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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pr 23. 2021

화씨 451, 책의 미래, 음악은?

<Fahrenheit 451>을 읽고, 보고, 듣고

※ 이 포스팅은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독서 통합포털에 기고한 것입니다.

레이 브래드버리 씀, 박상준 옮김

황금가지. 2009년


이달의 책을 얘기하기 전에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 두 가지를 소개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는 바르셀로나의 헌책방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발견한 뒤 평생 연주에 매진해 세상에 널리 알렸다. 

만년의 연주 장면을 담은 영상

그에 앞서 펠릭스 멘델스존은 한 세기 전 바흐가 쓴 <마태 수난곡>의 자필 악보가 정육점 포장지로 쓰이는 것을 발견했다. 카살스와 멘델스존 이전에 바흐의 진가를 안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하는 이 일화는 오독의 가능성이 있다. 나는 처음에 이들이 인디애나 존스처럼 헌책방과 정육점에서 유일본 악보를 발견한 줄로 알았다. 한참 뒤에야 그것이 아님을 이해했다. 카살스와 멘델스존은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안목이 있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야사임을 밝힘

지난달에 밝혔듯이 나는 SF 소설 분야의 문외한이다. 이 분야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1920-2012)와 1953년에 나온 그의 대표작 『화씨 451』에 대해 안 것도 몇 달 전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분야에 거의 문외한이고 내가 관심 있는 몇 가지에 대해 아주 조금 알 뿐이기에 놀라울 것은 없다. 나는 『화씨 451』을 거의 헌책방에서 베스트셀러의 커버로 쓰이다 발견된 책처럼 복잡한 경로로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좀 뒤로 미루고 먼저 줄거리를 요약한다. 

‘화씨 451’은 책이 불에 타는 온도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히틀러의 베를린 분서 사건, 중국의 문화 혁명처럼 광기의 시대를 그린다. 그런데 때는 가까운 미래이다. 정확히는 1990년 이후 두 번의 핵전쟁에서 생존한 승자 사회이다. 밖의 세상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주인공 몬태그는 책을 태우는 방화수(放火手)이다. 방화수는 우리가 아는 소방서와 같은 곳에 대기하다가 소방차와 같은 탈것을 타고 출동한다. 그러나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화염 방사기로 책과 그 책이 있는 집을 태우는 사람이다.

방화서의 로고는 살라만더(Salamander)이다. 불꽃에 타지 않는 도마뱀(도롱뇽)은 <겨울 왕국 2 Frozen 2>에 나와 유명해졌지만, 원래 전설상의 동물이다. 몸에서 나온 점액 때문에 불에 강한 이 동물에 중세 연금술사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원소 불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브루니는 영부인인데!

브람스가 카를 폰 렘케의 시에 곡을 붙였다. 무정한 여인이 도마뱀을 불에 던져도 타지 않듯이 내 사랑도 뜨겁게 피어나리라는 노래이다.

함 잡솨봐!
몬태그의 아내를 비롯해 그가 아는 평범한 사람들은 책 없는 세상에 익숙하며, TV와 라디오와 한 몸이 되다시피 한 삶을 산다. 이웃 소녀 클라리스는 남달랐다. 호기심 많고 명랑한 성격인 그녀는 늘 꿈꾸는 듯한 질문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몬태그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집에서 수많은 책을 태우려다, 집주인이 나오기를 거부하고 함께 타 죽기를 택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다음날 출근하지 않은 그에게 베이티 서장이 찾아온다. 서장은 방화수가 생긴 유래를 설명한다. 세상이 편리하고 자극적인 것을 선호하면서 출판은 위축되고 책의 내용은 점점 요약된다. 건축과 방염 기술이 발달하면서 소방수도 일자리를 잃는다. 당국은 책이 사람들의 염세주의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해 실업자가 될 소방수를 방화수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서장은 몬태그에게 만일 책을 숨겨둔 방화수가 있다면 자수할 24시간의 말미가 있다는 뜨끔한 언질을 주고 떠난다.
온라인에 마비된 현대인
사실 몬태그는 집에 많은 책을 감춰두고 있었다. 서장이 간 뒤 아내에게 사실을 고백한 그는 두 권만 함께 읽어보고 무익하다면 포기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아내는 친구들과 TV를 보는 데 더 정신이 팔려 있다. 몬태그는 일전에 공원에서 만난 노학자 파버를 찾아간다. 전화로는 몬태그를 경계했던 교수는 그가 가져온 세상에 하나뿐일지 모를 성서(일부인 「전도서」이다)를 보자 반기며 책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다음날 몬태그가 서장과 독서의 효용에 대해 논쟁할 때 책이 발견되었다는 경보가 울린다. 출동한 곳은 몬태그의 집이다.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책은 곧 태워지고, 저항하던 몬태그는 서장에게 화염을 방사한 뒤 로봇 사냥개들에게 쫓긴다. 그는 파버의 집으로 피신하고 그를 통해 아직 책을 읽는 사람들을 만난다. 난민처럼 생활하는 그들은 각자 한 권의 책을 외운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저장소에 소중한 정보를 간직하는 것이다. 다음날 핵전쟁은 알아차릴 새도 없던 많은 사람을 쓸어간다. 몬태그를 비롯한 소수의 생존자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터전으로 돌아간다.     

『화씨 451』을 읽는 동안 머릿속 수많은 포장지가 스쳐갔다. 부시 행정부의 위선을 고발한 마이클 무어의 영화 <화씨 9/11>은 당연히 이 소설에서 제목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성서를 가진 순례자의 이야기는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일라이The Book of Eli>로 거듭났다. 워싱턴은 마지막 남은 인류의 성서를 통째로 외운 사람이다. 그가 앞을 못 보고 그의 성서가 점자책이라는 반전은 기막히다. 

