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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17. 2021

악마는 팔레스트리나에 있다

원조 파우스트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팔레스트리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사원은 팔레스트리나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조반니 피에를루이지는 팔레스트리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래서 팔레스트리나는 지명보다는 인명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로마에서 35킬로미터쯤 떨어진 이 작은 고도는 원래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의 제단이 있던 곳이다. 여러 포르투나 가운데 프리미제니아, 곧 첫아기의 운명을 관장하는 여신을 모셨기에 고대인은 아기를 낳으면 이곳에 와서 축복을 빌었다. 기독교가 공인된 뒤로는 이교도의 유적으로 남았으나, 그나마 앞서 보았듯이 13세기 말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도시를 지배하던 콜론나 집안이 전임 교황과 현 교황을 두고 둘로 갈라진 끝에 현 교황이 승리하자 애꿎게 앙갚음을 당한 것이다. 교황의 점령군은 땅을 불사르고 소금을 뿌렸다. 수난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15세기에도 파괴와 약탈이 이어졌다.

콜론나 바르베리니 궁전에서 내려다본 팔레스트리나 전경

조반니 피에를루이지는 1525년에 이 도시에서 나폴리 출신 부모 슬하에 태어났다. 열 살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이듬해 로마에 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성가대에 이름을 올리고 교육을 받았다. 20대 초까지 고향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던 그는 1551년, 이전에 팔레스트리나의 주교였던 교황 율리오 3세의 부름을 받고 성 베드로 사원의 줄리아 성가대를 책임지게 되었다. 1554년 팔레스트리나는 자신의 첫 번째 미사집을 교황에게 헌정했고 이듬해 시스티나 예배당 성가대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율리오 3세가 곧 선종하고 뒤따르는 마르첼로 2세도 3주를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나자, 전임보다 훨씬 완고한 바오로 4세 교황이 즉위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성화의 나체에 나뭇잎을 덧칠하라고 명했을 만큼 보수적이었다. 교황은 기혼인 팔레스트리나가 규칙을 어기고 성가대를 지휘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1555년 해임된 팔레스트리나는 대신 라테라노 대성당을 맡았다. 친구 라소가 부모의 병을 살피러 가려고 1년 만에 사임한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라테라노는 성가대 지원이 열악했고, 음악을 놓고 타협하지 못한 팔레스트리나는 단원이던 아들 로돌포를 데리고 1560년 사임했다.

성모설지전이라 부르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바실리카

1561년 팔레스트리나는 자신의 음악적 고향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5년을 보냈고, 1571년까지는 로마 인근 티볼리의 이폴리토 데스테 추기경 궁전에서 봉사했다. 이 무렵 황제의 음악가로 오라는 제안도 조건이 맞지 않아 거절했을 만큼 팔레스트리나의 위상은 높았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1564년 이후로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는 팔레스트리나가 아니었을까!

율리오 3세에게 미사를 헌정하는 팔레스트리나

1566년에 즉위한 비오 5세는 금욕적인 전임 교황들과 달리 팔레스트리나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1571년에는 줄리아 성가대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성 베드로 대사원의 음악을 책임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집안에서 고난이 밀려왔다. 1572년과 1575년 전염병으로 두 아들을 잃었고, 1578년에는 그 자신도 중병을 앓았다. 1580년 아내까지 사망하자 성직자가 되려고 절차를 밟던 팔레스트리나는 극적으로 부유한 모피 상인의 미망인 비르지니아와 재혼했다. 말 그대로 말년에 인생이 폈다. 그는 빠듯한 생활고에서 벗어나 교회 직무 이외에 영예로운 위촉도 선별적으로 맡았다. 가령 펠리그리니 성 삼위일체 교회를 위한 사순절과 수난의 음악을 작곡한 것이 그 예이다. 팔레스트리나는 생전에 이미 오늘날까지 그가 누리는 독보적인 위치에 도달했던 작곡가이다. 그 내력으로 더 들어가 보자.

갑론을박하는 트렌토 공의회

팔레스트리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은 종교개혁이었다. 루터나 칼뱅으로 대표되는 신교의 전파자들은 교황과 황제의 대립 구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가톨릭 교회는 내부 개혁을 위해 북이탈리아 트렌토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18년 동안 총 세 시기에 걸쳐 스물다섯 차례 회의를 열어 교회의 모든 사항을 점검했다. 성경의 목록과 교리의 해석, 교회법과 예배의 정비 등 신앙생활의 모든 분야를 통제해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자리였다. 

