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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13. 2021

원하면 들려드릴게!

조스캥 데프레의 판제 링구아 미사

1498년 46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밀라노 스포르차성에서 토론을 벌였다. 회화와 시, 조각 등 여러 예술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위대한가를 놓고 벌인 이 토론은 정례화되었고, 이탈리아 말로 비교를 뜻하는 ‘파라고네paragone’라고 불렸다. 다빈치는 시나 조각보다 회화가 월등한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매력적인 여인을 예찬하는 시와 그녀를 그린 그림 가운데, 그녀를 사랑하는 비평가가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며 시를 내려다본다. 또한 그림은 빛과 그림자, 색채를 모두 이해해야 하지만 조각은 그럴 필요가 없기에 조각가를 하수로 본다. 게다가 조각가는 대리석 가루를 뒤집어쓴 지저분한 모습이지만 화가는 단정하고 말쑥한 창작을 하기에 신사에게 적합하다고 보았다. 다빈치로부터 촉발된 파라고네는 르네상스 시대 해당 예술가 사이에 꾸준한 논란을 가져왔다. 실제로 회화와 조각 모두 대가였던 미켈란젤로는 어느 쪽에 우위를 두지 않았지만, 그의 후배인 벤베누토 첼리니는 조각가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고, 첼리니의 맞수 바사리는 화가를 더 중시했다.

이 분은 그림을 그려도 공사판 십장 행색이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흰 소매를 치렁거리며 그림을 그린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음악에 대한 다빈치의 생각이다. 그는 소리는 생기자마자 사라지기 때문에 회화보다 유용하지 않다고 보았다. 과연 당대에는 누구라도 원하는 음악을 들으려면 큰 노력을 해야 했다. 교황이 잠들지 않는 심야마다 성가대를 불러올 수 있었을까? 발코니의 구애자가 제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매번 자신을 도울 악사를 동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은 필부라도 원하는 음악을 찾아 듣고 공유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이 복제인지 아닌지는 나중 문제이다.

제 아무리 교황이라도 죽을 때나 되어야 침실에 성가대가 들어온다

오늘날 유럽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상당수가 19세기 초 시민사회의 성숙과 더불어 탄생했다. 왕실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예술작품을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 대략 그 무렵이었다. 바티칸 궁전의 많은 미술품은 나폴레옹이 파리로 옮겼다가 그가 몰락한 뒤 빈 조약에 따라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수장품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1932년 새로운 건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나폴레옹 결혼식장을 장식했던 라파엘로의 <변용>

바티칸 회화관은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성화를 방마다 나눠 전시한다. 멜로초의 그림을 뒤로 한두 방을 지나니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안내된다. 각기 아기 예수를 안은 모습과 대관식을 갖는 장면의 성모 마리아, 그 사이로 승천하는 듯한 그리스도의 그림이 예사롭지 않은 빛을 뿜어낸다. 공중부양이지만 아직 승천하는 예수는 아니다. 두려워하는 바닥의 세 사람과 예수 옆의 두 노인으로 비춰볼 때 이 그림은 타보르산에서 그리스도가 변용(變容)하는 장면이다. 두 노인은 구약에 나오는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이다. 그리스도를 똑바로 못 보는 바닥의 세 사람은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다. 이들은 산에서 기도하고 올 동안 깨어 있으라고 한 스승의 말을 따르지 못하고 잠든 것이 부끄럽고, 기도 뒤 그리스도의 봄에서 광채가 나는 것에 놀라 바닥에 붙어 있다. 하단은 군상 가운데 한 아이에 시선이 모인다. 간질에 걸렸다가 그리스도의 변용을 보고 치유된 어린 환자와 그 가족, 나머지 제자들이다. 서로 떨어진 에피소드를 이어 붙인 것이다. <변용>은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이다. 

여덟 살 차이인데, 라파엘로 아버지라고 해도 믿겠다

다빈치가 멜로초보다 열네 살 어리고, 미켈란젤로는 다빈치보다 스물세 살 아래이다. 라파엘로가 다시 미켈란젤로보다 여덟 살 적은데, 다빈치가 죽은 이듬해 37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선후배를 차례로 보냈을 때 마흔다섯의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와 <다윗>, <천지창조>는 완성했지만, 아직 <최후의 심판>이나 <모세>와 같은 작품은 완성하지 못했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이 르네상스 3대 거장의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는 모두 지금의 벨기에 네덜란드 태생인 하인리히 이사크(1450-1517)와 조스캥 데프레(1450/55-1521)이다. 둘 다 다빈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로마에서 중요한 시기를 보냈고 죽은 시기도 다빈치, 라파엘로와 비슷하다. 라파엘로가 <변용>을 그리며 마지막 창작혼을 불태울 때 이사크도 최후의 모테트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을 썼다. 아헨에서 열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대관식을 위한 곡이야말로 <변용>과 그것을 그린 라파엘로를 예찬할 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 이것이 바로 같은 시대의 음악이다

라파엘로의 그림을 지나 바로 옆방으로 가면 미켈란젤로 카라바조(1557-1610)를 만난다. 그는 부오나로티 태생의 선배에게 이름만으로 불리는 영광을 내어준 탓에 성(姓)으로 불린다. 미켈란젤로가 마지막 작품 <론다 니니의 피에타>에 매진하던 무렵에 태어난 카라바조는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함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한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한 편의 연극처럼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화면을 뚫고 나올 듯이 생동감 넘친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뚫고 나온 분들

먼저 십자가 위에서 절명한 그리스도의 주검을 내리는 그림이다. 두 사람의 마리아가 망연자실한 가운데 요한과 니고데모가 시신을 안아 반듯한 돌판 위에 내린다. 특히 그리스도의 다리를 든 니고데모의 시선은 그림 밖을 향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뒷날 많은 화가에게 영감을 준 이 그림은 입관이나 매장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몸이 갖는 의미, 곧 성체(聖體)에 주목하게 한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는 메시지가 이보다 강렬할 수 있을까! 다빈치가 보았다면 파라고네에 참석한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성체 성사에 대한 시와 이 그림 가운데 어느 쪽이 신앙심을 더 깊게 하겠는가?” 그러나 다빈치가 조스캥 데프레의 <판제 링구아 미사Missa Pange lingua>를 원할 때마다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의 우열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몫이 다르다고 느꼈으리라.

이 위대한 음악이 <주피터 교향곡>의 4악장 푸가가 될 것이다

<판제 링구아 미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다름 아닌 성체 축일을 위해 쓴 가사 ‘입을 열어 구세주의 영광을 찬미하세’에 붙인 곡이다. 조스캥은 이 곡을 생애 만년에 썼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의 일이다. 탈리스 스콜라스 중창단과 함께 평생 조스캥의 음악을 연구한 지휘자 피터 필립스는 그의 미사곡들을 베토벤의 아홉 개 교향곡과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매번 다른 형식미를 탐구하고, 매 곡이 지적이고 기술적인 절품이며, 모두 작곡가의 각기 다른 개성을 담았기 때문이다.”

필립스의 말대로라면 <판제 링구아>를 베토벤의 교향곡 9번에 비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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