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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02. 2021

필리포 네리와 무녀의 예언

다성음악에서 오라토리오로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내내 시스티나 예배당을 언급할 때마다 흥분하곤 했다. 옆방의 라파엘로 그림들은 미켈란젤로의 걸작만 못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평가는 주관적이라 괴테의 동향 친구는 라파엘로를 더 높이 샀기에 두 사람은 다빈치를 예찬하는 것으로 논쟁을 마무리 짓곤 했다.


시스티나 예배당 성가대는 6세기부터 활동한 세계 최고(最古)의 음악단체이다. 팔레스트리나, 조스캥 데프레, 알레그리와 같은 대표적인 르네상스 음악가가 단원이었다. 성가대원은 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2004년 예배당 복원 과정에서 조스캥 데프레의 낙서(JOSQUINJ)가 발견되었다.


조스캥과 같은 부르고뉴 악파의 다성음악 미사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 매우 낯설 수도 있다. 마치 염불과 비슷하다고 할까? 왜 이런 음악이 생겼고 어떤 원리인가를 알면 이해가 쉽다. 다성 합창곡은 종교적인 가사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짧은 모테트에서 시작해 길이가 긴 미사 제문(祭文)에 사용되어 르네상스 시기에 널리 퍼졌다. 라틴어 미사 제문을 알면 켜켜이 쌓아 올린 건축적인 음향의 얼개가 보이는 것이다. 누구나 알기 쉬운 예가 있다. 만일 구구단을 모두가 아는 음정(C-F-D#) 없이 암송한다면 인공지능처럼 들리지 않을까? 같은 완전 4도 음정을 기계적인 구구단보다 좀 더 서사적이고 훨씬 긴 가사에 붙인 것이 천자문(C-F-G)이다. 만화로 천자문을 익히는 요즘엔 잊혔을지도 모르지만!

구구단과 천자문이 한 곡조를 다른 가사로 부르는 예라면, 다성 미사곡은 같은 가사를 다른 곡조로 부르는 것이다. 이때 ‘플렝샹plainchant’이라는 기본 멜로디로 매 악장을 시작하며 성부를 늘려간다. 만일 미사 제문을 모르고 이런 음악을 듣는다면, 구구단의 이치를 모르는 체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과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훨씬 어렵고 의미도 없어 곧 지루해진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에는 왜 그렇게 했을까? 다성 합창이 고딕 양식의 성당을 시간으로 채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스캥의 미사 가운데 로마에서 쓴 곡이 <바다의 별이신 성모 미사Missa Ave maris stella>이다. 당대에 널리 불리던 선율을 빌려 지은 미사곡 중의 하나이다. 성모를 ‘바다의 별’이라 칭한 이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선원이다. 그들은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을 자신들을 위한 바다의 수호자로 여겼고, 아기를 안은 이시스를 성모 마리아와 동일시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지중해 연안의 가톨릭 도시들은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성모 마리아의 상을 모시고 앞바다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는 의식을 치른다. 뱃길의 안녕을 비는 토속신앙과 결합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바다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시스도 바다와 무관한 ‘곡물의 여신’이었음을 떠올리면 한참 벗어난 일이지만, 조스캥의 미사곡은 앞뒤로 멀리까지 살피게 비추는 인생의 등대와도 같다. 이런 진지한 미사를 지은 사람이 예배당 벽에 자기 이름을 새겼다니 웃음이 나왔다.

바다의 별이신 성모 미사 - 키리에

조스캥은 율리오 2세 교황 즉위(1492년) 3년까지 로마에 체류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작업한 천장화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의 별이신 성모 미사>가 시스틴 예배당에서 불렸을 가능성도 적다. 아마도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리기 전부터 벽면을 채웠던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시뇨렐리, 로셀리 같은 선배 화가의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북쪽 벽에는 그리스도의 행적을, 남쪽 벽에는 모세의 이야기를 나열했다. 그중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보티첼리의 화풍이 가장 낯익다.


