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 이야기
1910년에 나온 조지 프레드릭 영의 『메디치 가문 이야기The Medici』는 제목이 한정하는 것과 달리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메디치 가문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역사’이다. 작은 은행가 집안에서 시작해 교황을 배출하고 스스로 군주가 되기까지 내력을 통해 이탈리아 근대사를 집약했다. 르네상스의 밑거름을 메디치 가문이 일궜다는 사실은 요즘 “인문학에 관심 좀 있다” 하는 사람은 모두 안다.
영의 『메디치 가문 이야기』는 가문의 역사를 곁에서 지켜본 예술가들의 작품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국부 코시모는 조각가 도나텔로를, 그의 아들 피에로와 손자 로렌초는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를 후원했다. 로렌초의 품에서 성장해 로마로 간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이 쫓겨나고 개혁을 부르짖는 수사 사보나롤라가 집권한 공화정 시기에 피렌체로 돌아왔다. 영은 미켈란젤로가 후기로 갈수록 전만 못한 작가였다고 평가절하한다. 뒷날 코시모 1세가 군주의 반열에 오른 뒤 두 번째로 맞은 전성기에 피렌체는 부국강병을 이루며, 흩어진 선대의 학문과 예술의 업적을 다시 모았다. 중요한 인물 순으로 르네상스 전성기 예술가를 살펴보자.
영은 도나텔로가 고대 그리스 이래 최초의 환조(丸彫) 조각가였음을 지적하며, 나아가 형상은 정신에 깊은 사상을 전달하는 목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가르쳤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말한다. 도나텔로가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예술가가 가야 할 목표를 제시한 지도자라고 평가한 것이다. 반면에 미켈란젤로에 대해서는 당대 제일의 영국 평론가 존 러스킨의 주장을 반복한다. 작가가 주제 묘사에 재능을 쓸 때는 예술이 꾸준히 진보했지만, 반대로 재능을 뽐내려고 주제를 택한 뒤로 예술은 퇴보했다는 것이다. 삼손이나 헤라클레스처럼 보이는 <다윗>과, 역시 주제보다는 작가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모세>가 모두 그런 예라고 폄하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뒤에 다시 생각할 일이다.
영의 보티첼리 그림 연구는 오늘날 많은 오류가 수정되기도 했지만, 역사 서술로는 드물게 흥미진진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화가의 화풍을 네 시기로 나눠 설명한다. 첫째, ‘통풍환자’ 피에로가 다스리던 시기에 그린 <유딧>, <마리아 찬가의 성모>, <동방박사의 경배>, <불굴의 용기>에는 도나텔로가 가르친 대로 예술이 그저 대상을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점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성서의 주인공이나 의인화된 덕목을 메디치 가문의 일원과 주변인으로 훌륭하게 묘사했다.
두 번째 시기에 보티첼리는 피에로의 아들 ‘위대한 자’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의 시대를 눈부시게 그렸다. 그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 <마르스와 비너스>, <봄의 귀환>을 이때 그렸다. 1475년 피렌체에서는 성대한 마상시합이 열렸고, 시인 폴리치아노는 행사를 묘사한 시를 지었는데, 보티첼리가 거기에 그림으로 화답했다. 이 또한 위촉한 사람과 묘사한 대상에 대해서는 뒷날 다른 연구 결과가 밝혀지기도 했지만, 영은 오늘날 그저 ‘조개껍질에 올라선 벌거벗은 여인’으로 소비되는 그림이 왜 문예 부흥의 상징인지 소상히 적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움이 새들의 노래가 가득한 토스카나의 월계수 숲을 향해 바다를 건너오는 모습은 한 편의 영화와 같다.
메디치 가문이 쫓겨나고 개혁주의자 사보나롤라가 집권하면 보티첼리의 제3기 그림은 애조를 띤다. 메디치 가문을 향한 연민이 아니라,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듣고 따른 결과이다. 흥청망청하는 메디치와 타락한 교황을 싸잡아 비판한 사보나롤라에게 피렌체 시민은 물론이고 보티첼리나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도 동조했다. 영은 <석류의 성모>에 그린 슬픈 표정이 이 시기의 화풍을 집약한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사보나롤라가 이단으로 재판받고 처형된 뒤 보티첼리의 그림은 신랄한 풍자와 은유의 성격을 짙게 드러낸다. 이 시기의 작품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상>으로 대표되는 보티첼리의 웅변은 마치 그것을 어제 그린 듯이 생생한 어조로 다가온다.