팔레스트리나 시대라면 파문당했을지도 모를 한스 큉 교수

개혁주의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1928-2021)은 사실상 트렌토 공의회를 반종교개혁의 옷을 걸친 중세 정신이라고 얘기한다. 잇따르는 종교 갈등으로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 참살과 다음 세기 독일의 30년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큉에 따르면 트리엔트 공의회는 오히려 교회가 분쟁을 해결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음을 장황하게 증명한 셈이다. 신앙을 저버려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시대에 교회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그만큼 세속 문화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마르첼로 2세. 자기 세례명을 그대로 쓴 마지막 교황인 줄 알았는데, 500년 만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다시 나옴

팔레스트리나 시대 교황은 대부분 추기경 시절 트렌토 공의회를 주도한 사람들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는 1555년 단 21일 재임했던 마르첼로 2세였다. 마르첼로는 추기경 시절부터 문화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바티칸 도서관 감독관을 지내는 동안 직접 도서를 비치하고 목록을 정리할 정도로 학식이 높았고 열정이 있었다. 함께 트렌토 공의회 의장을 맡았던 교황 율리오 3세가 5년 만에 선종하자 마르첼로가 추대되었지만, 평소 병약했던 그는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교황 마르첼로 미사 - 키리에

그러나 이 짧은 기간 팔레스트리나가 교황에게 걸었던 기대와 존경심이 얼마나 컸는지 <교황 마르첼로 미사>가 증명한다. 이 미사는 1562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팔레스트리나가 교황 재임 중에 곡을 썼는지 또는 뒤에 그를 추모해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의 필사본과 그 무렵 트렌토 공의회에서 교회음악에 대해 논의한 내용으로 미루어 출판 무렵 작곡한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교황 마르첼로 미사 - 글로리아

1562년부터 이듬해까지 열린 마지막 트렌토 공의회의 논의는 오늘날 시각으로도 흥미진진하다. 요약하면 세속적인 멜로디를 미사곡에 사용하는 것이 경건함을 해치는지와 반대로 종교적인 가사를 속된 노래에 사용하는 것이 신성모독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냐의 논쟁이었다. 나아가 복잡한 다성음악이 전례 가사의 의미를 흐리지 않도록 미사에서 음악을 아예 금지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결론은 팔레스트리나의 <교황 마르첼로 미사>와 같은 음악은 교회 일부의 우려처럼 가사 전달을 해치지 않으며, 그것을 금지하기에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의회의 처분과 무관하게 복잡한 다성음악은 훨씬 간결한 호모포니의 조류를 피할 수 없었다. 팔레스트리나 그리고 그와 함께 르네상스 음악의 정점에 올랐던 라소가 1594년 한 해에 세상을 떠나고 다음 세기는 바로크의 도래를 볼 것이었다.

교황 마르첼로 미사 - 크레도

그렇지만 1607년 후배 음악가 아고스티노 아가차리가 팔레스트리나를 ‘교회음악의 구세주’로 치켜세운 이래 그런 낭만적 기사문학과 같은 신화는 더욱 굳어졌다. 요한 요제프 푹스(1660-1741)는 이탈리아에서 빈으로 이식된 음악 문화의 정수를 대변했다. 1725년에 그가 쓴 작곡 교본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은 다음 세기까지 무릇 작곡을 하려는 사람의 필수 교과서였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모두 이 책으로 배웠고 멀리 드뷔시도 그것을 풍자했다. 푹스는 알로이지우스라는 이름의 스승과 요제푸스라는 제자의 문답으로 이 책을 쓰면서, 서문에 제자는 푹스 자신이며 스승은 다름 아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빚졌으며 그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잃지 않을 팔레스트리나라고 밝혔다. 그 첫대목을 보자.    

교황 마르첼로 미사 - 상투스
요제푸스 – 존경하는 스승님, 음악의 규범과 원칙을 배우려고 왔습니다.

알로이지우스 – 작곡 기법을 배우고 싶다는 말인가?

요제푸스 – 그렇습니다.

