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호수의 어부이던 베드로는 그리스도 이후 초대 교황이 된다. 수난 전날 밤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는 밧세바를 취한 다윗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잡혀간 ‘유대의 왕’을 추종하던 무리라고 지목받자 사람 잘못 보았다고 손사래를 친 것이다. 그리스도가 미리 예견한 대로 첫닭이 울기 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바로 그 부끄러움 때문에 그는 가장 중요한 사도가 되었다. 이 기막힌 사연을 음악으로 만든 사람도 오를란도 디 라소이다.
헤레베헤의 실황을 올려준 유튜버에 감사
라소는 르네상스를 결산하는 최고의 걸작 <성 베드로의 눈물Lagrime di San Pietro>을 쓰고 2주 뒤에 세상을 떠났다. 루이지 탄실로의 연작시 스무 편에 라틴어 모테트 하나를 더해 모두 스물한 곡으로 쓴 작품이다. 20세기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성 베드로의 눈물>을 바흐의 <음악의 헌정>이나 <푸가의 기법>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창작 인생을 돌아보는 ‘백조의 노래’라는 의미이다. 나는 바흐의 작품들이 바로크를 결산했던 것처럼 라소의 <성 베드로의 눈물>도 르네상스를 마감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페트라르카의 영향을 받은 탄실로는 자유분방하고 음란한 시를 썼다가 교황의 경고를 받았다. 이를 만회하려고 쓴 시가 『성 베드로의 눈물』(1560)이다. 탄실로가 가져온 반향은 작지 않았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드 말레르브는 1587년에 같은 제목의 불어 시(Larmes de Saint Pierre)를 썼다. 그리스 태생의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도 1587년부터 1596년까지 몇 개의 연작으로 베드로의 속죄를 그렸다. 세르반테스도 『돈키호테』 1권(1605) 33장 ‘무모한 호기심에 대하여’에서 탄실로의 시를 인용했다. 아내의 정조를 시험하려는 이에게 친구가 후회할 짓 말라며 탄실로의 베드로를 예로 들었을 만큼 그 영향은 널리 퍼졌다.
음악가로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던 오를란도 디 라소
그 가운데 최고는 물론 라소이다. 라소는 1594년 탄실로의 마흔두 편 시 가운데 전반부에서 스무 개를 고른 뒤 여기에 13세기 프랑스 수사 필리프 드 그레브의 라틴어 시를 더해 모두 스물한 편의 마드리갈로 썼다. 만듦새는 성 베드로 사원에 비할 만큼 정교하고 감동적이다. 라소는 ‘일곱’이라는 수에 집중했다. 일곱 성부가 부르는 이 곡은 여덟 개 교회 선법 가운데 일곱 개를 차례로 사용한다. 삼위일체의 수를 일곱 번 곱하면 스물한 개 전곡이 된다. 죄의 일곱 근원인 ‘칠죄종septem peccata capitalia’과 일곱 개의 참회 시편, 성모의 가슴을 찌른 일곱 슬픔 따위와도 상응한다. 베드로는 형제가 지은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며 일곱 번이면 되느냐고 그리스도에게 묻는다. 스승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고 답한다.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조르주 드 라 투르가 그린 <베드로의 참회>
탄실로가 포착한 베드로의 심리는 오늘날의 어떤 영화 대본 못지않게 현대적이다. 그는 노년의 베드로를 완전히 해부한다. 고기 잡는 일을 하다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 용서의 질문, 기도드리는 스승을 기다리다 잠든 일, 배신하지 않겠다는 호기로운 장담 등, 앞서 한 모든 일이 수탉이 울기 전 세 번 그리스도를 부인하려고 준비되었던 것처럼 만든다. 결국,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슬픈 그리스도의 눈앞에 무너진다.