영의 책은 메디치 가문을 단순히 르네상스 예술이나 학문과 연관 짓는 데 그치지 않고 좀 더 큰 시대 흐름을 포착하는 데 주력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디치 가문은 근대 서양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 시작부터 끝까지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39년 ‘국부’ 코시모가 페라라에서 열리던 공의회를 피렌체로 옮기도록 수완을 발휘한 것이 시작이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만남은 신지식의 유입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피렌체는 축적된 고대 학문을 고스란히 빨아들이는 스펀지가 되었다. 그런데 동방 정교회는 교황이 다른 주교에 비해 우위에 있다거나 오류 없는 존재라는 주장을 근거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힘겨루기를 하던 르네상스 시기의 세속적인 교황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격변하는 16세기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에서 메디치 가문은 두 사람의 교황을 배출했다. 레오 10세와 그의 사촌 클레멘스 7세였다. 그러나 이들 또한 그토록 막으려고 한 종교개혁을 더욱 거세게 일어나게 한 불쏘시개였다. 레오 10세는 성직자로 어울리지 않게 풍류와 사냥에 탐닉한 교황이었다. 그보다 훨씬 주도면밀한 클레멘스 7세는 자신과 가문의 위상을 공고히 하려고 외교적인 노력과 권모술수를 발휘했지만, 그럴수록 교회의 몰락과 가문의 쇠락은 가속화되었다. 클레멘스 7세는 공의회의 개최를 막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가톨릭 주교단과 개신교 세력까지 모인 공의회가 자신의 위상을 깎아내릴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아울러 클레멘스 7세는 피렌체를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는 군주국으로 격상시키려고 애썼다. 이 부분에서 영의 서술은 오늘날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 의견을 대변한다. 그는 교황이 잔꾀와 무리수를 동원해 자신의 사생아 알레산드로를 가문의 수장으로 삼았다가 오히려 장자 계열의 대를 끊어지게 했다고 서술한다. 결과는 얼추 맞지만, 알레산드로는 교황이 아닌 그의 조카 로렌초 2세의 서자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헌정한 로렌초 2세였지만, 그 교훈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자신도 서자도 아닌 딸 카타리나 데 메디치였다.
카타리나(카트린)는 온갖 수모와 곤경을 극복하고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가 되어 자식 셋을 프랑스 왕으로 만들었고, 두 딸은 각각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또 다른 딸 클로드는 로렌 공의 공비가 되었지만 27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엄마 잃은 손녀 크리스티나를 애지중지 맡아 키웠다. 1589년 성년이 된 크리스티나는 코시모 1세 메디치의 둘째 아들 페르디난도 1세와 결혼했다. 코시모 1세의 4대조는 메치디 장자 계열을 승계한 국부 코시모의 동생 로렌초였다. 장자 계열의 후손이 끊긴 뒤에 차자 계열로 대가 이어진 것이다. 페르디난도 1세 때 장자 계열의 방계 크리스티나가 메디치로 시집을 왔으니 장자 계열과 차자 계열이 다시 하나로 합친 것이다.
이쯤 해서 다시 메디치 가문과 예술의 관계로 돌아가자. 물론 나의 주된 관심사는 음악이다. 예술 여러 분야에서 메디치 가문이 이룩한 업적을 떠올리면, 자연히 음악도 중요한 사건이 많으리라 짐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 피렌체에서 태어난 음악가나 음악은 많지 않다. 가장 중요한 음악가로는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장 바티스트 륄리)와 루이지 케루비니를 들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며 프랑스 오페라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로마나 베네치아, 나폴리에 비하면 피렌체가 음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적다. 쉽게 말해 피렌체의 눈부신 미술작품들에 짝을 이루어 언급할 음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영은 베네치아의 유력 가문이 대대로 돈만 밝혔기에 학문과 예술 분야에 이름을 남길 대가를 못 배출했지만, 피렌체는 그보다 학문과 예술을 더 좋아했기에 돈을 헛되지 않게 썼다고 말한다. 베네치아를 사랑하는 사람이 듣는다면 깜짝 놀랄 발언이다. 물론 영이 『메디치 가문 이야기』를 쓴 1910년 무렵엔 르네상스는커녕 바로크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아직 레코딩 시대가 아니었기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악보 연구로 당대 음악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벨리니, 티치아노, 베로네세, 틴토레토와 같은 베네치아 화파가 설령 보티첼리, 도나텔로, 다빈치, 미켈란젤로만 못하다 해도 베네치아에 화가가 전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피렌체에서 활동한 음악가 중에 베네치아 악파를 대표하는 몬테베르디, 칼다라, 비발디 근처라도 갈 만한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음악 이야기가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다행히 영은 피렌체가 음악사에 이바지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빠트리지 않았다. 1600년 페르디난도 1세와 아내 크리스티나 대공비는 죽은 형의 딸 마리아를 프랑스 앙리 4세의 둘째 왕비로 보낸다(앙리 4세는 ‘여왕 마고’로 유명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과 이혼했다). 그 결혼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야코포 페리의 오페라 <에우리디체>가 연주되었다. 3년 전 초연된 오페라의 효시 <다프네>를 보완한 ‘종합예술’의 시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오페라의 시조로 꼽는 사람은 만토바에서 활동하다가 베네치아로 간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이다. 영이 돈만 밝히며 인재를 낳지 못 했다고 깎아내린 베네치아는 몬테베르디에서 비발디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오페라 전통을 쌓아갔다. 반면 피렌체는 베네치아나 나폴리, 밀라노가 음악의 주도권을 두고 겨루는 동안 사실상 아무 성과도 내놓지 못 했다. 주요 작곡가의 작품 가운데 피렌체에서 초연된 드문 예는 베르디의 초기작 <맥베스> 정도이다. 음악 분야에서 피렌체 열세의 까닭을 알아보는 것은 나의 다음 과제이다.
10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읽는 매력을 잃지 않는 영의 책은 번역 또한 아주 매끄럽다. 중간중간 도판도 적절히 배치해 이해를 돕는다. 다만 그간 밝혀진 오류와 더해진 연구 성과를 각주로 지적했더라면 더욱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