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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pr 16. 2020

어느 의회라도 분에 넘칠 선물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드레스덴과 더불어 작센 공국의 중심 도시이자, 제국 자유도시로 독립적인 지휘를 누렸던 라이프치히. 바흐와 멘델스존, 바그너의 도시이자, 괴테와 말러가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다. 중심 광장에 옛 시청이 있고 그 뒤에는 여기서 학창 시절을 보낸 괴테의 동상이 섰다. 현재 시청은 20세기 초 신축해 근처로 옮겼고, 옛 시청사는 도시 역사박물관으로 쓴다. 

학생 괴테, 직박구리 찬조

박물관은 물류의 중심이었던 라이프치히의 옛 모습부터 동독 시절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섰던 장면까지 여러 자료를 소장했다. 유럽에서 흔히 만나는 시가지 모형이 이곳 연회장에도 전시 중이다. 연회장 벽에는 역대 도시를 이끌었던 유력인사 초상을 걸었다. 라이프치히 시장과 시의원들은 모든 살림을 책임졌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 하나가, 시 음악 책임자를 뽑는 일이었다. 바흐가 삼순위로 라이프히치에 온 내력은 자주 소개했다. 그런 만큼 새로 부임한 바흐는 실력을 입증해야 했다.

옛 시청 연회장Festsaal과 시가지 모형

첫 해에 쓴 대표작이 <마니피카트>와 ‘시의회 개원Ratswechsel 또는 Ratswahl’을 위한 칸타타이다. 바흐 부임 석 달 뒤에 초연된 라츠발 칸타타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양하라, Preise, Jerusalem, den Herrn, BWV 119>는 금관과 팀파니가 포함된 오케스트라에 4부 합창과 네 독창자까지 당당하게 가세한다. 시 의회는 1723년 8월 24일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이 곡으로 축성식을 올렸다. 우리 전통에 빗대자면, 새 시의원들 일 잘하라고 고사 드린 것이다.

2년 뒤 1725년에 작곡한 <전능하고 명예로운 왕이신 주님을 찬양하라Lobe den Herren, den mächtigen König der Ehren, BWV 137>도 같은 분위기이다. 편성은 앞선 곡과 비슷한데, 트럼펫이 하나 줄고, 팀파니도 빠진다. 레치타티보가 없고, 네 독창의 아리아가 나온다. 이 곡은 삼위일체 축일 뒤 12번째 일요일을 기념하는 곡이지만, 존 엘리엇 가드너는 축일에나 쓰이는 편성으로 볼 때 역시 매년 8월 말에 기념했던 의회 개원을 위한 곡이라고 추측한다.

(3:33) 이 분이 주인공은 아닌데...

이 칸타타의 알토 아리아, ‘이렇게 위대하게 다스리시는 주님을 찬양하자Lobe den Herren, der alles so herrlich regieret’는 좀 익숙한 선율이다.


https://youtu.be/BEmC7S3TqPg

(4:34) 같은 곡의 스위스 공연. 그런데 여기에도 위의 소프라노 미리암 포어어징어가 이마를 까고 나온다


오르간을 위한 <쉬블러 코랄집Schübler Chorales>의 마지막 곡 ‘이제 오소서, 예수님, 하늘로부터 이 땅 아래로Kommst du nun, Jesu, vom Himmel herunter’와 같은 곡조이다.

오르간 원곡
앙상블로 편곡해도 좋네

그런가 하면 1728년 시의회 개원 축하곡으로 추정되는 <주님, 고요 속에 찬송받으소서Gott, man lobet dich in der Stille, BWV 120>의 두 번째 합창은 <B단조 미사>의 ‘사도신경Credo’ 가운데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으며Et expecto resurrectionem mortuorum’에 다시 사용된다. 바흐는 고작 한두 번 연주될 곡을 쓰면서, 종종 자작곡을 재활용했다. 이건 자기 표절이 아니라, 고맙고 반가워할 일이다.

(5:42) 어쩔 거냐!


존 엘리엇 가드너와 몬테베르디 합창단/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

바흐는 라이프치히 이전에도 의회 개원을 위한 칸타타를 썼다. 오르가니스트로 처음 부임했던 뮐하우젠에서 쓴 <주님의 나의 왕이시니, Gott ist mein König, BWV 71>는 처음으로 출판된 그의 음악이다. 또 아마도 내가 처음 본 바흐의 칸타타이기도 하다. 바흐 탄생 300주년이던 1985년 EBS(당시 KBS3)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가운데 뮐하우젠 시대를 대표하는 곡으로 소개되었다.

스물세 살 바흐가 쓴 이 걸작을 텔레만 실내 악단의 뮐하우젠 성모 마리아 교회 공연으로 유튜브에서 만날 수 있다.

화질이 문제가 아니다!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이거나 뮐하우젠 성모 마리아 교회이거나, 이날 바흐는 새로 임기를 시작하는 시의원들을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이 데려갔다. 그는 그저 월급이 좀 올랐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가장 귀한 천국 기행의 대가로는 너무 저렴하지 않은가? 서로 잘났다고 이전투구하는 국회가 바흐의 손톱만큼이라도 열심히 일한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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