성서의 수많은 이야기를 요약한 미켈란젤로는 과연 다빈치가 파라고네에서 강조한 ‘시에 대한 회화의 우위’를 증명했다. 심지어 당대에는 어떤 음악도 미켈란젤로에 응수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천지창조’에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를, 대홍수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칸타타를 떠올리긴 어렵지 않았지만, 그것은 훨씬 후대에 다른 나라 작곡가들이 쓴 미켈란젤로와는 무관한 음악이다. 지금 여기에 상응하는 음악은 좀 다른 각도에서 나온다.

노가리가 그린 네리. 정말이다!

1512년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가 완성되고 3년 뒤에 피렌체의 귀족 집안에서 필리포 네리Filippo Romolo Neri가 태어난다. 수도사들에게 교육받으며 검소하게 자란 네리는 세속의 부를 포기하고 로마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며 빈자를 돌보았다. 1548년에 네리는 로마를 방문하는 가난한 순례자들을 도우려고 ‘거룩하신 삼위일체 형제회’를 설립했다. 1555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이듬해 작은 기도 모임인 오라토리오회Congregazione dell’Oratorio를 이끌기 시작했다. 네리보다 열 살 어린 팔레스트리나가 모임을 위해 음악을 썼다. 여기서 평신도의 신앙을 고취하는 설교와 복음을 노래한 것이 바로크 오라토리오의 시작이다. 오라토리오가 성서의 이야기를 짧은 극으로 만드는 데까지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San Filippo Neri, Pt. 1: Introduzione. Allegro - Adagio e Staccato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두 장르의 꽃을 활짝 피운 사람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였다. 1705년에 피에트로 오토보니 추기경의 대본에 붙인 스카를라티의 오라토리오 <산 필리포 네리>는 장르의 창시자를 기리는 독보적인 음악이다. 추기경은 ‘희망’, ‘믿음’, ‘자선’이라는 세 덕목을 의인화해 네리와 대화하게 한다. 원래 인도로 선교를 떠날 예정이던 네리는 믿음과 자선의 설득으로 로마에 남아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이어서 자선은 네리에게 고난의 십자가를 보여주며 힘과 희망을 북돋는다.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한가운데에 성인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네리의 이름 필리포가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스페인 왕위를 요구하는 필리프와 같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지지하는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교황 클레멘트 9세(역시 이름의 뜻인 ‘관용’으로 의인화된다)가 옥좌에 앉아 선정을 펼치는 장면은 완전히 노골적이다. 전쟁을 독려하는 마지막 아리아에 가면 ‘자선’이 의무를 망각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시스티나 예배당의 수많은 성인이 장차 음악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네리에서 비롯되어 스카를라티가 꽃피우고 헨델이 열매를 맺을 오리토리오로 말이다.

San Filippo Neri, Pt. 2: Aria "Guerra, guerra il mondo irato" (Carità)

미켈란젤로가 그린 구약의 중심 소재를 다시 열두 예언자가 감싼다. 요나, 예레미아, 다니엘, 이사야, 즈카르야, 에제키엘, 요엘과 같은 유명한 예언자들 외에 페르시아, 에리트리아, 델피, 쿠마에, 리비아의 다섯 무녀Sibyl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다. 

컬러로 된 인물들이다

르네상스 최후의 대가 오를란도 디 라소(나라에 따라 롤랑 드 라수스, 오를란드 데 라수스로 쓰기도 한다)는 벨기에 지방에서 태어나 일찍이 이탈리아로 건너왔다. 만토바, 시칠리아, 밀라노, 나폴리를 거쳐 로마에 온 그는 불과 21세의 나이에 산 조반니 라테라노 바실리카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이 교회는 교황이 기거하는 곳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바티칸의 성 베드로 사원보다 위상이 높다. 다시 말해 청년이 교황의 음악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라소는 와병 중인 부모의 간호를 위해 1년 만에 사임하고 이탈리아를 떠난다. 그의 자리는 팔레스트리나가 이어받았다.


뒷날 돌아오기까지 라소의 짧은 이탈리아 체류를 종합한 작품이 <무녀의 예언Prophetiae Sibyllarum>이다. 프롤로그와 열두 개의 모테트 가사는 모두 라틴어이다. 음악은 극도의 반음계 화성과 변화무쌍한 변조로 불가사의한 느낌을 준다. 라소는 석 줄의 프롤로그에 그 의미를 직접 밝혔다.     

