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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an 28. 2022

머리는 몇 등이 적당한가?

세상의 머리를 만든 미켈란젤로

마이클 하트가 1978년에 쓴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었던 100인The 100: A Ranking Of The Most Influential Persons In History』은 말 그대로 인물의 이름값보다는 후대에 미친 영향력을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1위부터 10위까지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무함마드

2. 아이작 뉴턴

3. 나사렛 예수

4. 부처

5. 공자

6. 성 바오로

7. 채륜

8. 구텐베르크

9.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10.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종교와 과학을 인류사의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문화 예술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었다. 그나마 순위에 이름을 올린 사람으로는 31위의 셰익스피어, 45위의 베토벤, 50위의 미켈란젤로, 72위의 바흐, 98위의 호메로스가 있을 뿐이다. 네티즌의 투표로 실시간 순위를 반영하는 랭커닷컴의 순위로는 다 빈치가 2위, 베토벤이 20위, 셰익스피어가 24위, 미켈란젤로가 27위, 모차르트가 30위로 문화 예술계의 파워가 약간 상승한다. 어차피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이므로 내 예측이나 기대가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비슷하고 다른가를 비교하는 정도로 훑어볼 따름이다.     

온라인 22,500원

2019년에 원서가 나온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이 지난 연말에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다. 미 중부 명문 사립인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의 석좌 교수 윌리엄 E. 월리스는 저명한 미켈란젤로 연구가이다. 이 책은 흔히 전반기의 걸작으로 널리 알려진 미켈란젤로의 생애 마지막 시기를 파고든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88세까지 장수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을 멈추지 않았지만, 만년의 작업에 대해서는 합당한 평가를 못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는 미켈란젤로의 모든 업적 가운데 성 베드로 사원의 건축이 가장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몇 달 전 읽고 기고한 책의 내용과 대비해 흥미로운 주제이다. 『메디치 가문 이야기』의 저자 G. F. 영은 거꾸로 미켈란젤로가 후기로 갈수록 타성에 젖어 퇴보하는 예술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 존 러스킨의 평가를 반복한 영의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인지라, 이번 월리스의 책에 더 관심이 갔다.

미켈란젤로만 볼 거면 5권만 사면 된다. 온라인 40,500원

미켈란젤로는 지인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살았을 때 이미 그가 서명한 전기가 나왔을 만큼 사료가 풍부하다. 르네상스 미술에 대해 가장 방대한 기록인 조르조 바사리의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도 결국인 그가 존경한 미켈란젤로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리려는 의도로 쓴 책이다. 책을 쓸 때 자료가 많은 것은, 자료가 없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어떤 정보를 선택해 어떤 관점으로 쓰느냐에 따라 책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띨 수 있다. 다행히 월리스는 미켈란젤로 자신과 후대 사가들이 남긴 수많은 자료를 팔레트의 물감처럼 다뤘다. 그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가 만년 대부분을 머문 로마 시내와 잠시 피란했던 스폴레토의 전원까지 구석구석 발품을 아끼지 않았고 이런 기초자료를 대가의 건축 청사진처럼 견고하게 구성했다. 덕분에 독자는 때로는 역사책을 읽듯이, 때로는 소설에서 만나듯이 노인 미켈란젤로를 가까이 살펴볼 수 있다.

움브리아의 스폴레토 전경. 미국의 찰스턴과 자매 도시로 작곡가 잔 카를로 메노티가 양쪽에서 축제를 연다. 메노티는 오페라 <시집가는 날>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월리스는 일흔 살의 미켈란젤로가 오래전 서거한 율리오 2세 교황의 무덤을 장식하는 데 쓰려고 만든 <모세>를 마침내 완성해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으로 옮기는 1545년의 어느 날로 시작한다. ‘사슬에 묶인 베드로’라는 이름의 성당 이름이 예고한 것일까? 미켈란젤로는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그리스도의 수제자이자 첫 번째 교황인 베드로가 순교한 터에 지은 성당을 완성하는 일에 결박되고 만다. 일찍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지은 교회는 중세를 지나며 쇠락했고, 아비뇽 유수를 겪으며 약해진 교황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15세기 무렵부터 대사원의 건축에 돌입했다. 율리오 2세의 명으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시작한 일은 다음 세기까지 스무 명의 교황을 거치며 150년 동안 계속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가운데 17년 정도를 책임졌지만 오늘날 성 베드로 사원을 완성한 사람이 그라는 데 이견이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저자는 면밀하게 파헤쳤다.

