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또래가 흔히 그렇듯이 나도 SF 영화와 함께 성장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양산된 온갖 히어로와 돌연변이를 허황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부터 <인터스텔라>까지, 인류의 동화적 상상력을 과학과 연결한 SF 영화의 공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SF 영화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2016, 원제목은 ‘Arrival’)였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E.T.> 이전에 만든 <미지와의 조우>처럼 <컨택트>도 지구에 온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이 주제이다. <미지와의 조우>에서 음악을 공통의 언어로 삼았다면, <컨택트>는 외계인의 언어체계를 해독한 언어학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 영화에 파고들면서 나는 원작 소설을 읽게 되었다. 테드 창이 쓴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는 1998년에 발표되었고, 국내에도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었다.
흔히 소설이나 희곡을 읽은 사람은 그것이 영화로 각색되었을 때 불만을 털어놓는다. 작가의 의도를 훼손했다거나,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러나 영화와 책을 동시에 가까이 한 세대인 나는 그런 원작 우위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영화는 문학이 활자 상태로 아직 갖지 못한 생명력을 공감각적으로 담아낸다는 면으로 이미 그 역할을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외화인 경우, 외국어에 익숙지 않은 감상자는 첫 만남에서 자막에 의존해 줄거리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친다. 고심 끝에 완성한 촬영과 편집, 배우의 섬세한 연기, 화면 구석구석에 기울인 노력은 몇 번이고 감상해야 내 것이 된다. 물론 이 점은 문학 독해도 마찬가지이다. 세대는 물론이고 개인이 반복해서 읽을 작품이라야 고전이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영화 <컨택트>를 보지 않고 「네 인생의 이야기」를 읽었더라면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중간에 읽기를 그쳤을 것이다. 과학도인 작가가 들려준 심오한 얘기를 영화가 보여준 외계인의 비선형(非線型) 문자 체계를 통해 이해한 것이다. 대형 붓으로 휘갈긴 서예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흩뿌린 외계인의 글씨는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이는 영화가 보여준 아쉬운 점, 곧 외계 언어를 오독한 인류가 미국과 중국으로 나뉘어 갈등한다든가, 주인공이 중국 장군을 설득해 참사를 막는다든가 하는 설정의 억지스러움까지 용서할 만큼 아름다웠다.
영화에서는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수학자가 분석한 소수(素數)가 큰 역할을 하지만, 그보다는 원작에 나온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가 훨씬 핵심적이다. 테드 창은 요즘 표현으로 ‘문과라서 죄송’한 나도 이해할 만큼 쉽게 설명했고, 이를 비선형적인 외계 언어와 연결해 주인공이 시간을 초월한 인식 능력을 얻게 했다. 이런 능력은 그리 황당할 것도 없이 오랫동안 번역을 해온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차릴 만한 것이다. 일본어나 우리말과 달리 한자나 서양 언어는 목적어가 서술어 뒤에 온다. 또 문장이나 단어를 수식하는 관계절이 이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먼저 번역해야 하지만, 원문으로는 뒤에 오는 것이다. 글로 쓰고 읽을 때 차이보다 영화 자막으로 볼 때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원문을 우리 어순으로 번역하면 화면에서 인물이 말하기도 전에 해당 문구가 자막으로 먼저 나오기 때문이다. ‘시간 차 오독’이랄까!
나는 테드 창의 시간 개념을 곧 토마스 만이 『마의 산』에서, T. S. 엘리엇이 『네 사중주』에서 얘기한 시간문제로 확대해 이해했다. 짧게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원한 것 속에 앞뒤가, 무한한 것 속에 좌우가 있을 수 있을까?” - 토마스 만
“현재와 과거는 어쩌면 모두 미래에 있을지도 모른다 (중략) 시작하기 전 그리고 끝난 후에 그리고 모든 것은 항상 지금이다” - T. S. 엘리엇
테드 창의 놀라운 상상력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다른 모든 단편에서도 돋보인다. 「바빌론의 탑」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다룬다. 인간이 신에게 도달하고자 무모하게 도전한 끝에 탑이 무너지고,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되어 지금처럼 소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 또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현대적인 각색으로 찬탄을 불러왔지만, 테드 창의 「바빌론의 탑」은 오히려 구약 시대로 돌진한다. 그는 구름을 뚫은 탑의 건축 과정에서 발생했을 일들을 꼼꼼히 추적한다. 그 면밀함은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바벨탑 그림과 경쟁한다. 오스트리아 빈 예술사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속 바벨탑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모델로 했다. 무모한 욕망이 빚을 파국을 화가는 상세하고도 유머러스하게 그렸다.
소설을 읽는 동안 브뤼헐의 그림을 떠올리며 읽던 나는 마지막 순간, 주인공이 하늘의 끝에 닿았을 때 모습에 도달해 똑같이 벽에 부딪혔다.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진 미술과 건축의 상식으로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컨택트>에서 본 외계 언어가 소설을 읽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가 되었듯이, 누군가 영화나 그림으로 천공의 벽에 도달했을 때 인부들의 작업 장면을 보여준다면 무릎을 칠 일이다. 시각적인 이미지는 없었지만, 다행히 소설의 결말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아직 읽지 않은 분을 위해 ‘스포일러’는 지양해야겠다.
개인적으로 테드 창의 SF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해Understanding」였다.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주인공이 실험 중인 특별 약물로 깨어나면서 인지능력이 획기적으로 확장된다는 설정의 이야기이다. 이 또한 뤼크 베송 감독이 영화 <루시>에서 비슷한 상황을 그린 바 있다. 이번에도 그 덕에 소설의 독해가 쉬웠음은 물론이다.
주인공은 시간이 갈수록 지능이 좋아져 인류의 모든 지적인 업적을 인공지능의 자가 학습 속도로 빨아들인다. 그는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관찰하는 의사를 농락하고, 같은 방법으로 인간 병기를 양산할지 모를 CIA의 감시망을 미리 뚫어 아무도 추적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지금껏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던 지적인 영역을 향해 팽창하던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에 앞서 같은 주사를 맞고 같은 능력을 얻은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경계 끝에 마주하고 선문답과 같은 짧은 대화를 통해 공존할 수 없음을 알아챈다. 누가 먼저 공격하고, 누가 잘 막아내는가에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순간이다.
작가가 단순히 약육강식이나 권선징악의 틀로 경쟁을 몰아갔다면 삼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테드 창은 주인공과 상대방을 심미주의자와 실용주의자로 나눈다. 이해하기 쉽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성리학과 실학, 아니면 분배와 성장, 또는 순수문학과 실천문학의 대립쯤 될까? 우리는 삶의 많은 방면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거나 동전의 앞뒷면 같은 대립쌍을 발견하곤 한다. 테드 창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심미주의자라 생각하는 나로서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또한 미리 얘기해서는 안 될 스포일러이기에 일독을 권한다. 참, 앞선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테드 창은 대립하는 두 가치가 공존하는 상태를 언급했다. ‘논 제로섬 게임’.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사는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