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앙과 베토벤
프랑스의 아날 학파의 미시사(微示史)는 20세기 역사학에 크게 기여했다. 미시사는 영토와 종교 때문에 벌어진 전쟁과 조약에 초점을 맞춘 기존 사관 대신, 풍속과 기후, 질병과 서민 경제의 흐름에 대한 세세한 사료를 모으고 분석해 그것이 어떤 흐름으로 전개되는가를 밝힌 작업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나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 같은 대저서가 초석을 이뤘고, 이를 바탕으로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이른바 ‘세계체제론’이라는 거시적인 경제사회사를 완성한다. 특히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는 브로델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수감되었을 때, 1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순전히 기억에만 의존하여 초고를 쓰고 해방 후 박사논문으로 제출했던 역저(力著)이다.
브로델의 작업을 연상케 하는 또 다른 수감자의 값진 노력이 있다.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92)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슐레지엔의 괴를리츠 수용소에서 수감되었다. 당시 그의 군용 가방에 든 것은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과 알반 베르크의 <서정 모음곡> 그리고 라벨과 베토벤, 스트라빈스키의 악보뿐이었다. 메시앙은 건반이 되올라 오지 않는 피아노와 줄이 셋 뿐인 첼로, 낡은 클라리넷, 바이올린을 위해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Quatuor pour la fin du Temps, 1941)를 작곡해 3만 수감자 앞에서 연주했다. 영하 30도 기온에 헐벗은 청중이었지만, 메시앙은 그의 작품에 “그처럼 깊은 주의와 이해를 보여준 적은 다시없었다”라고 회상한다. 작품에 붙은 제목은 요한 계시록의 10장 1-7절에서 따온 것이다.
또 나는 힘센 다른 천사 하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구름에 싸여 있었고, 그의 머리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었으며 얼굴은 태양과 같았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작은 두루마리를 펴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발로는 바다를 디디고 왼발로는 땅을 딛고 마치 사자가 으르렁대는 것처럼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고함을 지르자 일곱 천둥이 각각 제 소리를 내며 말을 했습니다. 그 일곱 천둥이 말할 때에 내가 그것을 기록하려고 하자, “그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비밀에 부쳐 두고 기록하지 말아라” 하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왔습니다. 내가 본 그 천사, 곧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던 천사가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고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 그리고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며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터인데 그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해 주신대로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이 완성될 것이다” 하고 다짐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떠오르게 하는 이 곡은 여덟 악장이고, 다시 각각 다음과 같은 제목을 붙였다.
수정(水晶)의 전례 / 보칼리제, 시간의 종말을 공포하는 천사에 대해 / 새들의 심연 / 간주곡 / 예수의 영원성에 대한 찬양 / 격노의 춤, 일곱 번째 나팔에 대해 / 무지개 무리, 시간의 종말을 공포하는 천사에 대해 / 예수의 불멸성에 대한 찬양
메시앙은 직접 적은 해설에서, 이와 같은 주석은 주제의 장엄함과 비교하면 헛되고 유치한 노력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 주제란 암울한 수용소 생활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전통적인 음악의 분열이 다가와 옴에 따라 음악사가 종말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이를 연장하기 위한 노력이다. 유대인 학살의 간접 체험을 옮긴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에 비하면, 직접 수용소 생활을 겪은 작곡가 치고는 훨씬 초월적이다. 어쩌면 더욱 불투명한 상황이었기에 담담히 자신의 소명에 대한 염려를 아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0세기 실내악 중 가장 중요한 이 음악은 전음계를 사용했고, 메시앙에게 가장 중요한 다중 리듬 구조를 들려준다. 이 리듬 양식은 선율과 화성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요소로서 불특정 다수 청중에게 가장 원초적으로 다가가는 수단이었다.
BBC 방송이 제작한 드라마 <에로이카>는 ‘음악의 미시사’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 영상은 시간의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80여분에 이르는 이 영화는 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을 작곡해 후원자인 로브코비츠 후작의 저택에서 그의 악단원들의 연주로 초연된 바로 그 하루의 일을 극화한 것이다. 아침나절 제자인 페르디난트 리스가 그의 집에 찾아와 스승과 함께 산책로를 가로질러 저택에 도착하고, 후작의 단원들도 삼삼오오 모여든다. 필사가는 연주 시간에 맞게 하나하나 악보를 베껴서 파트별로 나눠준다.
청중은 로브코비츠 후작과 그의 아내 마리, 헝가리 대사 디트리히슈타인 백작이다. 후작 부처는 모두 열정적인 이상주의자이자 베토벤의 숭배자이나, 디트리히슈타인 백작은 이 혈기왕성하고 어딘지 괴팍한 젊은 작곡가가 달갑지 않다. 그와 베토벤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대한 상반된 의견이 보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사랑하는 두 여인 요제피네와 테제제(브룬스비크 백작의 두 딸이다)를 기다리다 먼저 연주를 시작한다.
악단은 악보에 적힌 난폭하고 거친 음악에 당황하고, 베토벤은 이들의 맥없고 예쁘장한 도입부에 불같이 화를 낸다. 서로가 필사가의 실수가 아닌가 의심하지만, 그는 책임이 없다. 재차 삼차 강렬한 비트와 거친 악센트로 연주가 수정되는 가운데, 후작 부처는 새롭고 놀라운 경험에 놀라며 디트리히슈타인 백작은 “음악이 아닌 혼란”이라고 규정한다. 겨우 1악장을 마쳤을 뿐이나, 단원들은 기진맥진한다.
2악장 ‘장송곡’이 연주되기 앞서 기다리던 테레제와 요제피네가 도착하고, 감동적인 푸가의 선율이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나 이번에도 평가는 제 각각이다. 네 아이를 가진 미망인 요제피네는 가난한 베토벤의 청혼을 뿌리치며, 자기가 원하는 것은 “이런 고통과 투쟁이 아니라 평화”라고 말하고, 디트리히슈타인은 “감동적이지만 역시 교향곡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격노한 베토벤은 계속해서 3, 4악장을 연주하고 이번에는 노대가인 하이든이 등장한다. 제자의 과격한 음악에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이제 자신의 시대가 가고 베토벤의 시대가 왔음을 직감한다. 여러모로 마음이 편치 않은 베토벤을 위해 후작은 이 곡을 6개월 간 독점한다는 조건으로 후한 사례를 약속한다. 리스와 술집을 찾은 베토벤은 그곳에서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바치려던 곡의 헌사를 바꿔버린다.
‘음악을 영원히 바꿔 놓은 날’이라는 부제처럼 이 곡은 단 하루의 일상을 세세히 들춰 교향곡이라는 것이 음악사에서 어떻게 진화했는가 하는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영웅 교향곡>이나 심지어 베토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영상이 제공하는 긴장감과 의미심장함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장애가 없다. 등장인물 모두가 <영웅 교향곡>을 처음 듣는 것이며, 베토벤이라는 인물에 대해 오늘날의 대중보다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인물과 사건을 다루기 위해 엄청난 물량과 복잡한 시놉시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 대신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둘 미시 국면을 읽어냈다.
브로델은 세세한 사료를 통해 경제사의 흐름을 읽어내기 위해 ‘콩종크튀르Conjoncture’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장기 국면’이라 풀이하는 이 용어는, 바로 그것이 일대 격변을 맞던 1804년 어느 날 모습을 통해 음악사에 녹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