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성모 마리아 찬양은 야코포네 다 토디(1230-1306, 토디는 지명이고 본명은 야코포 데이 베네데티이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움브리아의 유복한 집안에서 난 야코포네는 볼로냐에서 법률을 전공해 이재(理財)에 밝았다. 그는 반나라는 이름의 정숙하고 신앙심 깊은 여인과 결혼했다. 어느 날 신혼부부는 마상시합을 구경하러 갔는데 관중석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만 아내가 숨지고 말았다. 야코포네는 죽은 아내가 남편의 탐욕을 대속하기 위해 거친 털옷을 입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속세를 떠나 프란치스코회 수사가 되었다. 야코포네는 기행을 일삼았는데, 등에 안장을 얹고 네발로 기어 다니거나, 온몸에 역청을 바른 뒤 깃털을 뒤집어쓰고 결혼식에 나타나기도 했다.
토디의 포폴로 광장과 두오모 성당
이 영화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군인 교황 율리오 2세, 본명은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십장 미켈란젤로, 본명은 찰턴 헤스턴
당시 야코포네가 소속되었던 프란치스코회는 규율을 엄격히 고수하려는 쪽과 완화하려는 쪽으로 양분되었다. 야코포네는 당연히 보수적인 쪽이었다. 마침 같은 수사 출신의 첼레스티노 5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자 야코포네는 대표단을 이끌고 교황을 알현했다. 독립적으로 규율을 지켜가도록 수도회를 분리해달라는 야코포네의 청원은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정세에 둔감한 교황은 곧 한계를 느끼고 다섯 달 만에 스스로 물러난다. 뒤를 이은 보니파시오 8세는 야심이 컸고, 반대 세력을 차단하려고 전임 교황을 성에 유폐했다. 이탈리아는 양분되었고, 유력한 콜론나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코포네는 청원이 취소되자 새 교황에 반대하는 세력에 힘을 보탰지만 교황에 패해 파문당했다. 교황은 콜론나 집안의 근거지인 팔레스트리나를 초토화했다. 백성들은 죄 없이 터전을 잃었다. 단테는 「지옥편」 19장에서 시뻘건 불길에 싸여 몸부림치는 보니파시오 8세를 꾸짖는다. 단테도 교황의 반대파였기에 고초를 겪은 것이다.
단테가 된 살리에리. 본명은 머리 에이브러햄, 근데 시리아계이다.
속세에서 빛을 발한 야코포네의 이재는 수도사가 된 뒤 문재(文才)로 바뀌었다. 그는 많은 종교시를 썼는데, 그 가운데 『찬미가Laude』가 대표적이다. 특히 사도 요한과 예수, 성모 마리아가 대화를 나누는 「천국의 여인Donna de Paradiso」은 앞서 본 단테의 『신곡』 마지막 부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야코포네나 단테는 숭고하고 복된 삶을 향해 가식 없이 매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기행을 일삼았던 야코포네이니만큼 그의 시도 풍자적이었기에 익명의 많은 시가 그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기에 『슬픔의 성모Stabat Mater』라는 작자 불명의 유명한 가사도 야코포네를 유력한 원작자로 보는 것이다. 그가 쓴 것이 맞는다면 1300년 전후에 가사가 나왔을 『슬픔의 성모』는 조스캥, 팔레스트리나, 라소와 같은 르네상스의 거장을 거쳐 비발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안토니오 칼다라, 페르골레시에 이르는 바로크 작곡가의 명곡으로 거듭났다. 19세기에는 로시니와 베르디가 언어를 초월한 음악을 만드는 순례에 동참했다. 미켈란젤로는 불과 스물네 살 때인 1499년에 <피에타>를 완성했다. 그가 조각을 시작할 무렵 로마를 떠나 밀라노로 간 조스캥은 아니더라도 위에 언급한 나머지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모두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에 불어넣은 성모의 탄식을 들었고 자기 나름의 음악으로 옮겼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물론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였다.
