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네 자매 가운데 유럽 그랜드 투어를 가는 이는 막내 에이미이지만, 이는 저자이자 둘째 조이기도 한 루이자 메이 올컷의 실제 경험담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누린 소중한 경험을 에이미와 로리의 눈을 통해 소개한다. 로리는 조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실망해 유럽으로 갔고 음악의 재능을 더욱 갈고닦아 작곡가가 되려 한다. 빈에서 오페라 작곡에 매진하던 그는 모차르트의 초상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정말 대단한 남자였군. 한 누이를 잡을 수 없자 다른 누이를 선택해 행복해졌으니까.”
모차르트가 언니 알로이지아 베버에게 실연당하고 그녀의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한 예를 떠올리는 장면은, 로리가 조를 잊고 동생 에이미에게 갈 것이라 예고한다. 로리는 부족한 작곡 재능을 다그쳤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직접 쓴 오페라를 찢어버렸다.
알로이지아와 콘스탄체 베버 자매. 모차르트의 동생 선택은 드보르자크로 이어진다. 에이미가 아일랜드 여행 중 들은 민요도 흥미롭다. 에이미는 자신이 아름다운 킬라니Killarney 호숫가에 갔다는 말을 들은 한 신사가 바로 노래를 불러줬는데, 그 내용이 실없다고 가족들에게 편지했다.
Oh, have you e’er heard of Kate Kearney?
She lives on the banks of Killarney;
From the glance of her eye,
Shun danger and fly,
For fatal’s the glance of Kate Kearney
아, 케이트 커니라고 들어 봤나요?
킬라니 호숫가에 살지요
일단 그녀의 눈을 보면
위험하니 도망가세요
케이트 커니를 보면 치명적일 테니까요
아일랜드 서남쪽에 위치한 킬라니 호수는 18세기부터 이름난 관광지였다. 1861년 빅토리아 여왕이 다녀간 뒤로는 국제적인 명소로 이름났다. 호수를 중심으로 커리 지방을 도는 179킬로미터 둘레길은 ‘링 오브 커리Ring of Kerry’라고 해서 오늘날도 많은 발길이 이어진다.
언덕 너머 호수가 보인다 에이미가 위와 같은 가사를 똑똑히 기억하는 것은 자신도 반복해 들어 부를 수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편지에 적힌 가사로만 노래를 접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이다. ‘케이트 커니’는 도대체 얼마나 치명적이었을까? 에이미는 왜 그 노래가 실없다고 했을까?
킬라니 호숫가 케이트 커니의 이름을 딴 토속 음식점의 공연 모습
루트비히 반 베토벤은 1814-1816년에 영국의 출판업자 조지 톰슨George Thomson의 의뢰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민요를 편곡했다. 톰슨은 1803년부터 베토벤에게 여러 곡을 위촉했지만, 그것이 결실을 본 것은 10년도 더 지나서였다. 처음에는 전쟁 탓에 서로 간의 소통이 더뎠고, 민요를 가지고 소나타 선집을 써달라는 요청은 베토벤이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하찮게 여길 줄 알았던 민요 편곡에 베토벤이 관심을 보이면서 일이 되는 듯했지만, 그가 이 작업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한 탓에 출판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1811년 유럽.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 영국 그랜드투어 사업을 망쳤다 민요 편곡이 무슨 의미일까? 톰슨은 세간에 불리는 민요를 채집해 베토벤에게 보내면서 그것을 피아노와 몇몇 악기를 더한 편성으로 반주하도록 써주길 바랐다. 그렇게 해서 받은 곡조에 영국의 유명 시인에게 의뢰한 가사를 새로 붙여 출판하려는 것이 그의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그런 한가한 작업에 만족할 사람인가? 그는 노래를 곱씹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수준 높은 반주로 거듭나게 했다. 곡을 받은 톰슨이 무례하게 좀 쉽고 단순하게 고쳐달라고 하자 베토벤은 그런 일엔 익숙지 않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례금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CD 여섯 장 내느라 세수도 못한 베토벤 그러나 제일 큰 문제는 톰슨이 베토벤에게 악보를 보낼 때 가사는 일절 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몇 차례의 협박에 가까운 요청에 겨우 응했을 뿐이다. 톰슨은 시인에게 가사를 의뢰할 때도 베토벤의 곡을 보내지 않았다. 톰슨의 친구인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1759-1796)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한창 활동 중이던 아일랜드 시인 토머스 무어(1779-1852)나 월터 스콧(1771-1832)도 작업을 맡지 않았다. 결국 톰슨이 쓴 것은 이류 작가들의 가사였다. 톰슨은 이 일을 더욱 확대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외에도, 북유럽과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전 유럽의 민요를 모았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시칠리아 민요 ‘오 가장 거룩하신O Sanctissima’이다. 빙 크로스비에서 파바로티까지 많은 가수가 부른 귀에 익은 성모 찬가이다.
