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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Dec 30. 2020

슈투트가르트의 음악가 (1)

니콜로 욤멜리의 레퀴엠과 모차르트의 그랑 파르티타

네카어(또는 네카르, Neckar)는 독일 남서부를 휘감는 강이다. 슈바르츠발트(黑林)와 슈바벤 알프스에서 발원해, 만하임에서 라인강과 만나기까지 네카어가 거치는 도시가 옛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영토를 이룬다. 헤르만 헤세의 도시 튀빙겐과 수도 슈투트가르트, 루트비히스부르크, 하일브론, 하이델베르크가 네카어의 젖줄을 문 자식들이다.

아래쪽 고지대에서 발원해 위로 흘러가는 것이다. (위키피디아)

동쪽 뉘른베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슈투트가르트에 가까워지면 독일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축구 경기장이 나타난다. 메르체데스 벤츠의 이름이 선명한 아레나의 위용은 남다르다.

사실은 벤츠가 베를린에 새 경기장을 지어주어서 너무 낡아 보인다. 미세먼지까지...

북쪽 프랑크푸르트에서 슈투트가르트로 와도 마찬가지이다. 왼쪽 루트비히스부르크를 지나는가 싶을 때 오른쪽엔 포르셰 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포르셰 박물관, 축구장 옆 포르셰 아레나는 테니스장이다

그러나 베를린이나 뮌헨과 같은 라이벌 도시들에 비해 슈투트가르트의 주인공은 선뜻 생각나지 않는다.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궁전에는 누가 살았으며, 뭘 보고 듣고 먹고 입었을까?

뷔르템베르크의 영주들. 에버하르트 루이, 그의 조카 카를 알렉산더, 그의 아들 카를 오이겐

뷔르템베르크의 10대 공작 에버하르트 루이Eberhard Louis는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와서는 루트비히스부르크에 똑같은 궁전을 짓기로 했다. 고혈을 뽑아 짓기 시작한 궁전의 완공을 보지 못 하고 죽은 에버하르트 루이에 이어 1733년 조카 카를 알렉산더가 대공에 올랐지만, 그 또한 4년이 채 못 되어 1737년에 세상을 떠난다.

사이좋았던 고부. 마리아 아우구스타와 절세 미녀 엘리자베트 프리데리케

대공비 투른 운트 탁시스의 마리아 아우구스타Maria Augusta von Thurn und Taxis가 아홉 살에 불과한 아들 카를 오이겐(1728-1793)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뷔르템베르크의 미망인과 어린 아들은 위태로웠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보호를 자청했고, 공자 카를 오이겐과 형제들은 상수시 궁전에 머무르게 되었다. 대왕의 음악가들에게 배운 카를 오이겐의 안목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바흐의 둘째 아들 카를 에마누엘은 어린 대공에게 여섯 개의 소나타를 헌정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포츠담까지 오가는 길에 대공은 바이로이트를 지났다. 그곳에서 1741년 프리드리히 대왕의 누이의 딸 엘리자베트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카사노바가 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족이라고 칭송했을 만큼 미모가 빼어났다.

아돌프 멘첼의 그림 속 피리부는 사나이 뒤 고개를 갸우뚱한 여인이 엘리자베트의 모친이다 (본인 제작)

카를 오이겐은 스무 살인 1748년 브란덴부르크 바이로이트의 엘리자베트 프리데리케 조피와 결혼했다. 바이로이트에서 열린 결혼식은 더없이 화려했다. 변경백 극장에서는 오페라가 상연되었고, 불꽃놀이는 장관이었다.

바이로이트 변경백 극장은 영화 <파리넬리>의 무대이다

그렇지만 대공은 신혼 때부터 외도를 일삼았다. 엘리자베트 대공비는 딸을 하나 낳았지만 아기는 얼마 못 가 죽었다. 후사에 목마른 남편이 부정을 그치지 않자 부부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1756년에 모든 불화가 폭발했다. 대공은 아내의 친구인 궁정 가수 마리아네 피르커Marianne Pirker가 자신의 외도를 고자질했다는 죄명으로 체포해 수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카를 오이겐 대공은 7년 전쟁에서 프랑스,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프로이센, 영국과 싸웠다. 프로이센은 어린 시절의 은인이자 처가의 친정이었다. 엘리자베트 대공비는 그해에 바이로이트에 다니러 갔다가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카를 오이겐과 엘리자베트는 이혼하지 않은 채 별거했고, 그 사이에 대공은 많은 정부를 두었다.

슈바벤의 베르사유라 불리는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 슈투트가르트 북쪽 약 10킬로미터에 있다

난봉꾼 카를 오이겐은 선대의 유업인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을 완성했고, 슈투트가르트의 신 궁전과 더불어 절대왕정의 구심으로 삼았다. 그는 루이 14세나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철권통치를 하면서도, 오페라, 도서관, 식물원 따위의 문화사업, 다시 말해 ‘사치’에도 매진했다.

