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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24. 2021

온라인 자선의 위선

아프가니스탄을 생각하며

온라인으로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온라인으로 불특정 다수와 연결되며 온라인으로 어디로든 돈을 보낸다. 덕분에 어디서인지 기억나지 않는 정보를 토대로 누구인지 모르는 불쌍한 사람에게 부담되지 않을 정도의 돈을 보내고는 쉽게 잊곤 한다. 때로는 정기적으로 송금하도록 해놓고 꾸준히 자선한다고 스스로 안심시킨다. 온라인으로 자선할 수 있을까?


2019년 중국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의 우산 시위가 거세었다. 2020년 벨라루스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졌고 시민들이 독재에 항거했다. 2021년에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가 무고한 시민을 짓밟았다. 그때마다 안팎에서 우리가 광주민주화항쟁을 겪은 나라가 아니냐고 관심을 호소했다. 기껏해야 온라인 관심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강 건너 불구경처럼 생각한 탓인지 급기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는 뉴스까지 들린다. 미국 책임으로 돌리기도 하고 멀리 영국과 러시아의 제국주의 야욕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외세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도 문제일 것이다. 

킴.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하창수 옮김. 문학동네. 2009.

홍콩이나 미얀마, 벨라루스 때보다는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가지려고 오래된 숙제를 집어 들었다. 인도 태생의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 『킴』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에 대해 좀 더 아는 것이 내가 기울일 수 있는 가장 큰 관심 아닐까? 만일 2024년 파리 올림픽에 아프가니스탄이 참가한다면 어떻게 소개해야 그들이 반갑고 자랑스럽게 여길지 알고 싶어서이다. ‘탈레반의 나라, 부르카의 나라’라고 소개할 수는 없지 않은가! 『킴』이 오롯이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책은 아니다. 반쯤 걸쳐 있다고 할까? 게다가 남의 눈으로 본 것이라 아쉽지만 나로서는 가장 가까이 데려다줄 안내서이다.

라호르 박물관 앞 잠자마 대포 아래서 양아치 짓을 하는 킴

『킴』은 어린이가 주인공인 모험소설이다. 배경은 19세기 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인도 북부이다.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은 남방정책을 펴던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한다. 아일랜드 출신 영국 장교의 아들 킴은 어려서 부모가 모두 죽은 고아이다. 라호르(현 파키스탄)의 저잣거리에서 잡초처럼 자라면서 눈치 백 단이 된 소년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파슈툰족 말 장수 마부브 알리이다. 파슈툰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절반(1460만 명)을 차지하는 최대 부족이다. ‘탈레반’ 또한 파슈툰 말로 ‘학생들’이라는 뜻이다. 아랍권은 물론 서방에도 상당수가 거주하는 파슈툰은 2억 파키스탄 인구 제2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파키스탄의 파슈툰(약 3280만 명)은 나머지 전 세계 파슈툰을 다 합친 것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이들은 부족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한다. 탈레반이 주변국에 미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은 이유이다. 파슈툰 말 장수 마부브 알리는 영국 정보 장교 크라이턴 대령을 돕는 첩자이다. 그러니 마부브 알리의 끄나풀 킴은 제국주의의 앵벌이 신세이다.

펀잡인 킵이 『킴』을 읽어준다
파자마 아님

킴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 ‘초원의 붉은 황소’를 잊지 않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굶어 죽기 직전인 라마승을 만난다. 킴이 구걸해 살려낸 라마승은 티베트를 떠나온 이래 ‘화살의 강’을 찾고 있다. 부처가 쏜 화살이 떨어진 곳에서 샘이 솟아 생긴 화살의 강에 몸을 씻으면 죄를 벗고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킴은 라마승을 스승으로 모시며 함께 길을 떠난다. 이들이 순례한 곳이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방글라데시까지 카라반이 동서를 다니던 2700킬로미터 ‘대간선도로Grand Trunk Road’이다. 

화살 강을 아시오?