톰슨은 대륙 전역으로 확대된 전쟁 탓에 여행을 못하는 영국인에게 자신의 민요가 좋은 대안이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만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20세기 아일랜드 음악학자이자 바리톤 가수인 토머스 오설리번(Tomás Ó Súilleabháin, 1919-2012)은 최고의 작곡가 베토벤이 공들인 이 편곡이 거의 연주되지 않는 까닭이 바로 음악과 가사가 유기적으로 화합하지 못하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톰슨의 처음 구상처럼 번즈와 무어의 시 가운데 베토벤의 편곡과 어울리는 것을 새로 연결하는 쉽지 않은 작업을 했다. 그는 토머스 무어가 쓴 킬라니 호수의 사이렌 케이트 커니에 대한 시에 아래와 같은 베토벤의 노래를 연결했다.
얼마나 미미하면 유튜브에서 철수했다, 아래 홈페이지 참조
짐작하다시피 에이미가 들은 노래는 아직 오설리반이 가사를 바꾸기 이전이므로 위와 같은 베토벤의 가락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같은 곡조에 톰슨이 붙인 원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오설리번의 값진 노력이 베토벤만큼이나 너무 진지했다고 생각한다. 들어서 가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 같은 외국인에게 그 뜻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곡들이 유명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1) 영국 상류층에 베토벤의 악보는 가정용 반주로 쓰기에 너무 어려워 팔리지 않았을 것이다.
2) 나폴레옹 전쟁 뒤로 영국 사람들은 다시 여행을 떠났을 터이다.
3) 반대로 이탈리아를 최고로 치는 독일 귀족에게 평범한 영어 가사는 별 매력이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이런 듣기 편한 살롱 음악은 사람들이 베토벤에게 바란 것도 아니었다. 베토벤은 멜로디 작곡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중 속에서 자연 발생한 민요는 책상 위에서 쓴 음악이 유행하면 자연히 묻힌다. 그렇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밑바닥에서 묵묵히 작곡된 음악에 영향을 미친다.
에이미가 부르다가 만 베스의 애창곡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는 퀘이커 교도들이 불렀을 법한 노래이다. 근검, 절약,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이 기독교 종파는 영국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와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했다. 퀘이커 교도의 가장 대표적인 찬송가 ‘심플 기프트’와 베스의 찬송가는 많이 닮았다. 이런 노래들이 아일랜드, 바이에른, 폴란드, 시칠리아, 우크라이나에서 건너온 민속 음악과 서로 융합되어 신대륙 자생 음악의 거름이 된 것이다.
퀘이커 교도 가운데 예수재림에 깊이 경도된 셰이커 교단은 이 이름의 유래와도 같이 몸을 떠는 종교적 열반의 상태로 유명하다. 이로부터 애런 코플런드의 <애팔래치아의 봄>과 마사 그레이엄의 춤이 결합한다. 이것은 러시아 내륙으로부터 온 '봄의 제전'이 아닌 미 동부에서 발원한 '프리마베라'인 것이다.
※ 참고자료
1) 얀 카이에르스 지음. 홍은정 옮김. <베토벤>. 2018년. 도서출판 길. 559~568쪽.
2) <베토벤 아일랜드 가곡 재발견> 홈페이지 http://beethovensirishsongs.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