스는 스스로 그리스 비극에서 시작한 서양 예술이라는 무지개의 마지막 끝자락에 서 있다고 자리매김했다. 그의 노년에 히틀러가 집권했다. 평판과 위상으로 볼 때 제국음악협회 회장으로 슈트라우스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사실 슈트라우스는 자리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지만, 며느리가 유대인이라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나치에 공공연히 반발하지 않았고, 다행히 전후까지 며느리와 손주 모두 안전했다. 때문에 나치에 적극적인 저항을 한 다른 예술가와 비교하면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전후 독일이 과거 인물의 선한 업적과 불가피했던 잘못을 제대로 구별했던 것은 집단이성이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망령은 청산하되 그것이 마녀사냥이 되지 않도록 공과를 균형 있게 살폈다. 어쩌면 300개가 넘게 쪼개졌던 나라가 연방제 공화국으로 우뚝 선 비결인지도 모른다.


슈트라우스 집을 나서 나도 알프스로 올라가는 산악 열차에 오른다. 한 시간이 넘는 그림 같은 구간 가운데 마지막 25분이 터널이다. 잠깐 잠이 든 것 같은데 종점에 도달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조반니 세간티니,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모두 알프스 체험으로 호연지기를 길렀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각자의 업적이 마치 알프스 고산준령처럼 서로 이어진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말러와 슈트라우스 곡의 소재가 되었고, 스위스 화가 세간티니는 책의 이탈리아 번역판에 삽화를 그렸다.

말러와 슈트라우스가 관현악에 사용한 종, 알프스의 워낭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지난여름 전 세계가 폭염에 지쳤고 독일도 예년보다 더운 가을이 지속된 탓인지 생각보다 산정에 눈이 적다. 중장비가 어디선가 끌어온 눈을 산기슭에 펴고 있다. 곧 시작될 스키 시즌을 대비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다행히 산 중턱의 아이프 호수는 태곳적 그랬듯이 거울처럼 맑고 물빛도 그대로이다.

슈트라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상처 받은 세상에 음악가로서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는 음악이 처음 시작되었던 소박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장소를 물색했다. 친구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와 루체른을 두고 고민한 끝에 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에서 축제를 시작했다. 후년이면 클래식 음악계 가장 큰 이벤트인 잘츠부르크 축제가 100주년이 된다. 슈트라우스가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은 더 소중히 보존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껴둔 것이 아닌가 싶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알프스 교향곡>: 니체 자라투스트라의 음악적인 변용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 최고 악단의 의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