알로이지우스 – 이 공부가 대양과 같음을 모른단 말인가? 네스토르만큼 산다고 해도 지치지 않아야 할 텐데? 난관을 거칠 것이다, 에트나산보다 거대한 짐을 지고. 어떤 경우라도 평생의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면 – 일단 선택하면 옳고 그름은 여생의 운이 좋은지 나쁜지에 달려 있으므로 – 이 예술에 발을 들이려는 사람은 결심하기 전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선견지명을 발휘해야 하네. 음악가와 시인의 삶은 무릇 그런 것이네. 자네는 어린 시절에 이 예술에 자연히 강렬하게 끌린 적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 조화로운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받은 적이 있는지 없는지 기억해야 하네.

요제푸스 – 네, 가장 감동받았습니다. 까닭을 알기도 전에 이 오묘한 몰입의 힘에 압도되어 모든 생각과 감정을 음악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이해하고 싶은 타오르는 열망이 저를 지배하고 거의 의지 밖으로 저를 몰아가며 낮이나 밤이나 사랑스러운 선율이 저를 감돕니다. 그러니 제 적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낙담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익힐 동안 제 건강이 허락하기를 바랍니다. 옛 성현 말씀에 공부는 일이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하셨으니까요.

알로이지우스 – 자네의 적성을 알게 되어 기쁘네. 아직 한 가지 의구심이 남았네. 그것만 없다면 자네를 내 제자로 받아들이겠네.

요제푸스 – 말씀해 주십시오, 존경하는 스승님.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제 뜻을 꺾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알로이지우스 – 혹시 자네는 부를 원해서 이 삶을 선택하려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생각을 고치게. 파르나소스를 다스리는 분은 플루토스가 아니라 아폴로이시네. 부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길을 가야 하네.

요제푸스 – 아니요, 분명 아닙니다. 사랑하는 음악을 쫓는 것 말고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소득을 얻을 생각은 없습니다. 제 스승께서 무릇 소박한 삶에 만족해야 하고 재물보다 성취와 명성을 추구해야 하니 그 보답으로 덕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로이지우스 – 바라던 제자를 얻어 매우 기쁘네.
교황 마르첼로 미사 - 아뉴스 데이

독일 작곡가 한스 피츠너(1869-1949)는 푹스가 만든 팔레스트리나의 이미지를 교과서 밖으로 끌어냈다. 그의 오페라 <팔레스트리나>(1917)는 트렌토 공의회가 열리던 무렵 창작의 벽에 부딪힌 작곡가의 모습을 그린다. 이는 개인적인 한계를 넘어 시대를 뛰어넘는 일이기도 했다. 피츠너는 팔레스트리나가 아내를 잃은 뒤 더욱 침체한 것으로 그렸지만 앞서 본 대로 그것은 <마르첼로 미사>가 출판된 뒤의 일이다. 어쨌거나 피츠너는 팔레스트리나라는 위대한 작곡가의 경계를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가 아닌, 300년 뒤 조성 음악의 붕괴 지점까지 연장했다. 피츠너의 친구였던 소설가 토마스 만은 『파우스트 박사』라는 문제작에서 크리스토퍼 말로나 괴테가 그렸던 근대적인 연금술사 파우스트를 20세기를 사는 가상의 작곡가로 바꿔놓았다. 남독일 출신의 유망한 작곡가 레버퀸은 젊은 시절 이탈리아 고도 팔레스트리나에 머문다. 어느 날 찾아온 악마는 그에게 ‘사랑’을 포기하는 대가로 창작력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어쩌면 팔레스트리나도 같은 제안을 받았는지 모른다. 악마는 제안했다. 

“트렌토 공의회는 미사곡을 금지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너는 아들과 아내를 잃을 것이다.”

다행히 팔레스트리나는 구원받았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성직자가 되려 하자 하느님은 그에게 부자 미망인을 보내셨고, 엄청난 창작력도 되돌려 주셨다. 그는 사는 동안 무려 104곡의 미사와 300곡 이상의 모테트, 140여 개의 마드리갈, 그 밖에도 수많은 곡을 썼다. 그를 스승으로 따른 제자들은 부를 쫓지 않는 대신 덕을 얻어 음악의 아름다움을 수 세기에 걸쳐 연장했다. 그러나 음악이 소박한 삶을 버리고 부귀영화를 추구하자 다시 창작력은 말랐고 악마가 제안한다. 이번엔 어디서 무엇을 버리라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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