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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29. 2021

육체야 같이가, 영혼이 말했다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의 첫 번째 오페라

로마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톰마소 데이 카발리에리는 1532년 23세 때 57세의 미켈란젤로를 처음 만났다. 톰마소는 용모도 빼어났고 신체 건강했으며 품행도 모범이었다. 당연히 그는 미켈란젤로가 그리거나 조각한 작품 속 울퉁불퉁한 근육의 모델이었다. 제우스가 독수리로 변해 하늘로 데려가던 미소년 가니메데스나 아폴론의 아들 파에톤을 그린 스케치, 그리고 <최후의 심판> 가운데 그리스도 또는 그가 바라보는 사도 도마의 모델이 톰마소이다. 두 사람은 미켈란젤로가 156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이 차를 뛰어넘어 우정을 나눴고 건축가로 미켈란젤로를 돕던 톰마소는 친구의 임종을 지켰다.

몸 말리는 제우스

톰마소의 둘째 아들 에밀리오는 작곡가이자 안무가, 외교관을 두루 지낸 팔방미인이었다. 무엇보다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는 현존하는 첫 번째 음악극으로 꼽히는 <영혼과 육체의 묘사Rappresentatione di anima et di corpo>의 작곡가이다. 피렌체의 야코포 페리가 첫 오페라 <에우리디체>를 초연한 직후였지만, 페리의 작품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의 묘사>의 결정반 두 가지가 모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표지로 쓴 것이 우연이 아니다. 각각 크리스티나 플루하르(2005)와 르네 야콥스(2012)가 지휘한 것이다.

육체야 같이 가! 영혼이 말했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에 그리스 신화와 요한 계시록을 넘나드는 초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것처럼 카발리에리의 <영혼과 육체의 묘사>도 의인화된 개념들이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놓고 철학 연극을 펄쳐 보인다. 야콥스가 지휘하고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한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공연이나 뉴욕 세인트 피터 교회의 실연을 보면 카발리에리가 작곡가이자 안무가, 외교관이어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https://youtu.be/vxULv7UZJc0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도 도마의 모델이 톰마소이다. 그러니까 미켈란젤로의 거죽을 든 바르톨로메오 사도 위의 사람이다

<영혼과 육체의 묘사>는 희년으로 선포된 1600년, 사육제를 대신할 목적으로 작곡되었다. 교황이 직접 주관한 행사였다. 희년에는 닫혔던 성 베드로 사원의 성문(聖門)이 열리고 전 세계 기독교도가 죄를 씻기 위해 로마로 성지 순례를 왔다. 2월 17일 하필이면 교회의 가르침에 거듭 반기를 들던 자유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가 캄포 데이 피오리에서 화형 당하던 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발리첼리 산타 마리아 교회 옆 오라토리오 수도회에서 <영혼과 육체의 묘사>가 초연되었다. 그러고 보면 지동설을 지지하고 가톨릭 교리를 트집 잡던 브루노도 사육제에 목마른 군중을 위한 먹잇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 공연의 맛보기. 사육제이다

대본을 쓴 아고스티노 만니는 필리포 네리의 오리토리오 수도회와 가까웠다. 그는 로마 시민에게 이미 익숙한 ‘영혼Anima’과 ‘육체Corpo’의 대화에 속세의 덧없음과 일탈하려는 인간의 본성, 평정심의 추구와 하느님의 보호에 대한 믿음을 덧입혔다. ‘시간Tempo’이 인생의 무상함을 얘기한다. ‘쾌락Piacere’이 육체를 자신에게 묶으려 한다. 그때 영혼이 ‘하늘Cielo’에게 자신과 육체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 “현인이 속세의 즐거움을 사랑해야 하나요, 멀리해야 하나요?” 천상의 목소리가 질문을 되뇐다. ‘세상Mondo’과 ‘속세의 삶Vita Mondana’이 화려하고 눈부신 인물로 소개되자 ‘수호천사Angelo Custode’가 그들의 옷을 벗기고 가장(假裝) 아래 숨은 죽음의 해골을 들춘다. ‘지성Intellect’과 ‘조언Consiglio’은 지옥이 아닌 천국에 이르는 길을 택하라 권하며 천국의 축복받은 영혼과 지옥의 저주받은 영혼을 보여준다. 끝으로 영혼과 육체가 진리의 길을 택하면 천국이 열리고 하느님 나라의 찬란함이 드러난다.     

뉴욕 세인트 피터 교회의 바흐 콜레기움 전곡 공연. 단체명이 기막히다. 서울 북경반점의 사천 짜장면?

일면 뻔한 교훈적인 이야기가 사육제를 빼앗긴 로마 시민을 만족시켰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것이 설교가 아닌 연극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팽팽한 여러 대립 개념이 무용과 합창을 동원해 끌고 가는 여정은 교회도 미처 예상 못 했을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심지어 공연장 밖에선 브루노의 화형식이 광기를 부추기지 않았는가! 1889년 빅토르 위고, 헨리크 입센 등의 주도로 불쌍한 브루노의 동상이 그가 화형 당한 자리에 들어섰을 때 교황 레오 13세는 단식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요한 바오로 2세가 그의 처형을 공식 사죄했다. 일신의 쾌락을 거부한 당대의 육체가 진리의 길을 택한 끝에 천국으로 들어가는 데 삼사백 년이 걸린 셈이다.

로마 캄포 데 피오리(꽃의 들판)의 브루노 동상. 브루노 발터 아님.

미켈란젤로가 그린 꿈틀대는 살점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왔고, 아들인 그가 음악으로 숨결을 불어넣었으니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했음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과 다른 이들의 음악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내 음악이 사람들을 즐겁고 슬프게 한다면 카치니나 페리의 음악은 사람들을 지루하고 역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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