그리스도의 따님이신 성모. 미켈란젤로가 치기에 자필 서명하고 후회한 유일한 조각이다
페르골레시는 이탈리아 동쪽 예시에서 태어나 반대편 나폴리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최후의 작품 <스타바트 마테르>를 쓰기 직전 로마에 머물렀다. 페르골레시는 로마의 첫 대중 극장인 테아트로 토르디노나로부터 1735년 사육제 기간에 연주할 오페라 <올림피아데>를 주문받았다. 나폴리 젊은 작곡가의 명성이 로마까지 들린 것이다. 그러나 빈의 대본작가 메타스타시오는 초연에 와달라는 요청에 시큰둥했고, 극장은 페르골레시가 요청한 합창단도 제외했다. 젊은 작곡가는 평범한 성악진의 요구도 일일이 들어줬지만, 로마 유력 인사의 사망을 애도하느라 극장이 문을 닫는 우여곡절 끝에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그나마 몇 번의 공연 중 관객은 페르골레시의 머리에 오렌지를 던지기도 했다. 로마의 실패와 달리 페르골레시의 <올림피아데>는 사후 큰 인기를 얻었다. 같은 대본에 곡을 붙인 후배 작곡가, 욤멜리, 치마로사, 케루비니 등은 페르골레시를 모범으로 여겼다. 페르골레시가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았다면 슬퍼하는 성모의 모습에 비추어 자신의 처지를 서글퍼했을 것이다.
<올림피아데> 초연 당시 그린 만화에서 보듯 작곡가는 소아마비를 앓았다
나폴리는 페르골레시의 재능을 모르지 않았다. 성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 수도회인 ‘성모의 슬픔 기사들’은 10년 넘게 연주해온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대신할 곡을 페르골레시에게 위촉했다(스카를라티는 총 세 편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썼다). 시대를 풍미한 75세 대가의 그릇이 새 시대정신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26세의 페르골레시가 스카를라티를 대신했지만, 그것이 그만 최후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페르골레시는 나폴리 인근, 쿠마에 무녀의 사원이 있는 포추올리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21:31 "Fac ut ardeat cor meum"
오늘날 연주 빈도로 스카를라티는 페르골레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곡을 함께 담은 리날도 알레산드리니의 음반을 들으면 스카를라티가 없이 페르골레시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화성의 아우라로 채워온 교회음악도 페르골레시 시대에 이르면 뚜렷한 멜로디가 주도하게 된다. 스카를라티가 평생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통해 완성한 극적인 양식을 보수적인 교회음악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소프라노와 알토 2중창이 성모의 슬픔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스카를라티가 성모의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애써 모호한 화성에 담았다면 페르골레시는 단순 명료한 선율로 표현했다. 스카를라티가 기악과 성악에 각자의 임무를 부여하고 기악이 만든 그림에 성악이 가사를 얹는 방식을 고수했다면, 페르골레시는 기악과 성악이 시종일관 한배를 타고 슬픔이라는 목표를 행해 질주한다. 야코포네, 아니 누가 지은 것이라도 그 가사를 뛰어넘은 것이다. 나아가 페르골레시의 두오는 마치 성과 속의 대립처럼 강렬하여, 이 곡이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와 쌍둥이인 것처럼 들린다. 뒷날 파이시엘로가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에 관악을 더해 편곡하면서 2중창을 혼성 4중창으로 늘렸을 정도로 극적이다.
2020 체코 오스트라바 성 바츨라프 음악제 실황.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스타바트 마테르> 전곡
스카를라티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그나마 페르골레시를 타고 조금씩 더 알려지는 형편이지만, 안토니오 칼다라의 <스타바트 마테르>에 대한 관심은 부당하게 그만 못하다. 스카를라티가 로마와 나폴리에서 활동했다면 열 살 어린 칼다라는 베네치아와 빈이 임지였다. 로마에 얼마간 머물 동안 그는 루스폴리 대공의 음악감독이었다. 빈으로 간 뒤에도 꾸준히 로마와 연을 이어 오페라와 종교음악을 보냈다. 페르골레시보다 10여 년 앞서 1725년 무렵에 쓴 <스타바트 마테르>는 베네치아 작곡가답게 합창과 트럼펫이 가세한 웅장한 곡이다. 테너 독창 ‘당신과 함께 그분의 고통을 나누게 하소서Tui nati vulnerati’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 ‘놀라운 나팔소리Tuba mirum’를 내다보게 한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그림 협찬
“내 영혼이 천국에서 당신과 머물게 하소서”라는 마지막 푸가의 합창은 이미 바로크의 옷을 벗어버린 것처럼 들린다. 비로소 <스타바트 마테르>의 음악가들이 야코포네 페리나 <피에타>의 조각가와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 치명적인 음악가들이 칼다라의 <돌로로사 미사>와 아들 스카를라티의 <스타바트 마테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