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씨들을 보고
대학교 때 미팅을 나갔는데, 몇 마디 나눈 상대방이 “문학소년이시네요” 하고 말했다. 나는 ‘음악소년’인 데다가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비치기도 싫었기 때문에, 같이 간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야, 내가 문학소년이냐?” 정문석과 이주헌은 나를 배신했다. “아니, 문학소녀!”
솔직히 1년에 책을 50권쯤 사서 한두 권 정도 읽는 내가 문학 얘길 하긴 좀 주제넘는다. <작은 아씨들>에 대해서도 좋은 리뷰가 많다. 하지만 이 소설과 영화라면 나도 할 얘기가 좀 있는 데다가, 마침 소니뮤직에서 받은 OST 음반 때문에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쓴다.
오랜만에 리메이크되는 영화 덕분에 새 번역도 나오고, 전에 나온 책도 덩달아 팔린다고 한다. 시대에 맞게 ‘노처녀’를 ‘독신녀’로 바꾸었다지만, ‘아씨들’이란 철 지난 제목은 그대로이다. 이번에 개봉한 <작은 아씨들>이 호화 캐스팅이라고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작은 아씨들>의 배역이 평범했던 적은 없다. 캐서린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준 앨리슨, 재닛 리, 로사노 브라치, 위노나 라이더, 커스틴 던스트, 크리스천 베일, 클레어 데인스, 게이브리얼 번… 이런 이름에 익숙한 세대에게 시얼샤 로넌이나 티머시 섈러메이 같은 이름은 화성인처럼 들린다. 그레타 거윅이라는 주목받는 감독의 이름도 거장 조지 쿠커나 1세대 여성 감독 질리언 암스트롱에 비하면 생소하다.
오랫동안 지켜본 네 자매를 새로 만나려니 영 낯설지만 일단 영화부터 보았다. 1994년작에 실망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역시 처음부터 충격이다. 매사추세츠 콩코드Concord가 아니라 뉴욕에서 시작한다. 조제핀 마치가 출판사를 찾아가 원고를 내미는 것이다. 가정교사를 하는 가난한 작가 지망생 이야기는 잠시 뒤 7년 전으로 돌아간다. 이제야 그녀가 나고 자란 콩코드이다.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의 마을이자, “미국에서 가장 큰 시골”(헨리 제임스)이다. 친숙한 장면들을 보며 “액자 구성을 취했구나” 싶을 무렵, 얘기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다. 처음 만나는 그레타 거윅의 실력에 탄복했다. 그녀는 익숙한 줄거리를, 앞뒤로 오가며 점차 현재 시점으로 관객을 이끈다. 영화를 중간에 보기 시작한 관객은 도대체 어디쯤인지 짐작 못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랬는데, 지금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라는, 인생의 반복과 유전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베스의 두 차례 병이 가족에게 미친 의미를 보여주는 장면, 한 번 로리를 내친 조가 뒤에는 먼저 그에게 다가가려는 장면에서 이런 교차의 효과는 압도적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크리스토퍼 놀런이 <덩케르크>에서 일주일, 하루, 한 시간을 오간 것과 유사하다.
이윽고 베스의 죽음 뒤에 조가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 부분에서 무릎을 치게 한다. 성인이 되어 컴퓨터로만 작업한 나는 늘 원고지 쓰던 시대의 글쓰기와 편집이 궁금했다. 마음대로 앞뒤로 오갈 수 있는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일이다. 조는 원고를 바닥에 전부 펴놓고는 퍼즐처럼 맞춰간다. 바로 필름(또는 파일)을 자르고 붙이는 영화 편집과 같은 방식이다. 이 영화를 자전적이라고 한 감독의 인생이나 원작의 줄거리를 몰라도, 이런 작업 방식으로 조와 그녀의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음악이다. 소니에서 받은 음반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작곡한 OST이다. 여기에는 보통 관객이 영화에서 들었을 클래식 음악은 빠졌다. 소니가 좀 더 신경 써서 영화에 삽입된 전체 음악을 두 장으로 발매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처음 들리는 곡은 놀랍게도 브람스 왈츠이다.
이어서 조와 로리가 둘만의 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드보르자크가 브람스를 가린다. 세련된 사교 모임엔 빈의 브람스가, 사춘기 청소년의 막춤엔 아이오와 스필빌의 보헤미아 민속음악이 어울리는 것이다.
데스플라가 한 일은 무엇인가? 여러 영화 음악에서 실력을 보였지만, 이 사람을 특징짓는 것은 ‘음색’이다. 피아노의 고음부와 하프 같은 발현악기, 실로폰 류의 타악기를 주로 쓰는 그의 음악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러시아 민속악기 발랄라이카를 주로 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대표적이다.
여러 클래식 음악을 오가면서 데스플라는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오늘날 영화 대부분이 음악감독에게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오페라 시대와 달리 감독은 음악감독이 자기보다 튀길 원치 않는다. 조가 로리를 뿌리친 뒤 보이는 복잡한 감정선에 데스플라는 말러의 ‘아다지에토’ 비슷한 멜로디를 슬쩍 들이민다.
거윅의 스토리텔링과 다채로운 음악에 감탄하다가,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궁금증이 커졌다. 이런 식이라면 내가 <작은 아씨들>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절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조와 프리드리히 베어 교수가 처음 만나 서로에게 끌리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 부분부터 거윅은 얘기를 새로 썼다. 나는 여기까지 솜씨만으로도 그녀에게 백 퍼센트 만족했기 때문에 새 전개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더 좋아할 수도 있겠다. 다만 여기서는 로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허전해하던 조가, 갑자기 나타난 프리드리히를 ‘사랑’하는 동력이 부족해 보인다. 여기서 그는 아는 출판사에 조가 버린 원고를 가져가 책으로 내주지도 않았고, 그저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에 들렀을 뿐이기 때문이다. 빈털터리라며 내미는 손(원래는 손을 맞잡고 “이제 더는 빈손이 아니에요”라고 해야 한다)을 조가 덥석 잡기엔 그녀의 존재감이 너무 커 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새 장면, 조가 자기 책을 프리드리히의 도움이 아니라 본인의 힘으로 출판하는 당찬 장면을 위해 프리드리히의 존재감은 희생된다.
올콧과 조와 자신을 하나로 만들고픈 거윅의 욕심과 자신감이 빚은 결과이니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올콧의 일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자막이나 계속 만들 밖에! 오늘도 오직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그건 그렇고 시얼샤 로넌이라는 배우는 조에 참 잘 어울린다. 처음 보고 미인이라고 생각 못 했는데, 너무 낯이 익어서 그랬나 보다. 발음하기 어려운 시얼샤Saoirse는 게일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부모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보티첼리의 주인공과 같은 고전적인 미인이다.
<작은 아씨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 졸고를 참고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