다성음악의 노래를 반음계 선율로 들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열두 무녀가 예전에 부른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입으로 구원의 비밀을 노래했습니다.
프롤로그 - 리비아, 에리트리아, 델피의 무녀를 표지로 한 다니엘 로이스의 음반

열두 무녀의 노래가 각 여섯 줄로 이어지는 데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볼드체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무녀이다.)


1. 페르시아의 무녀는 동정녀에게서 구세주가 태어나리라 예언한다. 그는 굽은 나귀 등에 탈 것이며 많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2. 리비아의 무녀는 불멸의 구세주가 죄를 사하러 오리라 예언한다. 그는 하늘의 여왕 무릎에 누워 영생할 것이다.

3. 델피의 무녀는 그분이 머지않아 오실 것이니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리라 예언한다. 동정녀의 태중에서 나실 것이니 이는 자연의 기적이나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이 하신 일이다.

4. 크림의 무녀는 거룩한 동정녀께서 영원한 군대의 임금께 젖을 먹일 것이며, 동방의 별을 따라온 박사들이 유향과 몰약과 황금을 바치리라 예언한다.

5. 사모스의 무녀는 유대의 예언이 곧 실현되리니, 어두운 밤이 가고 인간이 왕을 만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늘이 허락하고 별이 보여줄 것이다.

6. 쿠마에의 무녀는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분은 우리 육신을 입고 겸손하게 즐거워하며, 어머니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택하리라 예언한다.

라수스는 그림뿐만 아니라 나폴리에서 직접 쿠마에 무녀의 유적을 보았다. 그녀는 엘리엇에게 죽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7. 헬레스폰토스의 무녀는 후덕한 처녀를 본다. 그녀가 낳은 눈부신 자손은 공정하고 진실하고 평화롭게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8. 프리기아의 무녀는 하느님께서 어리석은 인간을 벌하려 하심을 본다. 처녀의 몸에 당신의 자손을 보내고 천사가 알릴 것이며, 단명할 그가 비참한 인류를 정화할 것이다.

9. 에우로파의 무녀는 처녀의 몸에서 영원하고 깨끗한 말씀이 나오리니, 올림푸스의 별이 빛나는 골짜기로부터 가엾은 인간이 태어나리라 예언한다. 그는 조용히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그는 인간과 신의 씨로 태어날 것이다.

10. 티부르티나의 무녀가 말하노니 진실의 샘인 하느님께서 예언의 선물을 주셨다. 나사렛의 처녀가 하느님인 분을 낳아 베들레헴으로 가리니 모든 어미 가운데 가장 복된 이가 품에서 거룩한 분을 먹이리라.

11. 에리트리아의 무녀는 높은 데에서 올 하느님의 자손을 확신한다. 때가 되면 유대의 아름다운 여인에게 태어나 처음에는 고초를 겪을 것이나 이내 위대한 예언자가 되어 지혜와 진실로 충만하리라.

12. 아그리파의 무녀는 위대한 분이 육신을 얻을 것이니 동정녀가 성령으로 잉태하리라 예언한다. 많은 이들이 멸시하더라도 그분은 사랑의 구원으로 죄를 사할 것이다. 명예가 계속되고 영광이 굳건할 것이다.

호세아와 델피의 무녀를 나란히 그린 핀투리키오

미켈란젤로가 예언자와 무녀를 그리기에 앞서 핀투리키오가 보르지아 아파트를 같은 인물들로 장식했다. 라소는 두 대가의 그림을 모두 보았고, 그것을 음악으로 썼다. ‘프롤로그’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프랑스 왕 샤를 9세는 라소를 궁정 음악가로 부르기 위해 큰 연봉을 제안했다. 실제 온음계로 작곡된 ‘프롤로그’는 나머지 노래의 분위기를 암시하듯 신비롭다. 이교도에 여성인 무녀들의 존재를 표현하는 대담한 음악이야말로 미켈란젤로의 새 시대 그림에 상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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