니콜로 욤멜리

나폴리 태생의 오페라 작곡가 니콜로 욤멜리(Niccolò Jommelli, 1714-1774)가 슈투트가르트에 온 것이 그 무렵인 1753년이다. 그는 이미 베네치아와 로마, 빈에서 성공을 거둔 유럽 최고의 음악가였고, 새로 지은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의 극장은 욤멜리를 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공은 라이벌 만하임으로 가려던 그의 발길을 돌리게 했다. 대공의 눈밖에 나기 전 소프라노 마리아네 피르커가 욤멜리의 히로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때 욤멜리가 쓴 많은 오페라 가운데 메타스타시오 대본에 붙인 <티토 황제의 자비La clemenza di Tito>가 있다. 글루크와 모차르트가 쓴 오페라와 같은 대본이다.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 예배당의 천장화. 욤멜리의 음악이 울린 곳이다

대공 부부의 아슬아슬한 결혼 생활은 1756년 대공의 모친 마리아 아우구스타가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며 파국으로 치달았다. 남편을 잃고도 아들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구하고자 섭정을 했던 어머니이지만, 아들은 성년이 되면서부터 크게 싸운 뒤로 어머니를 괴핑겐Göppingen에 유폐하다시피 했다. 2월 1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반목했던 아들도 누그러졌다. 그는 욤멜리에게 진혼곡을 쓰도록 명했다. 대공의 생일 축하 오페라를 쓰는 것이 주임무였던 욤멜리로서는 드물게 옛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왔다. 옛날 로마와 베네치아에서부터 그는 예배 음악에 정통했다. 욤멜리는 불과 사흘 만에 <레퀴엠>을 완성했고, 2월 9일 루트비히스부르크 예배당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마리아네 피르커를 앞세워 연주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지 보름쯤 되었을 때이다.


모차르트 부자는 1763년 유럽 연주 여행 때 루트비히스부르크를 지나며 욤멜리를 만났다. 꼭 이때가 아니더라도 모차르트가 욤멜리의 <레퀴엠>을 접할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나폴리의 니콜라 살라, 스트라스부르의 프란츠 크사버 리히터, 빈의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선배의 곡을 차용했고, 19세기까지 이 곡은 많은 명사의 장례식에 쓰였다.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3세 대공,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 프랑스의 루이 15세,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헤센 카셀 대공 프리드리히 2세를 추모하는 데 쓰였다. 1868년 파리 생 트리니테 성당에서 열린 로시니 장례식 때도 ‘입당송’이 연주되었다.

욤멜리의 입당송

나는 이 입당송을 듣고 깜짝 놀랐다. 모차르트가 1781년에 쓴 세레나데 <그랑 파르티타>와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 곡의 뿌리가 25년 전에 나폴리 태생의 작곡가가 쓴 <레퀴엠>의 입당송인 것이다. 이 곡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은 영화 <아마데우스>의 원작자 피터 셰퍼이다. 그는 살리에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스퀴즈박스"
“그 음악은 단조롭게 시작했습니다. 바순과 바셋 호른이 어우러진 가장 낮고 단순한 음조였고, 마치 낡은 손풍금 같은 소리를 냈습니다. 만약 그 박자가 느리지 않았더라면, 분명 우습게 들렸을 겁니다. 허나 그 느린 박자는 잔잔한 고요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위로 오보에의 단선율이 튀어나왔죠. 그 소리는 계속되었고, 난 귀를 거머쥐었고 - 내 마음이 뚫리고 - 그만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클라리넷이 울려 퍼지더군요. 그제야 나는 숨을 내쉬었고, 가슴이 한결 후련해졌어요. 짜릿한 환희에 떨었습니다. 방안의 불빛이 흐릿해졌고 점점 높아가는 저음에 높은 음역의 악기가 흐느끼듯 속삭이듯 서로 얽히면서 나의 심혼을 사로잡았습니다. 고통의 가느다란 밧줄이 나를 휘감고 조였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외쳐댔죠. “이것이 뭡니까? ...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그러나 손풍금 같은 그 음악은 계속 울려 퍼졌고, 내 머리를 무섭게 으깨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나는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Such unfulfillable longing!"

살리에리는 (물론 허구이지만) 모차르트의 <그랑 파르티타> 전에 이미 욤멜리의 <레퀴엠>을 듣고 위와 같이 말하지 않았을까? 물론 여기서 낡은 손풍금과 같은 바순과 바셋 호른은 합창이고, 오보에는 소프라노 독창(마리아네 피르커), 그녀를 받치는 클라리넷은 알토 음성인 것만 다르다. 모차르트라면 이렇게 생각했을까? 

“간단하군! 관악기로 풀 수 있겠어!”

물론 욤멜리 음악의 아름다움은 시작에 그치지 않는다. 대개의 작곡가가 무시무시하게 그리는 ‘진노의 날Dies Irae’도 그에게는 한발 물러선 남의 일로 들린다.

욤멜리의 '진노의 날'

욤멜리에 앞선 보헤미아의 거장 얀 디스마스 첼렌카도, 욤멜리가 영향을 받은 요한 아돌프 하세도 ‘진노의 날’을 이렇게 포근하게 그리지는 않았다. 물론 모차르트도!

욤멜리의 '피에 예수'

‘경건하신 예수님Pie Jesu’은 차라리 자장가와 같다. 1868년 생 트리니테 성당 로시니 장례식에 모인 4천 명의 추모객 가운데 23세의 가브리엘 포레가 있었더라면 분명 뒷날 <레퀴엠>(1888)을 쓸 때 욤멜리를 참고했으리라.

포레의 '피에 예수'

‘저희를 구하소서Libera me’부터는 욤멜리의 선배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와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 <레퀴엠>을 오가느라 정신없는 나를 발견한다.


참고자료:

줄리오 프란디의 욤멜리 <레퀴엠> 음반 해설 (아래)

Heartz, Daniel. <Music in European Capitals: The Galant Style, 1720-1780>. Norton. 2003

위키피디아: 제 항목 Charles Alexander, Duke of Württemberg; Princess Elisabeth Friederike Sophie of Brandenburg-Bayreuth; Princess Marie Auguste of Thurn and Tax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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