조르주 드 라 투르가 그린 <베드로의 눈물>, 꼬끼오
수천 개의 창도 막아서리라던 베드로에게 스승의 시선이 바로 그 수천 개 창과 같았다. 그는 여생을 눈물로 보냈다. 시인은 한마디 말없이 눈빛만으로 연인을 어루만질 수 있는 노련한 사랑꾼을 예로 든다. 스승의 눈빛이 혀라면 베드로의 눈은 귀이니, 그 눈빛은 어떤 십자가보다 모질게 베드로의 가슴에 꽂혔다. 인간이 직관으로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하물며 하늘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크겠는가! 눈송이가 얼어붙어 겨우내 골짜기에 머물다가 봄이 되어 물이 되어 흘러내리듯이 베드로의 마음에 얼음처럼 깃들였던 두려움은 그리스도의 눈빛으로 녹아 눈물로 쏟아졌다. 그 눈물은 건조한 계절이라고 마르지 않고, 닭이 울 때마다 새롭게 흘러내렸다. 베드로는 칠흑 같은 어둠을 떠돌며 울다가 저주받은 삶을 마치려 든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관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소와 경쟁하는 슈베르트의 얼어붙은 눈물
라소의 음악 또한 이후 펼쳐질 서양음악의 모든 면모를 함축한다. 그의 깊이와 너비는 19세기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악에 필적하며, 켜켜이 쌓은 화성은 20세기의 올리비에 메시앙이나 죄르지 리게티가 쓸 음향과 같다. 침묵과 절규 그리고 어둠과 빛의 소리는 아르보 페르트나 기야 칸첼리와 같은 생존 작곡가들이 배울 것이다. 이탈리아어 마드리갈 스무 개가 끝나면 마지막 라틴어 모테트가 나온다. 여기에 쓴 ‘방황하는 음Tonus peregrinus’이라 부르는 음계는 바흐가 <마니피카트> 가운데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Suscepit Israel puerum suum’에, 모차르트가 <레퀴엠> 가운데 ‘입당송’에도 사용한다. 라소는 베드로의 수고를 위로하며 그만 울라 다독이는 듯이 전곡을 마무리한다.
보라, 사람아, 내가 너희를 위해 겪은 일을 너희에게 부르짖노니, 내가 너희를 위해 죽는다 내가 겪은 고통을 보라 나를 찌른 못을 보라 내가 겪은 것보다 괴로운 고통은 없다 외면의 고통이 크더라도 내면의 고통이 더 크더라 너희가 고마운 줄 모르니
피터 셀라스가 LA 마스터스 코랄과 공연한 <베드로의 눈물> 가운데 마지막 곡 '보라 사람아, 비데 호모'
라소가 탄실로의 베드로를 성인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그는 생애 후반을 봉직했던 뮌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그는 불어나 독일어로 된 많은 노래를 썼다. 세속음악과 종교음악 모두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음악이다. 그 스스로 마드리갈 4권에서 이렇게 말했다. “멀리 떨어진 독일에서도 좋은 이탈리아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유럽 전역의 피가 들어와 산소를 머금고 다시 뿜어져 나가는 심장이었다.
라소의 뒤를 이은 바흐의 '토누스 페레그리누스'. 댓글처럼 하늘의 소리처럼 들린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 파스칼 키냐르는 『음악 혐오』의 첫 100페이지를 ‘베드로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장으로 썼다. 그러나 그는 탄실로나 라소를 언급하지 않았다. 키냐르가 두 사람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탄실로나 라소를 얘기하는 순간 나처럼 그들에게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았다. 키냐르는 베드로의 만년을 묘사하는 것으로 첫 장을 마무리한다. 베드로는 창문에 휘장을 치고, 소리를 막았다. 양털로 만든 마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수탉의 울음이 들릴까 봐서이다. 바티칸 성 베드로 사원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누구나 후회의 짐짝에 눌릴 각오를 해야 한다.
위 공연을 연출한 피터 셀라스. 해설에 오류가 좀 있어서인지 댓글을 받지 않는다. 본인이 만든 한글 자막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