산탄젤로에서 본 베드로 사원

바오로 3세가 한창 진행 중인 대사원 공사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겼을 때 노년에 지친 그가 선뜻 응했던 것은 아니다. 도리어 미켈란젤로는 빠져나갈 궁리만 생각했지만, 결국엔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다. 신앙이 깊었던 그는 건축 사역이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적으로 그는 전임자인 안토니오 상갈로의 설계안대로 계속 짓는다면 앞서 그가 젊은 시절을 바쳐 프레스코를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을 허물어야 할 위기를 직감했다. 나아가 상갈로의 번드르르한 설계는 공학적인 문제점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건물의 규모에 맞는 돔을 얹는 일이 난제로 남을 가능성이 컸다. 미켈란젤로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는 건축을 감독하는 관리들과 싸워야 했고, 인부와 하급 간부에게 그간 한 일이 헛수고였다는 사실을 이해시켜야 했다.

앗사리, 다른 바사리의 연주로 <단테 소나타>도 들어보자

책을 읽다가 보면 건물을 짓는다는 것이 단순히 도면을 그리고 설계대로 자재를 쌓아가는 것이 다가 아님을 자연히 알게 된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쉬운 일이다. 건축 총감독의 가장 어려운 임무는 공정을 머릿속에 그리며 통제하고 인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일이었다. 단순히 짓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비용 면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한 세기 전 선배 브루넬레스키가 고향 피렌체에서 이뤄낸 대성당의 돔을 덮는 것과 똑같은 일이 로마의 자신에게 부여되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것은 당대 최고라면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 완공을 보지 못할 것을 알았음에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 브루넬레스키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고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와 상갈로의 작업을 해체하고 가장 적확한 설계도를 완성했으며, 자신이 대사원의 완공을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대체 불가한 안으로 확정했다. 그렇기에 대사원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델라 포르타, 베르니니, 폰타나 등을 거쳐 50여 년 뒤에나 완공되었지만, 대사원의 최종 완성자로 미켈란젤로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책의 여러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몇 가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가령 동시대의 다 빈치는 회화와 조각 가운데 어느 쪽이 우월한지를 놓고 ‘파라고네’라는 논쟁을 이끌어 회화 우위론을 펼친다. 같은 문제에 관해 미켈란젤로는 훨씬 신중하게 접근한다. 그는 위대한 화가임과 동시에 조각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결론이 다 빈치보다 훨씬 생산적이다. 그는 “그런 논쟁에 몰두하느니 어서 작품을 만들겠다”라고 말한다.


많은 사가들이 그렇듯이 이 책도 팔레스트리나의 <교황 마르첼로 미사>를 작곡가가 1555년 마르첼로 2세 교황의 20여 일 재임 중에 작곡한 것이라 적었다. 그러나 곡이 출판된 1562년 무렵 트렌토 공의회에서 교회음악에 대해 논의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때 작곡했으리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1555년이라면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불렸을 것이고, 1562년이라면 팔레스트리나가 재임했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사원에서 울려 퍼졌을 것이다. 언제 어디였거나 미켈란젤로는 1564년에 사망했으니 팔레스트리나의 미사를 알았을 것이다.

-> 마르첼로 미사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고

나는 미켈란젤로의 두 후배 벤베누토 첼리니와 조르조 바사리의 경쟁 관계에 관심이 많다. 첼리니가 조각가로 선배를 잇는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면, 바사리는 창작보다는 저술로 후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첼리니는 바사리를 얕은 글솜씨로 옛 거장에 기생하는 소인배로 보았고, 바사리는 자신의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에도 첼리니를 미미하게 다뤘고 미켈란젤로 장례 위원회에서도 그를 배제하는 식으로 응수했다. 월리스는 자신과 생일이 같은 바사리에게 친근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바사리를 미켈란젤로의 믿을 만한 측근으로 대해는 반면, 첼리니는 허세가 센 풍운아로 치부한다. 이러한 평가는 실제로 첼리니도 숨기지 않은 자기 개성이다. 반면 바사리는 자신이 미켈란젤로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많은 생각을 공유했다고 적었지만, 월리스 스스로 밝혔듯이 그 횟수는 매우 과장되었다. 누가 더 허세가 센 것일까?     

처음 얘기로 돌아가자. 미켈란젤로는 설문에 따라 역사적 영향력 순위에서 50위나 27위를 차지했다. 미술가로는 가장 높은 순위이다.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사원의 건축을 맡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13세기 초 영국 여행자의 기록처럼 미켈란젤로 이전에 “로마는 종탑의 도시”였으나 이후 그의 대사원을 모델 삼아 생긴 로마는 돔의 도시가 되었다. 러시아 작가 미하일 고골이 『로마』에서 언급했듯이 “도시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때조차” 돔은 남아 더욱 크게 보인다. 미켈란젤로는 ‘세계의 머리Caput Mundi’를 만들었다. <다윗>이나 <천지창조> 따위는 나중 문제이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116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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