킴은 여행길에 우연히 아버지가 복무하던 연대와 마주친다. 군종 사제는 킴이 간직한 서류를 보고 그가 연대의 아들임을 알아보았고, 반대로 킴은 연대의 깃발에 그려진 ‘초원의 붉은 황소’로 아버지의 유언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그을린 피부색과 달리 속살은 하얀 백인임이 알려진 킴은 기숙학교로 보내진다. 스승 라마승도 그가 뿌리에 맞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잠시 이별을 고한다.

안녕, 난 해리 포.. 아니 킴벌 오하라라고 해!

방학 중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킴은 현지 첩자 러간으로부터 스파이의 기본기를 착실히 배운다. 그는 알게 모르게 영국의 중앙아시아 책략인 ‘그레이트 게임’의 중요한 말(馬)이 되어 간다. 임무를 맡은 킴은 마침 제자가 그리워 찾아온 스승과 다시 길을 떠난다. 킴은 화살의 강 따위는 있을 리 없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정탐했다. 

Kim's Game: 김정은 아님!

킴은 러시아 첩자들의 지도와 서류, 중요한 장비를 없애는 공을 세웠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라마승은 러시아인들에게 폭행당해 급속도로 건강을 잃는다. 킴은 자신이 스승을 돌보지 못하고 화살의 강과 멀어지게 한 것을 뉘우치지만, 도리어 스승은 그 역시 인과응보라고 위로한다. 스승은 이미 화살의 강을 보았고 영혼이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경험을 통해 해탈했다.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이 곧, 화살의 강이라며 제자에게 구원받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제자야, 이곳이 오즈더냐?

『정글북』의 작가이기도 한 키플링은 5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소년의 눈을 통해 흥미진진한 여행기를 펼쳐 보인다. 그것은 그저 지리적인 이국 순례가 아니라 문명과 정신의 순례이기도 하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은 킴의 첩보 활약 사이로 라마승이 들려주는 명상과 윤회의 가르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 마지막에 라마승이 발견한 화살의 강 이야기에 잠시 눈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키플링 백을 찾았더니 더 좋은 게 나옴

키플링은 1907년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영국 최초였다. 그는 평생 영국인으로 관찰한 식민지 인도를 그리고자 했지만, 만년에 “동과 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라고 예언했다. 그로부터 80년 뒤인 1986년 뉴욕의 행위 예술가 백남준은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이라는 공연을 주도했다. 화가 키스 헤링, 작곡가 필립 글래스, 가야금 명인 황병기, 일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 록 뮤지션 루 리드 등을 인공위성과 비디오 아트로 연결하는 ‘온라인’ 프로젝트였다. 과연 키플링은 틀렸고, 동과 서는 마침내 만났을까?

백 선생 명성이 너무 오래간다

『킴』의 라마승이 도달한 깨달음은 나와 같은 유한한 독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이 초월적이다. 그는 막막한 순간 자포자기로 수행한 단식과 명상을 통해 시공을 초월해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져 위대한 영혼과 마주한다. ‘온라인’으로 유체이탈한 것이랄까? 그러나 해탈의 경지로부터 그를 다시 끌어내린 것은 위험에 처한 제자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이었다. 측은지심이 그를 다시 속세로 되돌린 것이다.

내 화살 강을 찾았으니 여한이 없구나!

책장을 덮으며 나도 현실로 돌아왔다. 온라인 자선은 책임을 유보하는 수단이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돕지 않게 하며, 닿지 않는다는 핑계로 더 호들갑 떨게 한다. 아프가니스탄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제 나라에 난민이 들어오는 건 꺼린다. 오지랖 넓게 아프가니스탄까지 갈 것도 없이 인권이라면 같은 나라말을 쓰는 이북 사람도 못지않게 비참하다. 이북 생각할 것도 없이 내 주위에도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많다. 남까지 갈 것이 아니라 가족부터 온라인을 거두어야 한다. 말처럼 쉬우면 누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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