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더 감동입니다
『브루넬레스키의 돔』 -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대성당 이야기 (절판)
로스 킹 (지은이), 이희재 (옮긴이) | 세미콜론 | 2007년 4월
『브루넬레스키의 돔』 - 피렌체 <산타마리아 대성당> 이야기 (신간)
로스 킹 (지은이), 김지윤 (옮긴이) | 도토리하우스 | 2021년 10월
‘브루넬레스키’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보통 사람은 아마 그를 러시아인이라고 짐작하지 않을까? 그만큼 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의 거장은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보다는 덜 알려졌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가 완성한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은 르네상스가 이룬 결정적인 업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위대하다고 평가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의 돔을 참고해 만든 로마의 성 베드로 사원 돔은 규모나 아름다움에서 그에 미치지 못하고, 다빈치는 브루넬레스키가 돔을 짓기 위해 고안한 수많은 기계 장치를 보며 수학과 공학의 안목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달에 소개하는 『브루넬레스키의 돔』은 위대한 건축가의 업적을 벽돌 쌓듯이 차곡차곡 소개한 논픽션이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1377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1446년 세상을 떠났다. 단테와 조토는 그가 태어나기 거의 4, 50년 전에, 페트라르카는 3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다빈치는 브루넬레스키가 죽고 6년 뒤에 미켈란젤로는 거의 30년 뒤에 태어난 까마득한 후배였다. 브루넬레스키 당대에 피렌체의 맞수로는 로렌초 기베르티가 가장 명성이 높았고 그는 1378년에 태어났다. 브루넬레스키보다 열두 살 어린 국부(國父) 코시모 데 메디치가 집권하며 피렌체는 역사 속에 화려하게 등장했고, 코시모는 무엇보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돔의 완공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삼고 물심양면 후원했다.
대성당의 주춧돌은 1296년에 깔렸다. 그러나 1348년 유럽에 처음 불어닥친 흑사병 탓에 공사의 진척은 더뎠다. 1366년 외관을 어느 정도 완성하면서 마지막으로 돔을 어떻게 얹을 것인지 설계안을 공모에 붙였다. 네리 디 피오라반티라는 석공의 안이 받아들여진 것이 필리포가 태어나기 정확히 1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10년을 주기로 계속되는 흑사병과 외세의 침입으로 돔은 착공조차 쉽지 않았다.
1401년, 특별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피렌체 지배층은 흑사병을 이길 기원을 담은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 대문을 공개 입찰했다. 이 경연에서 기베르티가 우승하고, 탈락한 브루넬레스키가 로마로 떠났다는 것이 대개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좀 더 뜯어보면 실상은 다르다. 대인관계에 능했던 기베르티는 응모작에 많은 사람의 의견을 반영했고, 주관이 강했던 브루넬레스키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독창적인 작품을 냈다. 그런데도 우열을 가릴 수 없자 선정 위원회는 두 사람을 공동 우승으로 선정했지만, 이를 용납 못 한 브루넬레스키가 거부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진위를 떠나 브루넬레스키의 로마행은 뒤따를 산타마리아 대성당 돔 공사 수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로 고대 로마가 남긴 불가사의한 건축물 판테온을 연구하고 온 것이다. 이때부터 대략 1416년까지 그의 행적은 드문드문 드러날 뿐 베일에 싸인 경우가 많다. 혹자는 그가 고대 유적을 참고하기 위해 중동에 다녀온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거대한 돔을 기둥 하나 없이 얹은 판테온은 브루넬레스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 또한 1420년 성당 건축 위원회 응모에 비계 없이 돔을 짓겠다는 계획안을 냈다. 먼저 얘기하면 누군가 베낄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전한다. 구체적인 모형을 제출하지 않은 브루넬레스키에게 위원회가 설명을 요구하자 그는 달걀을 바닥에 세워보라는 문제를 낸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라 알려진 이 일화는 사실 브루넬레스키에 얽힌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지만, 책을 읽고 보면 콜럼버스와 무관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다. 1436년 돔이 완성되고 먼 뒷날인 1459년에 파올로 토스카넬리라는 과학자가 대성당에 해시계를 설치한다.
돔의 압도적인 높이 덕에 가능한 정밀한 시계였다. 토스카넬리는 관측을 토대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예측한 뒤, 친분이 있던 포르투갈 사제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제는 당대 대서양 항해에서 앞서가던 포르투갈 국왕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지만, 그의 조카인 제네바 뱃사람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는 그 편지를 읽고 새 인도 항로의 존재를 확신했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 아래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롬보가 바로 콜럼버스이니, 그는 브루넬레스키의 돔에 크게 빚졌다.
브루넬레스키가 전무후무한 규모의 돔으로 대성당을 덮을 수 있었던 비결은 권양기(윈치)나 기중기 같은 기계의 작동 원리를 꿰고 있었고, 벽돌의 오늬 쌓기(헤링본)나 원형 고리를 포개어 압력을 분산한 것처럼 시대를 앞선 기술력 덕분이다. 그러나 그런 실무 감각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자신의 소신을 관철할 의지와 열망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돔 공사 수주 뒤 브루넬레스키가 승승장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숱한 시기와 중상모략뿐 아니라 그 또한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신세였던 적도 있었다. 대리석을 강으로 운반하려고 고안한 ‘일 바달로네’가 제 기능을 못 한 일이나, 루카와 전투 당시 수공(水攻)을 펼치려다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코시모 데 메디치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고, 최고의 조각가 도나텔로나 제일의 학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어려운 고비마다 도움을 줬다.
『브루넬레스키의 돔』에는 대성당의 완공을 기념하는 1436년 3월 26일 성모 수태고지 축일 헌당식과 그때 불린 찬가가 잊지 않고 묘사되었지만, 그 찬가 <이제 장미꽃이 피었네Nuper rosaum flores>를 지은 사람이 당대 제일의 작곡가 기욤 뒤파이였다는 사실은 빠트렸다. 그러나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는 뒤파이가 브루넬레스키나 도나텔로 못지않게 위대한 예술가였음을 지적한다. 브루넬레스키의 돔은 뒤파이의 음악과 더불어 진정한 완성을 본 것이다.
캐나다 작가 로스 킹은 『브루넬레스키의 돔』 외에도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 『다빈치와 최후의 만찬』, 『파리의 심판』과 같이 예술사의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 논픽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브루넬레스키의 돔』이 가장 주목받은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대중에게 잊혔던 거장의 업적을 다시 부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2003년에 민음사가 처음 국내 출판했고, 2007년 계열사 세미콜론에서 개정판을 냈다. 그러나 2014년 이후로 절판되어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 사이 국내에도 르네상스와 메디치 열풍이 불며 숱한 관련 책이 나왔지만, 여전히 브루넬레스키는 국적을 궁금케 하는 낯선 이름이었다.
내가 이 글을 쓰던 무렵 유명 정치학자 김지윤이 새로 번역한 책을 ‘도토리하우스’가 발간했다. 18년 전에 비하면 국내 여건도 좋아졌지만, 만듦새나 번역 수준으로 볼 때 내가 새 책을 살 이유는 없어 보였다. 옛 책에서 아쉬웠던 색인은 이번에도 빠졌다. 참고문헌도 빠졌지만 아쉬운 대로 각주로 짐작할 수 있다. 각주를 보고 놀란 것은 킹이 토대로 한 여러 저작이다. 브루넬레스키의 첫 전기를 쓴 마네티의 책을 비롯해 하워드 잘만이 1980년에 낸 전기도 1차 참고문헌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왕에 묻혔던 책이 다시 나왔으니, 앞으로 아직 소개된 적 없는 책까지 추가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