그저 매드 맥스 아류는 아니다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의 통제 사회 또한 이 소설이 모델일 것이다. 감정을 유발하는 모든 물건이 금지된 사회에서 ‘성직자Cleric’라 불리는 감찰 대원들은 책과 음반 따위를 찾아 태운다. <합창 교향곡>의 1악장이 냉정한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루드윅 반 빗호벤

그 밖에도 사나운 로봇 사냥개를 보고 <킹스맨: 골든 서클>을 머리에 그린 젊은이도 있을 테고, 바스커빌 가의 개를 떠올릴 중년의 셜록 홈스 팬도 있을 것이며, 저승을 지키는 케르베로스가 원형이랄 신화학자도 있을 것이다.

엘턴 존, 사냥개 조련사

이런 단편적인 포장지들을 좀 더 맞춰보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설계한 『바벨의 도서관』이 드러난다. 그 조각보에 따라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썼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인터스텔라>에서 창조한 초월적인 책장 뒤 시공간도 보르헤스에 대한 오마주이다. 곧,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이제 내가 『화씨 451』을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 얘기할 차례이다. 영화 <빌리 엘리엇>의 실존 인물로 알려진 매슈 본은 많은 무용을 안무했는데, 가장 최근 성공작이 <레드 슈즈The Red Shoes>이다. 

올초 국내 상영으로 마침내 전막을 보았다

이 발레는 파월과 프레스버거라는 단짝 영화감독이 만든 동명 영화가 원작이다. 영화는 다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로 만든 것이다. 결국 고전이 시대의 옷을 바꿔 입은 것이다. 발레 <레드 슈즈>는 다시 버너드 허먼의 영화 음악을 짜깁는다. 


https://youtu.be/J7KIs-xEVkc (한 놀라운 유튜버가 음악을 다 밝혀 보였다)


앨프레드 히치콕과 많은 작업을 한 허먼의 음악 가운데 <시민 케인>, <유령과 뮤어 부인> 그리고 마침내 <화씨 451>의 음악이 발레에 사용되었다. 그러니 나에게는 <레드 슈즈>가 카살스의 헌책방 악보이고, 허먼의 영화 음악이 멘델스존의 정육 포장지인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동명 영화

영화 <화씨 451>은 프랑수아 트뤼포라는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의 일원이 감독했다. 그는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꽤 많이 각색했다. 몬태그의 아내와 이웃 소녀 클라리스를 줄리 크리스티(의사 지바고의 연인이다) 한 사람이 맡는다. 몬태그는 아내와 똑같은 이웃을 만나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소녀 클라리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지만, 영화에서는 몬태그가 난민촌에서 그녀와 재회한다. 마지막에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영화 안 찍을 거지?"

브래드버리가 트뤼포의 각색에 기분 나빴을까? 책에 초판 30년 뒤에 쓴 저자 후기가 실려 있다. 나는 이렇게 흥미진진한 후기를 본 적이 없다. 말 그대로 뒷이야기이다. 그는 트뤼포의 영화를 잘 보았다고 말하고 소설의 등장인물을 다시 소환한다. 베이티 서장이다. 서장은 소설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그는 젊은 시절 대단한 독서가였고, 현재도 방대한 책을 보유 중이다. 어떻게 처벌받지 않았느냐고? 그는 책을 소유만 할 뿐 읽지는 않는다!

베를린 오페라 광장에서 책을 태우는 나치

나는 기가 막혔다. 베이티는 바로 나이다. 책을 읽는 속도가 도저히 책을 소유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독자이자 저자 말이다. 책이란 무엇인가! 책은 이정표이다. 저자가 어디까지 왔는지 기록하는 것이다. 문자 이래 인류는 크게 나아가지 못했고, 잔가지만 늘어나 그것까지 들추다 보면 도리어 선대의 수준을 밑돌기 일쑤이다. 그렇다고 잔가지를 다 쳐낼 수도 없다. 그러다가는 아예 나무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는 이런 식으로 끝없이 물려받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이정표로 책을 남기지만, 문명의 지속은 지구의 몰락 속도를 높였다. 인류가 초록별의 암적인 존재라면 차라리 이정표를 다 태우는 선택이 맞지 않았을까? 소설 속 난민촌에서 정보를 외워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와 성서가 처음 쓰인 방식이다.

<스트라빈스키: 종의 최후>와 관계없음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 간 H. G. 웰스는 괴물의 노예로 사는 인류를 발견한다. <혹성 탈출>의 찰턴 헤스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만과 무절제로 인한 인류의 자멸이 역설적으로 지구를 구한 것이 아닌가!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소고기를 덜 먹자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면, 음악도 덜 듣고 책도 덜 보는 편이 지구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염병을 퍼뜨리거나 핵전쟁을 일으켜, 또는 손가락을 튕겨 인류의 절반을 날려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인도적인 방식일지 모른다. 어차피 더는 음악과 책이 나오지 못한대도 이미 나와 있는 음악과 책도 다 소화를 못 할 테니 말이다. 아마 『화씨 451』에서 책을 태워버리려고 했던 사람도 이런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나는 한 발짝도 더 내딛지 못하고 탄소 배출만 늘리는 형편이다. 내 머리가 화씨 451을 향해 뜨거워지고 있다.


그건 그렇고 매년 4월 23일, 그러니까 오늘은 유네스코가 정한 책의 날이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가 1616년 4월 22(23)일에 타계했음을 기억하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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